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지크와 한스, 스녹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늘의 저녁 메뉴도 어제와 같이 주변에서 사냥을 한 고기였다.
그러나 오늘의 고기는 지크가 잡은 것이 아니었다. 더 이상 보살펴야 할 병자들도 없는 터라 사냥에 다른 병사들을 동원할 수 있던 것이다.
지크가 사람들을 먹여 살리다시피 하는 생활도 끝이었다.
주변에서 잡은 멧돼지의 어느 부위를 나무에 꽂아 익힌, 원시적이기 그지없는 요리. 향신료는커녕 소금도 없는 터라 돼지의 역한 냄새가 그대로 올라왔다.
물론 지크는 음식을 가리지 않았다. 회귀 전에는 몇 날 며칠을 물만 먹고 버틴 적도 있었다.
그러나.
‘슬슬 물리는 것도 사실인데.’
화려한 요리도 필요없다. 빵과 스튜 같은 기본적인 요리가 먹고 싶었다. 그래도 일단 들고 있는 건 모두 먹어 치웠다.
한스와 스녹도 자신의 몫을 모두 먹어치워 단출한 저녁 식사가 끝났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까요?”
한스가 물었다. 전염병이 도는 마을에서 열심히 일을 했다. 그 일을 원망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슬슬 편안한 침상에서 곤히 잠들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도 당연했다.
옆에서 노웸을 껴안고 있던 스녹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스녹은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지크, 한스보다 더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행 초짜에게 이번 일은 확실히 하드했다.
“글쎄. 아마도 쉽지는 않을 거다.”
“역시 우리가 병에 걸려 있을까봐 그런 걸까요?”
“없지는 않겠지만 주 이유는 아니야.”
이번에 퍼진 전염병들은 하나같이 짧은 잠복기를 지녔다. 이미 열흘이나 넘게 야영을 하고 있는 상황. 병에 걸렸다면 발병을 넘어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럼 무슨 일 때문일까요?”
“아마도 우리 가문에서 있었던 일과 비슷하겠지.”
지크가 한스를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가문에서 있던 일. 새삼 그때의 일을 떠올린 한스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고개를 푹 숙이고 지크의 시선을 피했다. 지크는 그 모습을 보고 낄낄댔다.
그러나 지크의 출생을 모르는 스녹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이곳을 지휘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알지?”
“드라큘 님 아닌가요?”
스녹이 대답했다.
“그래. 그리고 여기는 드라큘 영지지. 즉, 요하임 드라큘은 이곳을 다스리는 영주 가문의 사람이란 소리다.”
스녹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여러 사람을 도우며 들은 것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부터 지크가 하는 말은 광산에서 광석만 캐던 스녹과는 인연이 없던, 이른바 높으신 분들의 권력투쟁이란 것이었다.
“보통 전염병이 도는 곳에 영주 가문의 사람을 보내지는 않아. 게다가 요하임 드라큘은 그냥 영주 가문의 사람 정도가 아니라 드라큘 영주의 차남이다. 거기에 건강도 좋지 않아 보이지. 어느 조건을 따져 봐도 이런 곳에 책임자랍시고 보낼 만한 사람이 아냐.”
“그럼 어째서 그 분이 오신 거죠?”
“가장 확률이 높은 건 이거다.”
지크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거기서 병 걸려서 죽어라.”
“서, 설마 그럴 리가요.”
스녹이 깜짝 놀랐다.
스녹도 권력 투쟁이란 것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전염병이 도는 것에 어떻게 사람을 죽으라고 보낸단 말인가.
스녹의 가치관으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스는 내심 지크의 의견에 긍정했다. 백작가의 하인으로서 귀족들간의 권력투쟁을 피부로 느껴봤다. 무엇보다 지크와 그레이그의 관계도 엄연히 권력투쟁의 한 부류였다.
‘그래도 죽으라고 전염병이 도는 곳으로 보낸다니. 다른 귀족 가문은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
스틸월 백작가에서 지크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고, 지크를 후계자 자리에서 쫓아내기 위한 작업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지크를 죽여 버리자는 분위기가 풍기진 않았다.
“왜. 우리 가문에 비해서 너무 살벌해?”
“…조금 그런 것 같습니다.”
이제는 지크의 이런 짓궂은 발언에도 익숙해진 것일까. 한스는 순순히 긍정했다.
