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그건 지크가 한창 마인으로서 세상을 휘젓고 다닐 때의 일이다.
항상 그랬듯, 지크와 그의 부하들은 또 어떤 세력과 충돌하여 그들을 모두 몰살시켰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굳이 기억에 담아둘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지크의 뇌리에 깊게 새겨져 있는 한때의 풍경이 있었다.
너른 평야 위에 끔찍한 시체들이 늘어서 있다. 사방에 뿌려진 대량의 혈액 위에 쓰레기처럼 구겨져 있는 시체의 바다는 과연 그곳이 지옥인지 현실인지 혼동을 줄 만큼 아찔했다.
흐른 피가 내가 되어 점점이 웅덩이를 만든다.
그중에서도 한층 커다랗게 만들어진 웅덩이가 있었다. 사람 열댓 명 정도가 들어가도 괜찮을 듯싶은 크기의 웅덩이.
끔찍하게 찰랑이는 그 피 웅덩이 속에, 놀랍게도 사람이 보였다. 마치 목욕을 하듯, 그 인영은 피웅덩이에 몸을 푹 담근 채 가끔씩 웅덩이를 튀기며 장난까지 치고 있었다.
《또 그 끔찍한 취미 중이냐?》
웅덩이의 사람, 요하임이 멈칫했다. 빙그레 웃음을 두르고 뒤를 돌아본다.
《지크 대장입니까?》
《그래그래. 네 대장이다.》
못 볼 꼴 본다는 식으로 인상을 찌푸린 지크가 어기적어기적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발치에 거슬리는 시체를 퍽퍽 차면서 다가오는 그도 그다지 제정신으로 보이진 않았다.
《예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건 취미가 아닙니다. 치료예요. 이렇게 피에 몸을 푹 담그고 있으면 온갖 지병에서부터 가벼운 편두통까지 금세 가신다고 하더군요.》
《대체 어떤 참신한 뇌구조를 갖고 있는 분께서 그런 황당하다 못해 뇌에 칼을 꽂아 교정해주고 싶은 헛소리를 했냐?》
《의사가 그랬어요.》
《돌팔이가 확실하군. 어떤 놈이야? 말해 봐. 내가 가서 박살을 내줄게. 혹시 그때 내어준 치료비가 있다면 겸사겸사 회수도 하고. 아니, 위자료까지 확실히 받아내마.》
《이미 죽었을 겁니다. 대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사람 하나를 혼내주려 저승까지 가지는 못하잖습니까?》
《쳇! 저승으로 도망가서 자신의 책임을 병폐하려고 하다니. 하여간 요새는 소명 의식을 갖고 있는 의사 놈들이 없어요.》
마인을 넘어 주변에서 슬슬 마왕이라까지 일컬어지는 지크가 할 말은 아니지 않을까.
그러나 요하임은 대꾸하지 않았다. 느긋하게 어깨에 피를 끼얹기까지 한다. 지크의 말에 별 관심이 없는 게 분명했다.
잠시 그를 보던 지크가 가볍게 혀를 찼다.
〈역시 제정신이 아니야.〉
그의 주변에 미친놈들이 우글거린다지만 요하임을 비롯한 몇몇은 다른 놈들보다 한 차원 더 위였다.
〈제정신 박힌 인텔리는 나밖에 없다니까.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서 미친놈 지수를 조금이라도 내려야지. 부끄러워서 살 수가 있나.〉
물론 지크의 내심을 들었다면 아무리 피 목욕에 정열을 쏟고 있는 요하임이라도 한마디를 하지 않고 버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누가 누구를 보고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는 거냐면서.
물론 뱀파이어라는 이명을 얻고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요하임이라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는 없었다.
《같이 들어오시겠습니까?》
자신에게 향하는 지크의 시선을 잘못 해석했는지 요하임이 지크에게 권유했다.
