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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6화 (56/628)

제56화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숲은 한적한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간간이 들리는 건 생물들이 내뿜는 삶의 소음뿐. 흔들림 없는 푸른 수해의 정취가 고즈넉한 기운을 퍼뜨리며 타인을 위한 따스한 침묵으로 배려하는 것 같다.

그러나 천년만년 갈 것 같던 그 침묵은 웬 불청객들에 의해 사정없이 깨졌다.

콰앙!

공기가 진동하고 땅이 흔들린다. 나무 위에 앉아 쉬고 있던 이름 모를 새들이 일시에 날아 올랐다.

콰앙!

다시 한번 폭음이 일고 나무 몇 그루가 쓰러졌다.

푸른색으로 가득찬 수해 가운데에 구멍이 생겼다. 푸른 하늘 아래로 수해 아래 민낯이 드러났다.

그곳엔 전투가 한창이었다.

한스와 스녹이 팀을 맺고 지크에게 달려든다. 섬뜩한 칼날이 날아들고 용솟음친 대지가 덮친다. 하지만 지크는 그 모든걸 박살내고 회피하며 공격했다.

“크악!”

“아윽!”

검집에 뺨을 맞은 한스가 날아가고 복부를 차인 스녹이 주저 앉았다.

“이 새끼들아! 똑바로 안 하지! 내가 가르쳐준 건 다 어따 팔아먹었어!”

지크의 날선 고함이 고막을 때리자 둘 다 허겁지겁 일어났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 바로 앞까지 날아든 시퍼런 검기에 얼굴을 하얗게 물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스가 검을 들어 올렸고 스녹은 흙벽을 세웠다.

콰앙! 콰앙!

검기가 한스의 검과 스녹의 흙벽에 충돌했다. 둘이 비명을 내질렀다.

“일단, 너!”

순식간에 한스의 앞에 도달한 지크가 한스를 걷어찼다.

“내가 누누이 힘을 흘리라고 했지! 검기를 막고 몸이 굳으면 어쩌자는 거냐! 너는 그거냐? 지금만 살고 뒤는 생각 안 하는 막장들이냐? 그 놈들도 1초 뒤는 생각해 이 또라이 자식아!”

한스가 지면에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너!”

이번엔 스녹의 차례였다. 자기가 만든 흙벽의 잔해를 뒤집어쓰고 콜록거리던 그가 흠칫했다.

“상대의 움직임은 무조건 시야 안에 둬도 모자랄 판에 제가 벽을 세워서 시야를 막아? 네가 눈 말고 달리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할 능력이 뭐가 있어!”

퍽!

스녹도 걷어차여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너!”

스녹이 쓰러지기 전, 그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노웸을 잡아챈 지크가 으르렁거렸다.

“이 빌어먹을 두더지! 넌 그냥 저 머저리에게 힘만 주는 도구냐? 내가 수의 이점을 살리라고 했지! 협공이든 양동이든 너도 전투에 참여해, 이 자식아! 계약은 괜히 했냐!”

그리고 힘껏 던졌다.

쿠우우우!

“앗! 노웸!”

허공을 나는 노웸의 비명소리가 구슬프게 멀어졌다. 스녹이 허겁지겁 노웸에게 달려 갔다.

“하여간 발전이 없는 것들 같으니! 다시 덤벼! 아주 오늘 그 멍청한 행동들을 몽땅 다 뜯어고쳐주마!”

그리고 지크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힘조절은 하고 있지만 자비는 일절 없는 공격에 한스와 스녹(그리고 노웸까지)은 비명을 지르며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숲에서 다시 격렬한 전투 소리가 울려퍼졌다.

* * *

탁! 타탁!

모닥불이 빛과 온기를 흩뿌리며 마치 어머니처럼 주변을 어루만진다.

그러나 그 은혜를, 주변 인간들은 배은망덕하게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으으으으!”

모은 나뭇잎들 위로 깐 모포 위에 엎드려 있던 스녹이 신음소리를 냈다.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쿠우…. 쿠우….

그의 등에는 노웸이 그와 똑같은 포즈로 엎드린 채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괜찮아?”

“아, 간신히 살아 있는 느낌이에요.”

스녹은 간신히 고개만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스를 쳐다봤다. 그를 따라 노웸도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선배는 괜찮은 건가요?”

선배. 지크에게 먼저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유로 스녹이 한스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들을 때마다 뭔가 등허리가 간질간질거렸지만 듣기에 나쁘지 않아 한스는 내버려두고 있었다.

“괜찮을 리가 있겠어?”

모닥불을 헤집어 불꽃을 크게 하며 한스가 과장되게 몸을 뒤틀었다. 몸 곳곳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익숙해졌을 뿐이야. 지크 님은 훈련할 때 사정 같은 건 전혀 봐주지 않으니까.”

“전 익숙해진다 해도 그렇게 못 할 것 같아요.”

“못 할 것 같지?”