“드라큘 가문의 분위기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와는 조금 다를 거다. 우리 가문은 내가 무능하다고 알려진데다 가문 사람들이 전부 그레이그의 편을 들고 있었잖아? 그 상황에서 나는 죽일 정도의 가치도 없는 존재였어. 괜히 손을 썼다가 문제만 만들 가능성이 컸지”
진상을 알고 있는 한스도 모르는 스녹도 지크의 발언에 얼어붙었다. 그에 반해 지크는 덤덤했다. 지크에게 그 정도는 심각한 사안이 아니었다.
“뭐, 내가 가문을 나오지 않았으면 또 모르지. 아버지나 그레이그 놈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를 싫어하던 가신들 중 암습 계획 짤 놈 정도는 있었을걸?”
“…….”
스틸월 백작가를 좋아하는 한스는 지크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알던 귀족 사회는 충분히 그런 일이 일어날 만한 사회였기에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저, 저기….”
엄습한 침묵을 스녹이 깼다. 이런 분위기에 끼어들어도 되나 싶은 마음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던 모양이다.
스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크 님은 혹시 귀족이십니까?”
“정확히는 귀족이었다. 지금은 때려 치고 나왔지만.”
스녹이 경악했다. 설마 자신이 이것저것을 배우고 있는 여행자가 귀족일 줄은 상상도 못 한 것이다.
하지만 놀란 건 스녹만이 아니었다.
“슬슬 오시는 게 어떻습니까?”
지크가 소리를 높여 말한다.
누구 보고 하는 말일까? 한스와 스녹이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는 요하임을 발견했다.
“그…, 죄송합니다. 그저 지크 씨와 얘기를 나누려다가….”
“괜찮습니다. 어차피 숨길 만한 이야기도 아니니까요.”
지크가 자신의 옆으로 자리를 만들었다. 조금 망설이던 요하임이 지크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지크 님이 귀족이란 건 사실입니까?”
지크가 불쾌해하지 않는 것 같자 요하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적이 있긴 했죠.”
어느 가문일까. 질문이 목구멍 바로 아래에서 간질거렸지만 요하임은 그걸 다시 삼켰다.
그런 적이 있다. 그 말은 지금은 아니란 소리다. 그렇다면 굳이 가문 명까지 묻긴 어려웠다.
하지만 다른 질문은 끝내 참지 못했다.
“어째서 가문을 나왔는지 알 수 있을까요?”
사실 요하임도 요즘 가문을 나가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고 있었다. 혹시 선배(?)가 될지도 모를 지크에게 무언가 정보를 얻고 싶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계승 문제입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가문 전체가 장남인 제가 아닌, 차남인 제 동생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 했죠. 그래서 나왔습니다.”
틀린 점은 없다. 그러나 가문을 박차고 나오는 와중 지크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아는 한스는 그런 설명으로 괜찮나 하는 의문을 품었다.
“…우리 가문과 사정이 비슷하군요.”
요하임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공자님도 가문에서 똘똘 뭉쳐서 괴롭힙니까? 계승권 포기하라고?”
회귀 전에야 요하임, 요하임 불렀지만 지금 둘은 그런 관계가 아니다. 때문에 지크는 요하임을 격식에 맞춰 공자님이라고 불렀다.
다만, 전염병에 함께 맞서며 상당히 친해진 터라 말투는 꽤 편해진 상태였다.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저는 차남이라 정통성은 형님에게 있고, 절 지지하는 세력도 형님보다 적습니다. 솔직히 절 지지하는 세력이라고 하는 것도 웃깁니다. 그냥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권력에 눈이 먼 사람들은 그것조차 위협으로 느끼지만요.”
“그렇죠. 전 백작 자리에는 흥미가 없는데 말입니다.”
“말했습니까?”
“말했습니다. 물론 말만 그런 게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여주고 있고요. 지금은 친한 사람들과도 일부러 거리를 벌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당장 생각나는 상황은 두 가지군요. 공자님이 굉장히 뛰어나거나, 공자님의 형님이란 사람이 굉장히 옹졸하거나.”
요하임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둘 다군요.”
“그렇진 않습니다. 형님도 계승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시는 것뿐이고, 저도 그렇게 자질이 뛰어난 편이 아닙니다.”
“그렇군요.”
긍정은 하지만 말투나 모습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아니다.