팔까지 벌려가며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모습이 자신의 취미 아니, 치료를 널리 퍼뜨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지크는 거기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래, 그 정신 나간 짓이 몸에 좋다고 하자. 네가 몸 어디에 아픈 곳이 있다고 아주 전장마다 한 번도 안 빼먹고 그 짓을 하는 거야?》
《전 연약합니다. 척 봐도 그래 보이지 않습니까?》
《네 몰골이 당장이라도 무덤 파고 드러누워야 할 것 같은 모습인 건 인정한다만, 네가 연약해? 오늘만도 토벌군 5,000을 너 혼자 갈아버리지 않았냐?》
《척 봐도 연약해 보이는 저를 향해 그렇게 무리지어 덤벼들다니. 하여간 요새 세상 각박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다니! 지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약간 패배감마저 느껴졌다. 지크도 나름 뻔뻔함으로 적들의 속을 박박 긁어 놓는 일에 도가 터 있었지만, 요하임의 저건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그래.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감사합니다, 대장.》
요하임이 웅덩이의 벽면에 등을 갖다 댄다.
《후우, 좋다!》
《…….》
천하의 지크도 말문이 막혀 요하임의 그 취미…아니, 치료를 한동안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그런 요하임 드라큘이 혈액공포증이라니….’
혹시 장난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거짓된 약점을 내보여 자신을 낚으려는 것일까.
‘아니, 처음 본 인간인 나한테 그딴 짓을 왜 해.’
혹 그럴 만한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해도 창백한 요하임의 얼굴을 보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역시 한심해 보이죠?”
지크의 눈빛을 오해한 것일까. 요하임이 낙담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도 적잖이 마음을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본인의 체질을 싫어하시는군요.”
“좋아할 리가요. 이 체질 때문에 얼마나 손해를 보고 살았는지.”
자세한 걸 말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지크도 그의 과거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는 않았다. 요하임이 그에게 말했던 건 출신뿐이었다. 지크도 과거에 대해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기에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았었고.
하지만 미래를 아는 지크인 만큼 이 정도의 말은 해줄 수 있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고칠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를 표하긴 하지만 그저 그런 립 서비스로 아는지 그다지 목소리가 밝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크는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힘주어 말했다.
“그냥 해본 말이 아닙니다. 당신이라면 꼭 그 체질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래. 그냥 극복을 넘어 피웅덩이에서 목욕을 한다는 취미까지 들일 수 있을 정도로.
묘한 확신에 찬 지크의 박력에 요하임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이후로도 전염병을 막기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의사와 신관들은 필사적으로 병자들을 살리려 노력했고 병사들은 전염병이 퍼지지 않도록 시체와 집, 가구들을 태워댔다.
하지만 사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격리되어 있는 마을사람들에게서 계속 병이 발병했다. 그리고 병에 걸린 사람들 중 회복되는 사람은 없었다.
치사율 100%.
어지간한 지크도 고개를 저을 정도로 독한 병이었다. 설상가상 의사와 병사 몇까지 병으로 쓰러지자 사기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게다가 영지에서 보내오는 지원도 적었다. 이러다간 전염병을 막는 게 아니라 전염병을 막기 위해 온 그들마저 몰살당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틀어쥐고 적시적소에 지시를 내리는 요하임과 그런 요하임에게 충성을 보내는 병사들. 자신들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의사와 신관.
그리고 지크의 존재 덕이었다.
오늘도 지크는 뒷산에 올라가 사냥감을 한아름 잡아왔다. 병자들은 물론이고 병자들을 돌보는 사람들도 체력이 중요하다. 일단 체력이 있어야 병이 낫기도 쉬워지고 걸리기도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력을 보존하기 위해 충분한 음식을 제때 섭취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영지에서 보내주는 물자가 적으니 식량도 충분할 리 만무하다. 제대로 먹지 못해 체력이 떨어져서 병을 막는 것이 한층 더 힘들어질 것 같았다.
지크가 사냥을 해 식량을 대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당연히 모두가 환영했다.
요하임이 이끄는 병사들은 모두 상당한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병사로서의 실력과 사냥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당연히 식량을 갖고 와주는 지크를 사람들은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크가 도움이 되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여기 프룬의 잎입니다.”
넓고 길쭉한 프룬의 잎은 붕대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어 붕대의 부족함을 채웠다.