한스가 웃었다. 주변의 어둠과 화광이 불길하게 어울려 그의 웃음을 무척이나 비틀려 보이게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지크 님이 할 수 있게 만들더라고.”

“…위로로 들리질 않는데요?”

“위로가 아니니까. 앞으로 네가 처할 현실을 가르쳐주는 것뿐이야.”

“…….”

스녹이 모포에 얼굴을 처박았다. 동시에 노웸도 다시 스녹의 옷자락에 얼굴을 처박았다.

“설마 이렇게 고될 줄은 몰랐는데. 스울에서 훈련을 시킬 때는 안 이랬잖아요.”

“그거야 당연하지.”

한스가 대답한 게 아니다. 스녹이 다시 벌떡 고개를 들었다.

털썩!

모닥불 옆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커다란 사슴이었다.

잠시 사슴에 시선을 준 스녹이 허겁지겁 일어났다.

“오, 오셨습니까!”

마치 두목을 보게 된 건달 똘마니 같다. 등에 엎드려 있던 노웸이 바닥에 떨어지며 ‘쿠!’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눈치 볼 것 없어. 휴식 시간에 어떻게 지내는지는 자기 마음대로니까.”

지크가 모닥불 옆에 앉으며 말했다. 저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스녹이 한스의 눈치를 봤다.

한스가 고개를 끄덕여줬다. 정말로 지크는 휴식 시간에 뭘 하고 지내든 상관하지 않았다. 코를 골고 곯아 떨어져도 불쾌해하지 않는다.

한스의 보증도 있어 스녹은 몸에 힘을 풀었다. 그러나 아직 눈치가 보이는지 드러눕진 않았다. 떨어진 노웸이 다시 스녹의 옷자락을 붙들고 올라가려 낑낑댔다.

“손질하자.”

한스가 단검을 뽑아 사슴에게 다가가며 스녹을 불렀다.

사냥감의 해체 및 요리는 그들의 몫이다. 스녹은 근육통에 끙끙대면서도 한스의 지시를 듣고 어색하게나마 사슴을 해체하는 것을 도왔다.

비스듬히 누워 그 모습을 보던 지크가 입을 열었다.

“스울보다 훈련이 빡세져서 불만이냐?”

“아뇨! 그럴 리가요!”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내장을 꺼내며 인상을 찡그리던 스녹이 급히 대답했다.

“거기서야 아무래도 샘의 눈치가 보이니까 말이지. 나도 가족 앞에서 본격적으로 굴리기에는 양심에 가책을 느끼거든.”

양심. 지크와 정말로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단어가 나왔다.

하지만 한스는 묵묵히 사슴을 해체하는데 집중했다. 그것이야말로 숙련된 쫄다구의 모습이었다.

“어쩔 수없이 가볍게 굴릴 수밖에 없어서 내가 그때 얼마나 답답했는지….”

‘그게 가볍게 굴린 거였다고?’

스울에서의 훈련도 정말로 피를 토해가며 했던 스녹은 얼이 빠졌다. 하지만 오늘 훈련을 되새겨보면 그건 정말로 가벼운 훈련이었다.

‘어쩐지 나와 차이가 있더라니.’

그에 비해 한스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녹이 받던 훈련이 자신이 받은 훈련보다 월등히 쉬워보였던 것이다.

‘환수의 계약자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그런 거려니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구나.’

한스는 스녹에게 심심한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나뭇가지에 가득 꿰인 고깃덩이들이 모닥불 옆으로 좌르륵 늘어섰다.

기름을 뚝뚝 떨어뜨리며 노릇노릇 구워지는 고기의 냄새에 스녹이 입을 벌렸다. 입 밖으로 흘러넘칠 것 같은 침을 닦아냈다.

능숙하게 고기가 타지 않도록 꼬치를 돌리던 한스가 물었다.

“다음 목적지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스녹의 훈련 때문이라도 한동안 산에 머물 것 같지만, 그래도 분명 지크는 계속 이동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예전처럼 길 같은 것은 싹 무시하고 그저 직선으로만 이동을 하고 있는 거라고 한스는 추측했다.

‘다행히 목적지는 있다는 뜻이야.’

제발 그 목적지까지 빨리 도착할 수 있기를.

한스의 담담한 질문에는 그런 애타는 소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스프린으로 간다.”

‘거기가 어디지?’

들어보지 못한 곳이니 적어도 스틸월 백작령과 가까운 곳은 아닐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새삼 자신의 처지에 한숨이 나왔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예전의 평화로운 생활을 그리는 마음을 떨치지 못한 것 같았다.

“우리나라입니까?”

“아니, 옆 나라다. 부스타크에 있지.”

그는 무의식적으로 지도를 뒤져보려다가 관뒀다.

‘알아서 뭐 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한스는 그냥 속 편하게 포기해버렸다.

스울 이외의 지리에 깜깜한 스녹은 아예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다른 나라로 간다는 것에 조금 설레 할 뿐이었다.

그 속을 짐작한 한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행복할 때 행복해 해라.’

그 후 한스와 스녹은 고기를 굽는데 집중했다.

