제61화
지크 일행은 오스프린의 한 숙소에 짐을 풀었다.
숙소는 상당히 높은 가격을 자랑하는 고급 숙소였다. 그렇다고 귀족들이 머무르는 그런 숙소는 아니었고 대상인이나 부호들이 머무르는 급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숙소의 가격은 충분히 비쌌다.
게다가 지크, 한스, 스녹에게 각각 개인방이 배정되었으니, 단순하게 따져도 비용은 세 배로 불어났다.
하지만 일행의 자금을 쥐고 있는 지크가 부담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이 숙소는 요하임이 잡아준 것이었다.
사실 요하임은 지크를 영주성에 초대하려 했다. 그들과 같이 먹고 마시며 전염병을 막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냥 도움을 준 것도 아니다. 지크는 말할 것도 없고 한스와 스녹도 혼자서 여러 명 분의 일을 손쉽게 해냈다.
같이 고생한 사람들도 세 사람을 무척이나 좋게 봤다. 당연히 자신의 손님으로서 영주성에 머무르게 하며 적절한 포상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영주성에 도착하자마자 박살났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험상궂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사과를 하던 요하임. 참을 수 없는 굴욕과 무력감에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던 모습이 애처로웠다.
그럴 만도했다. 영지의 둘 째 공자가 데리고 온 손님을 문지기가 막아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지기 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표정에도 난감함이 어려 있었다. 그들의 의지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예상대로 그들은 첫째 공자, 비욤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어째서 영주가 아닌 첫째 공자가 영주성의 명령권을 쥐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적어도 대놓고 무시할 수 있는 명령은 아닌 모양이었다.
지크는 요하임을 위로했다. 요하임이 자신을 위해준다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회귀 후에도 그와 좋은 관계를 쌓았다는 사실이 지크를 제법 기분 좋게 했다.
하지만 요하임은 지크를 그대로 보내지 않았다.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급히 숙소를 잡아줬다.
그리고 꼭 찾아 갈 테니 숙소에 머물러달라 부탁하고는 영주성으로 들어갔다.
‘그 녀석도 고생이군.’
자신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자신보다 조금 더 나쁜 상황 같았다.
‘그 백작가의 분위기보다 최악인 곳이라니. 그런 곳에서 밥이 넘어가나?’
자신도 마지막에 집안을 뒤집어 놓을 생각으로 복수의 칼날을 곱씹지 않았다면 회귀 후 그 백작가에서 단 하루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역시 그냥 데리고 나올까?’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쁠 것도 없었다. 지크야 회귀 전 부하가 다시 동료가 되는 것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그럼 남은 건 요하임의 의향인데, 요하임 또한 가문을 나올 생각을 하고 있지 않던가.
‘녀석의 혈액공포증이 여행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있긴 한데, 까짓것 그 정도는 이해해주면 되고.’
그리고 정 안 되면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정착하게 도와주면 그만이다.
‘나중에 한 번 의향을 물어 보자.’
가볍게 결정을 내린 지크는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를 즐기기 시작했다.
배고플 때 먹고 졸릴 때 자고 종종 술 한 잔을 기울인다. 오스프린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도시였기에 오락거리도 충분히 있었다.
한스와 스녹도 썩 만족한 눈치였다. 한스는 지크와 다른 방을 쓰며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를 전력으로 즐겼고 스녹은 지금껏 한 번도 누리지 못한 고급 생활에 푹 빠졌다.
지크도 당분간은 둘에게 별 관여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슬슬 요하임에게서 연락이 올 시기이건만 지크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일단 숙소에 꼬박꼬박 돈은 들어오고 있으니 잊은 건 아닌 것 같다만, 그렇다면 더 심각한데?’
뭔가 신변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니까. 지크에게 신경쓰지 못할 정도로.
예전 마왕이었던 기억을 떠올려 영주성에 한 번 쳐들어가볼까 생각까지 할 즈음이었다.
기다리던 방문객이 도착했다. 하지만 요하임은 아니었다. 얼마 전 전염병을 퇴치할 때 요하임의 부관 역할을 하던 브로드란 기사였다.
“오랜만이네. 지크.”
나이도 적당하게 있고 최하긴 해도 귀족 계급인 기사라 그는 지크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지크도 반발하지 않았다. 원래 이게 정상이다. 누구에게든 말을 올려 하는 요하임이 이상한 것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브로드 경. 드라큘 공자님이 보내서 오신 겁니까?”
“비슷한 걸세.”
브로드의 표정이 안 좋았다. 지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닐 것이다. 브로드 또한 그 전염병이 창궐한 마을에서 지크와 같이 노력을 한 사이니까.
그렇다면 이건 요하임에게 무슨 일이 있어서 그렇다고 봐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요하임 공자께서 사죄의 말씀을 전해달라 말씀하셨네.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무슨 일 있습니까?”
“…감금당해계셨네. 이번 전염병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책임으로 말이야.”
“마을 사람들이 전부 죽은 게 이유입니까?”
브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병의 전염력과 치사율이 심상치 않고 돌던 병의 숫자도 하나가 아닌, 무척이나 특수한 경우라고 설명을 드렸네만….”
“통하지 않았군요.”
“…첫째 공자께서는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야.”
아무래도 첫째 공자란 단어 앞에 붙이고 싶은 수식어가 많아 보였다. 예를 들어 ‘그 개 같은’이라든가 ‘빌어먹을’이라든가 아니면 ‘그 욕심 많은 돼지새끼’라든가. 아니면 그보다 한층 더 고상한 욕설일 수도 있었다.
“첫째 공자? 영주님은 어쩌고요?”
“영주님은 지금 와병중이시네.”
“설마 전염병은 아니겠죠?”
