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지크의 제안을 요하임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한스와 스녹이 전염병이라는 존재에 겁을 먹었지만 지크는 그들의 뒤통수를 한 대 씩 때리며 걱정을 해소해줬다.
“한스 너 정도의 마력량이면 끄떡없다! 내가 네 수련을 그리 쉽게 시켰는 줄 알아? 그리고 스녹 너도 마찬가지다! 환수와의 계약자가 병에 걸려 죽어? 내 그토록 유쾌하고 멍청하게 죽은 계약자는 듣도 보도 못 했으니 걱정은 팽개치고 일이나 잘 해!”
다른 건 몰라도 능력이나 수련에 대한 지크의 신뢰도는 엄청나게 큰 둘이다. 때문에 둘은 걱정을 떨치고 일을 돕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염병 대처의 어려움은 그 전염병이 자신들에게도 옮을 수 있다는 공포가 전부가 아니다.
“으으…!”
마을에서 나온 시체를 본 스녹이 신음을 흘렸다. 스녹보다 조금 더 경험이 많은 한스도 마찬가지였다. 데면데면한 건 지크뿐이었다.
‘흠, 곱게 죽진 못했군.’
지크가 시체를 내려다봤다.
온몸에 심한 발진과 고름이 가득 들어차 있다. 감지 못한 눈은 누렇게 떴고 머리카락은 모두 빠졌다. 손가락과 발가락도 없다. 절단 부위에 검게 남은 흔적이 그것들이 썩어서 떨어졌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시체에서 나는 심한 악취가 코를 마비시킬 것 같다.
“우웨엑!”
“우욱!”
결국 한스와 스녹은 토악질을 시작했다. 시체를 가지고 나온 병사가 둘을 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별 말을 하진 않았다. 한스와 스녹이 겪고 있는 일은 그들도 이미 거쳐간 길이었다.
“이걸 저쪽 구덩이에 넣어주십시오.”
지크는 병사의 말에 따라 들것을 들었다. 한스와 스녹은 잠시 내버려뒀다. 적응할 시간을 조금 줄 생각이었다.
‘물론 계속 저러고 있으면 엉덩이를 걷어차주겠지만.’
그러나 당장은 자신의 관대함에 기뻐하게 두는 것도 괜찮으리라.
지크는 들것을 들고 구덩이로 갔다. 미미한 열기가 느껴졌다. 구덩이 안에는 온통 그을린 흔적들과 잿더미가 된 나무들, 그리고 타버린 시체들이 있었다.
그곳은 시체를 태우는 소각장이었다.
새로 추가 된 건지 구덩이에는 아직 타지 않은 시체 몇 구가 더 쌓여 있었다.
지크는 그 안으로 시체를 던져 넣었다. 새로운 시체 하나가 구덩이 안에 추가됐다. 시체들을 쳐다보다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이거 상당히 심각한데?’
전염병이라는 존재 자체가 심각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체의 상태를 보면 이번 전염병은 한층 더 심상치 않아 보였다.
지크는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온갖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명 소리도 들린다. 의사들과 신관들이 소리치고 병사들이 뛰어다닌다.
마치 전쟁터의 최전선에 온 것 같았다.
“이제 좀 괜찮냐?”
한참을 게워낸 효과가 있는지 한스와 스녹이 좀비 같은 걸음으로 다가왔다.
“죄, 죄송합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이건 너무 끔찍해요.”
“확실히 전염병이 돈 마을 중에서도 조금 더 끔찍한 곳이긴 하지.”
회귀 전, 전염병이 돈 곳을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이곳은 지크의 경험도 아득히 능가하는 곳이었다.
고작해야 몬스터 정도만 죽여 본 한스, 이제 막 여행을 떠난 스녹에게 가혹한 환경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을 쉬게 만들 생각이 지크에게는 없었다.
“이제 충분히 쉬었지? 그럼 이제 마을에서 일 좀 거들어. 설마 내가 일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놀겠다는 깜찍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
그런 생각을 일말이라도 하고 있다면 그 깜찍한 생각을 끔직한 악몽으로 바꿔 줄 생각이었다.