요하임이 뭔가 더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여기서 더 변명을 해봤자 궁색하기만 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대신 화제를 돌렸다. 지크가 가문에서 나와 어떻게 살았는지에 더 관심을 보였다. 아무래도 진짜 가문을 나올 때를 대비해 생생한 체험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지크도 자신의 회귀 전 상황을 생각해가며 이런저런 조언을 해줬다.
한참 대화를 나눈 후 요하임은 만족하며 돌아갔다.
다시 그곳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
저만치 걸어가는 요하임의 등을 한스의 시선이 쫓았다.
“저분도 가문을 나올 생각이실까요?”
“글쎄. 하지만 가문을 나와서 세상을 떠도는 것도 나쁜 일만은 아니지.”
그 산증인이 바로 지크 자신이 아니던가. 정말로 요하임이 가문을 튀어나온다면 여러 가지 조언과 편의를 봐줄 생각도 있었다.
그렇게 그날 저녁 식사는 마무리 됐다.
그리고 일주일 뒤. 요하임이 이끄는 병력에게 귀환 명령이 떨어졌다.
* * *
영지의 주도로 향하는 병사들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얼마만의 귀환인가.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가족의 얼굴을 그렸고 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친구의 얼굴을 그렸다.
퀘퀘한 냄새가 나는 막사가 아니라 건물 안 침대에서 휴식을 취했고 밥도 소박하지만 정성이 들어간 가정식을 먹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지크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하는 인간다운 생활에 모두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행진을 한 지 얼마.
“보입니다!”
드라큘 영지의 주도, 오스프린에 도착했다.
* * *
화려한 방이었다. 값비싼 가구와 장식물들이 가득 들어차,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는 것도 저어되는 방.
하지만 방의 인테리어가 잘 되어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방을 멋지고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비싼 물품들을 들여 놓았다기보다는 비싼 물품들을 자랑하기 위해 억지로 쑤셔 넣었다는 이미지였다.
가구도 배치되어 있다기보다는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것 같았다.
천하다. 그 세 글자로 정리할 수 있는 방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 방의 주인인 청년은 부끄러움 하나 없이 비싼 소파에 앉아 자신의 앞에 있는 노인에게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있었다.
“결국 그놈이 멀쩡하게 올라왔다고?”
청년은 굉장히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의 태도는 무척이나 거만했다. 인성이 그대로 보였다.
누가 이 방의 주인이 아니랄까봐 그 청년은 그가 있는 이 방과 똑같은 수준의 인간이었다.
“죄송합니다.”
“입바른 소리는 집어 치우고. 어떡할 거야. 그냥 이대로 올라오게 둘 거야? 그냥 중간에 습격을 해서 전부 죽여 버리는 게 어때? 이 집에 요하임 그 녀석이 나다니는 꼴을 더 이상 보기 싫단 말이다!”
청년은 바로 요하임의 형이자 현 드라큘 백작가의 정통 계승자인 비욤 드라큘이었다.
피를 나눈 형제, 그것도 지크와 그레이그처럼 이복형제가 아닌 아버지도 어머니도 같은 동기(同氣)인 요하임이건만, 비욤의 거친 음색은 그가 요하임을 일절 동생취급하지 않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암살은 너무 요란합니다. 분명 의심하는 사람이 나올 겁니다. 만약 증거라도 발견됐다가는 비욤 님의 계승을 반대하는 의견이 비등할 수도 있습니다.”
“빌어먹을!”
상황이 자신의 뜻대로 풀리지 않자 비욤은 신경질을 냈다.
“대체 그놈은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마을 인간들이 전멸할 정도로 지독한 병이라며! 같이 간 병사나 의사들도 뒈진 놈들이 있다 그랬잖아! 어떻게든 죽으라고 무리해서 물자도 최소한만 보냈는데! 그런 와중에 그 멸치 같은 놈이 어떻게 살아남은 거냐고!”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비욤이 괴성을 질렀다. 탁자를 발로 차 뒤집어 엎고 소파를 주먹으로 두들겼다.
그렇게 한참을 난리를 친 후에야 비욤은 진정했다.
“…다른 계획을 가져 와. 이번엔 기필코 요하임 그 녀석을 죽일 수 있는 걸!”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비욤이 말한다. 노인은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방을 나갔다.
잠시 후, 방 안에서 다시 비욤이 괴성을 고래고래 지르며 화풀이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