아무래도 마을에서 본 게 있으니 병 하면 당장 전염병이 떠올랐다. 그러나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브로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만약 전염병이라면 몇몇 사람이 더 걸렸겠지.”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영주가 전염병에 걸렸더라도 아니, 이곳 오스프린에 전염병이 창궐한다 해도 별 걱정하진 않았을 것이다.
지크는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뿐, 착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그럼 둘째 공자님은 아직도 갇혀 계신 겁니까?”
“아니. 어제 풀려나셨네.”
하지만 브로드의 안색은 펴지지 않았다.
“뭔가 또 일이 생겼군요.”
“또 다른 마을에 전염병이 퍼진 모양이더군.”
알 만했다. 지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긍정이라곤 한 톨도 없는 비릿한 미소.
“다시 그 마을에 파견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네.”
브로드의 음색이 침통해졌다.
‘아주 죽으라고 등을 떠미는군.’
그 첫째 공자라는 인간의 인식이 훤히 보였다. 하지만 아마 의도는 그것만이 아닐 것이다.
‘겸사겸사 요하임을 따르는 인간들의 충성도도 깎아먹고 말이야.’
요하임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적다고 했다. 하지만 대책팀에서 봤을 때, 당시 요하임과 함께 파견된 사람들은 확실하게 요하임을 따르고 있었다.
혹 대책팀의 지휘를 잡은 그 짧은 시간 안에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것이 아닐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기엔 보이는 충성심이 너무 컸지.’
그렇다면 나오는 답은 하나.
‘요하임을 따르는 자들도 전염병을 막는 일에 투입시키고 있는 거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충성심이 높다고 해도 죽음의 공포, 그것도 전염병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은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전염병이 도는 마을에 투입되는 일이니 당연히 희생도 따를 것이다.
‘요하임이 전염병에 걸려 죽는 게 베스트겠고. 그렇지 않더라도 요하임의 세력을 깎을 생각이겠지. 병에 걸려 죽든, 전염병에 걸린 마을에 투입되기 싫어 세력에서 이탈하든 놈들에게는 나쁜 일이 아니니까.’
괘씸했다. 다른 놈들의 권력투쟁이야 알 바 아니지만 거기에 휘말린 사람이 요하임이 아니던가. 거기에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다.
‘그 첫째 공자놈 이름이 뭐라고 했지?’
분명 비욤 드라큘이라고 했을 것이다.
‘이놈은 나쁜 놈이지?’
권력 욕심도 없고 전염병을 막기 위해 열심히 일한 요하임을 단지 자기 권력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려 들고 있다.
조건이 충족됐다.
‘이놈을 어떻게 엿 먹이지?’
지크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하지만 이내 브로드와 대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생각을 잠시 뇌리 한구석으로 밀어 놨다.
“가는 날짜가 어떻게 됩니까? 인연이 인연이니만큼 이번에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응? 그게 정말인가?”
내심 바라던 것이었는지 브로드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게 지크는 다시 한번 전염병이 만연한 마을로 향했다.
* * *
툭!
커다란 구덩이에 시체를 던진다. 아이가 가지고 놀다 질려 던져버린 인형처럼 시체가 구덩이 아래서 흐느적댔다. 하지만 그 시체를 인형이라고 비유하는 것은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다.
온갖 고통과 절망 속에서 죽어간 그 시체는 무척이나 끔찍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 봐야 애도하거나 눈을 돌리지, 너무 많은 시체를 봐온 터라 이제는 모두 기계처럼 담담히 일할 뿐이었다.
시체들 위로 기름 먹인 나무들이 줄줄이 떨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횃불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화르륵!
구덩이 안에 불이 붙었다. 나무에 먹인 기름이 일차로 불을 키웠고 나무가 그 불을 오랜 시간 유지시켰다. 화염과 열기가 휘몰아치는 구덩이를 한 번 확인한 사람들은 거리를 벌렸다.
아무리 이 짓이 익숙해졌다고 해도 시체가 타는 모습과 냄새는 여전히 꺼려졌다.
하지만 완전히 떠나지도 않았다. 냄새가 잘 나지 않는 곳까지 물러나 화염 충만한 구덩이를 바라봤다. 마치 엄숙한 장례식을 보듯이.
“이걸로 끝이네요.”
한스가 착잡하게 말한다. 스녹은 옆에서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아무리 익숙해졌다지만 마지막 마을 사람을 태우는 불꽃을 보고 감정이 생기지 않을 리 없었다.
결국 전염병이 돈 이번 마을도 주민들이 몰살당했다.
증상은 예전에 봤던 전염병과 비슷했다. 정말로 진저리날 정도의 병이었다.
지크는 덤덤이 불꽃을 쳐다봤다. 이제 와 이 정도의 죽음으로 마음이 흔들리진 않는다. 그러나 어쨌든 마을을 구하고 전염병을 막는다는 목표는 실패였다.
실패는 역시 기분이 더럽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처진 기분을 끌고 가지도 않았다. 실패는 기분이 더럽지만 그것도 이미 수백 수천 번을 해봤다. 게다가 이건 자신이 세운 목표도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또 몇 주간 여기서 머무르라고 시간을 질질 끌 테니 계획이라도 짜볼까?’
나쁜 놈, 비욤 드라큘을 엿먹일 계획을.
생각만으로도 히죽히죽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아무리 지크가 눈치없고 배려가 없다 해도 그 정도의 자제력은 있었다.
죽어간 사람들에게 명복을 빌려는 듯 사람들은 불꽃이 꺼지기 전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불꽃이 꺼졌다. 그 후 사람들은 마을마저 불태우고 모든 뒤처리를 끝냈다. 그리고 오스프린으로 모든 일이 끝났다는 소식을 보냈다.
그러나 지크의 예상대로, 이번에도 귀환 명령은 내려오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