둘은 몸을 한 번 떨더니 급히 마을로 들어갔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병의 공포와 끔찍한 시체가 그들의 정신을 좀 먹고 있었지만, 지크의 분노를 정면으로 맞는 것보다는 나았다.
한스는 물론이고, 스울을 떠난 뒤 고된 훈련으로 지크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한 스녹도 재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당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돕기 시작한 둘을 만족스럽게 쳐다 본 지크도 다른 사람을 돕기 시작했다.
* * *
밤이 되자 드디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됐다. 전염병을 막는 일에 낮밤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제 막 일을 돕기 시작한 셋에게 요하임이 나름 편의를 봐준 것이다.
게다가 셋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지 요하임은 그날 저녁 식사 제의를 해 왔다. 당연히 지크는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시간이 되자 지크는 한스와 스녹을 데리고 요하임의 막사로 갔다.
막사 안에는 이미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전염병을 막기 위한 최전선이니만큼 식사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여기서 식사 투정을 할 만큼 개념없는 인간은 없었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모자랄 때는 말씀해주시면 더 갖다 드리겠습니다.”
요하임이 웃으며 말했다.
음식은 수수하지만 제법 괜찮았다.
“새삼 말씀드립니다만 여러분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솔직히 손 하나 하나가 부족한 참이었거든요.”
요하임이 웃었다. 좋지 않은 안색에 피로가 잔뜩 묻은 웃음을 띄우자 마치 병자 같다.
혹시 그도 전염병이 걸린 것이 아닐까. 한스와 스녹이 힐끔거리며 의심할 정도였다.
“저희들이 별로 한 건 없습니다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아뇨. 정말로 도움이 됐습니다. 솔직히 이런 곳에 오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의사조차 제대로 구하기 힘든 판에, 스스로 도움을 주시겠다는 분은 더더욱 드무니까요.”
어디가 잘리거나 부러진 외상은 보통 신관들의 성력을 통해 금세 회복할 수 있지만, 이런 전염병 같은 경우는 의사의 영역이다.
병에는 성력이 통하지 않는다. 아까 보였던 신관들도 성력만이 아니라 의료 지식 또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 목숨은 소중할 테니까요. 그런데 시체의 상태가 무척이나 끔찍하더군요. 무슨 병입니까?”
한스와 스녹이 먹는 걸 멈췄다. 시체의 끔찍한 모습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입맛이 떨어졌는지 슬그머니 식기를 놓았다.
하지만 지크가 막았다.
“먹어라. 일을 하려면 체력이 필요하니까. 들어가지 않더라도 억지로 쑤셔넣고 소화시켜.”
둘은 울상을 한 채 다시 식기를 잡았다. 그리고 꾸역꾸역 음식을 입 안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쓴웃음 지으며 지켜본 요하임이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의사들도 이런 병은 처음 본다고 합니다. 게다가 증상이 몇 개로 갈리는 것이, 돌고 있는 전염병이 하나가 아니라고도 하더군요.”
골치 아픈 일이 몇 개나 겹친 상황에 요하임은 머리가 아팠다.
“상당히 중요하고 위험한 사태군요. 그런데 그런 것에 비해 병력이나 지원이 부족하다는 느낌도 받습니다만.”
갑자기 나타난,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수상하기 그지없는 지크 일행은 지금 꽤 환영을 받고 있었다.
이유는 별것 없었다. 능력 있는 도우미들이었기 때문이다.
고작 그것만으로 정체불명의 인간들을 환영할 정도로 이곳은 일손이 부족했다.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건 전염병이다. 자칫하다가 영지 전체로 퍼져버리면 그 피해는 천문학적이 된다.
당연히 영주 가문은 억지로라도 사람들을 파견할 수밖에 없다. 여기 있는 병력 집단도 그렇게 움직인 것일 터.
요하임이 웃었다. 덧없고 힘없이.
그 표정만으로도 지크는 뭔가 뒷 이야기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공자님!”