지크는 타오르는 모닥불을 쳐다봤다. 붉은 빛이 지크의 뇌리를 가볍게 자극했다.

‘어떻게 지내려나?’

회귀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오스프린으로 가려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회귀 전 기억을 뒤져 본 결과, 근처에서는 한동안 마인 출현 정보가 없다. 물론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마인이 있을 수는 있지만.

따라서 그는 여행 초기에 계획했던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그를 섬겼던 네 명의 마인을 찾아보는 것. 그중 하나가 바로 오스프린 출신이었다.

‘과연 어떤 놈이려나?’

회귀 전과 비교해 얼마나 다를지. 그리고 얼마나 같을지.

치밀어 오르는 호기심에 그는 살짝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의 심정과는 달리, 그가 지은 미소를 본 한스와 스녹은 혹시 자신들을 굴릴 생각에 미소짓는 건 아닌지 벌벌 떨며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 * *

한스와 스녹의 훈련을 빡세게 시키며 지크는 숲을 주파했다. 종종 마을에 들르기도 했지만 그들의 주 취침지는 안락한 건물 안이 아닌, 불편하기 짝이 없는 맨땅 위였다.

지금껏 광부 일만 해 온 터라 야영 준비에 서툴렀던 스녹도 이제는 제법 어엿하게 불을 피우고 야영지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며칠을 움직였을까.

“슬슬 다음 마을이 보일 거다.”

지크의 그 말이 얼마나 반가운지. 한스와 스녹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들이 알기로 다음 마을은 오스프린과 같은 영지에 속한 마을이다. 그만큼 목적지가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이게 사람이 사는 것인지 짐승이 사는 것인지 모를 생활이 끝난다는 생각에 스녹은 절로 힘이 났다.

“오스프린이라는 곳에 도착하면 당분간은 그 곳에서 지내겠죠, 선배?”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까지 들린 마을처럼 하루만 머물다가 출발하는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뛸 듯이 기뻐하리라고 생각했던 한스의 뉘앙스가 묘했다. 분명 말의 내용처럼 기뻐하는 것 같긴 한데 그 외의 다른, 조금 부정적인 감정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이 지긋지긋한 여정을 벗어나 문명의 혜택을 받으리란 생각에 자신처럼 앞뒤 안 가리고 기뻐할 거라 여긴 스녹이 그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무슨 일 있어요?”

“내가 지크 님이란 여행을 시작한 후에 말이야. 목적지에 들를 때마다 뭔가 사건이 터졌었거든.”

스울의 일도 그렇고 포르티의 일도 그렇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여행의 시작점인 스틸월 영지에서도 대놓고 사건을 일으키고 나오지 않았던가.

한스가 얘기해줘서 과거 여행 때 있던 일을 어설프게나마 알고 있는 스녹이 어색하게 웃었다.

“우연이겠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왜일까. 이번 목적지에서도 그다지 마음 편하게 있을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것은.

뒤에서 들리는 대화에는 별 관심없이 앞에서 길을 찾던 지크가 고개를 꺾어 앞에 나타난 깎아지른 절벽을 올려다봤다.

저번에 들른 마을에서 다음 마을까지의 대략적인 방향과 거리를 듣고 무작정 산으로 들어온 그들이다.

당연히 제대로 된 방향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할 노릇.

하지만 지크도 바보는 아니다.

그들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올라왔다. 고도가 상당히 높아 주변의 풍경은 거의 모두 보일 게 분명했다.

‘강도는….’

지크는 절벽에 손가락을 찔러넣었다.

콰직!

마력 가득 머금은 손가락이 진흙을 뚫는 것처럼 절벽 안으로 사라졌다.

‘충분하군.’

지크는 손가락을 절벽에 박아넣어가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지크가 하는 양을 바라보던 한스와 스녹이 서로를 쳐다봤다.

‘따라가야겠죠?’

‘당연하지.’

눈빛만으로 의견 교환을 나눈 후 살짝 한숨을 쉬고 둘은 지크의 뒤를 이어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스녹이 대지의 힘을 사용해 절벽에 조금 큼직한 구멍을 냈다. 그리고 그 구멍에 손과 발을 얹어 절벽을 올랐다. 한스도 스녹이 낸 구멍을 사용했다.

절벽의 높이는 대략 20m 쯤이었다. 지크는 무척이나 빠르게 절벽을 올랐다. 속도만 따지면 지면에서 걷는 것과 다를 바 없어보였다.

정상까지 올라온 지크가 손을 툭툭 쳐 흙먼지를 털어냈다.

그 곳에는 지크가 예상했던 것들이 전부 보였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푸른 수해와 검붉은 대지.

하지만 그와 함께 보이는 몇 줄기의 검은 연기는 예상 못한 것이었다.

“…저거 우리 목적지인 마을 아냐?”

“그런 것 같은데요? 그런데 왜 마을에 연기가….”

뒤이어 올라온 한스와 스녹이 당황한다.

아무래도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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