“솔베리의 열매와 드로그의 뿌리, 딕의 줄기도 여기 있습니다.”
거기에 의사들이 필요하다는 약초들도 쏙쏙 가져오니 지크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지크 님은 약초에도 해박하시네요!”
지크의 활약에 스녹이 감탄했다.
억지로 끌려 온 것과 본인의 의지로 따라온 것의 차이일까.
지크가 시키는 대로 따르며 속으로만 감탄하는 한스와 달리 스녹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표현을 할 때가 많았다.
“너도 배워두는 게 좋아. 이런 건 기억해뒀다고 손해 볼 일은 없으니까.”
“네!”
스녹이 지크가 가져온 약초들을 머리에 새겨 넣기 위해 뚫어지게 노려보고 노웸이 옆에서 코를 킁킁 대 냄새를 기억한다. 그 적극적인 자세는 분명 스녹의 성장에 확실한 양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스녹이 노력한다 해도 짬을 어떻게 해볼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 있습니다.”
여행길에 산을 주파하며 보이는 약초마다 지크에게 철저히 주입된 한스는 제법 능숙하게 약초를 찾으며 지크를 도왔다.
“선배도 굉장하군요!”
“어, 응. 지크 님에게 많이 배웠으니까.”
스녹의 선망의 눈초리가 부담스러운지 한스의 목소리가 어색하다. 그러나 나쁜 기분은 아닌 듯 입꼬리가 씰룩였다.
그렇게 지크 일행의 도움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병자들을 살리고 전염병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란 건 있는 법이다.
화르르륵!
마을을 거센 불길이 휘감았다. 임시 병동으로 쓰던 건물부터 의사나 신관들이 쪽잠을 자던 건물들, 마을을 감싸고 있던 목책들까지 전부 화마가 휩쓸고 있었다.
사고로 불이 난 건 아니다. 요하임의 명령 하에 병사들이 불을 놓은 것이다.
이 마을은 더 이상 필요가 없으니까. 거주민들이 모두 사라진, 전염병이 만연했던 마을을 가만히 둘 이유는 없었고 없애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설마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줄이야.”
불타는 마을을 보며 한스가 착잡하게 중얼거렸다.
백작가에 머물며 종종 어떤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다는 정보를 얻긴 했었다. 몇몇 곳은 심각하다고 사람들이 얘기를 나누는 것도 들었다.
그러나 이 마을처럼 단 한 사람도 병에서 살아남지 못한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마을을 구하는 걸 실패했다.
대책본부를 지휘한 요하임부터 의사, 신관은 물론이고 말단 병사들까지 전부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그들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증거였다. 거기에 동료들 몇조차 병의 마수에 휘감겨 이승을 떠났으니 사기는 더더욱 낮았다.
“결국 이렇게 돼버렸군요.”
요하임이 지크 일행에게 다가왔다. 걸음은 그들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마을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안타까우시겠습니다.”
지크가 말했다.
“안타깝죠. 떠나간 사람들의 생명도 그렇고, 불타는 저 마을도, 그리고 잃어버린 우리의 동료들과 노력들까지도. 전부 안타깝습니다.”
‘역시 회귀 전의 요하임과는 달라.’
지크는, 조금 젖은 눈으로 마을을 보고 있는 요하임을 쳐다봤다.
회귀 전의 요하임은 이런 상황을 보고 감상에 젖을 위인이 아니다. 감상에 젖는다고 해도 취할 피를 가진 인간이 병 때문에 몰살한 것에 안타까워하는 정도일 것이다.
아마도 뭔가의 계기로 인해 변했을 터.
“여러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제가 세상을 떠도는 이유는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여러분을 도울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무척 고귀하신 분이시군요.”
요하임이 감탄했다.
“현재의 상황을 보고했으니 곧 귀환 명령이 올 겁니다. 혹시 폐가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군요. 그렇게라도 감사의 표현을 하고 싶습니다.”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지크도 요하임과 이렇게 금방 헤어지고 싶지 않았기에 그 초대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하루, 이틀, 며칠이 지나도 귀환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고, 그들은 폐허가 된 마을의 근처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