바깥에서 누군가 급히 들어 왔다.
“무슨 일입니까?”
“새로운 증상의 병자가 발견되었습니다!”
요하임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 막사 밖으로 나갔다. 지크와 한스, 스녹도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천막 밖에는 횃불 몇 개가 타오르며 광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의사와 신관 몇몇이 심각한 얼굴로 모여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 중앙에 병자 한 명이 누워 있었다.
병자의 모습은 누가 봐도 심각하기 이를데없는 몰골이었다. 지금까지의 환자들처럼 발진이나 고름이 있는 건 아니고 살점이 썩어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피가 흘렀다. 아주 많이.
마치 온몸의 땀구멍에서 땀이 아닌 피를 배출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이미 피에 흠뻑 젖어 병자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똑! 똑!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피가 머리카락 끝에서 방울져 떨어져 내린다. 이 병자를 데려온 지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바닥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건….”
요하임도 병자의 몰골이 여간 충격이 아니었는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판단돼 다른 곳에 격리되어 있던 마을 사람입니다. 어느 순간 발작을 하더니 갑자기 이렇게 변했다고 합니다.”
“진행 속도는?”
“해가 질 때 즈음 발작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후 급속도로 병세가 악화되어 이 상태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으음….”
요하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 순간은 짧았다. 바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일단 이 사람의 병세를 모두 기록하세요. 그리고 이 사람과 같이 있던 집단을 새로 격리하고, 머무르던 건물은 태우세요. 이 사람이 격리 후 어떤 행동을 했고 누구와 접촉을 했으며 뭘 먹었는지도 전부 조사하세요. 아, 그리고 이 사람이 누워있는 이 자리도 불을 붙여 지져버리고요.”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 짧은 시간에 능숙히 대처를 하는 요하임의 모습을 지크는 기껍게 쳐다봤다.
분명 회귀 전, 지크와 세계를 상대로 난리를 칠 때만큼 강하진 않다. 여기저기 미숙한 부분도 보인다. 하지만 지금처럼 언뜻언뜻 미래의 모습이 보일 때도 있었다.
헤어진 옛 친구를 만나는 것 같아 천하의 지크도 조금 감상적인 느낌에 빠졌다.
‘그래. 회귀 전에 내 측근씩이나 된 녀석이니, 젊었을 때 이 정도 하는 것쯤이야 당연하지.’
상황을 정리한 요하임이 지크에게 다가왔다.
“저녁 식사에 초대해놓고 제대로 대접도 못 해드렸네요.”
“사정을 뻔히 아는데도 불만을 품을 만큼 전 머저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네?”
지크는 요하임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여전히 지병 네다섯 개쯤은 갖고 있을 만한 얼굴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까보다 더 뚜렷하게 상태가 안 좋아보였다. 무척이나 창백했다.
주변에 광원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빛을 반사해 마치 어둠 위에 뜬, 얼굴만 남은 유령으로 보였을지도 몰랐다.
“안색이 무척이나 안 좋아 보여서 말입니다.”
“아, 그….”
요하임이 자신의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러다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떨궜다.
“어차피 이곳에서 저희와 같이 있으면 곧 알게 될 일이니 미리 알려드리겠습니다. 이건 병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제가 개인적으로 약한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게 뭡니까?”
“피입니다.”
“네?”
“피요. 전 혈액공포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손을 살짝 베여 나오는 피에도 공포를 느끼죠. 아까 환자의 상태 때문에 그게 또 도진 겁니다. 어둠이 적절히 그 환자를 가려주지 않았다면 기절까지 했을지도 모릅니다.”
무안한 듯, 부끄러운 듯 요하임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뭐라고?’
지크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요하임을 쳐다봤다.
요하임을 얕보는 건 아니다. 혈액공포증을 가진 인간을 폄훼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지크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현실의 괴리에 충격을 받은 것뿐이다.
‘요하임 드라큘이 혈액공포증?’
회귀 전, 지크의 측근으로 활동할 때 요하임 드라큘의 이명은 뱀파이어.
능력은 ‘피의 지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