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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5화 (55/628)

제55화

“응?”

“착한 일 말이야.”

지크가 스녹의 곁으로 뚜벅뚜벅 걸어와 그의 어깨를 짚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노웸이 용서를 받는 것도, 그런 노웸을 받아들이는 것도 꺼려지는 거잖아. 그럼 대가를 만들면 돼. 자기가 납득할 만한 대가를 말이야.”

“그게 착한 일이란 거야?”

“물론. 보통 범죄를 저지른 놈이 종교에 회귀해서 자기 죄를 속죄한다고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뭐지? 남을 돕는 일이야. 착한 일을 하는 건 자기 자신을 용서하려 할 때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지. 그것만큼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는 일도 별로 없으니까.”

착한 일을 마치 도구처럼 취급하는 지크의 말에 잠깐 반감이 들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샘은 생각에 잠겼다.

“이런 건 얼마나 자신에게 설득력이 있는지가 중요해.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신이 먼저 납득을 해야 하니까.”

“그럼 스녹이 고아원을 돕는다거나 일손을 돕는다는, 그런 일을 하게 하잔 거야?”

“아니.”

지크의 단호한 부정에 샘이 눈을 깜박였다.

“죄를 지은 건 노웸이잖아. 당연히 노웸의 힘도 함께 써야지.”

노웸의 힘. 그 밤에 봤던 노웸의 모습을 떠올려 샘은 잠시 몸을 떨었다. 대지의 환수의 힘은 샘이 보기에도 정말로 어마어마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관심이 있는지 ‘착한 일’ 부분부터 지크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스녹이 물었다.

“넌 광부를 싫어했지? 나가서 모험을 하길 원했어.”

지크는 씩 웃었다.

“네가 원한 걸 해.”

“모험을 하라고요?”

예상치 못한 말에 스녹이 놀랐다. 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목적은 방금 말한 대로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야. 모험을 하면서 곤란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거지.”

“하지만 스녹이 하기엔 위험하잖아! 예전에 너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어?”

“물론 그땐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노웸이 있잖아.”

쿠우?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노웸이 얼굴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노웸의 힘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다면 뒷산 몬스터나 가도의 산적 따위는 별 위험도 안 될 거다. 날 따라와라. 네가 힘을 쓸 수 있게 도와주마.”

‘어쩔래?’라며 물어 오는 지크의 말에 스녹은 생각에 잠겼다.

나쁘지 않았다. 노웸의 힘을 사용해 착한 일을 해 나간다면 자신도 노웸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자신의 꿈인 세계를 여행한다는 목적까지 이룰 수 있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해?”

스녹이 노웸에게 의견을 물었다.

쿠우!

힘찬 대답. 그게 긍정의 표현이란 것은 노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면 세상을 돌자.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저 노래를 바꾸는 거야.》

노웸의 뇌리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오랜 세월을 넘어, 약속한 대상도 아니지만, 그녀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됐다.

노웸이 이 결정을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결정됐군.’

노웸까지 긍정하자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샘이 마뜩잖은 표정을 짓고 있긴 하지만 그도 결국 찬성할 수밖에 없으리라.

‘일단 이 안건은 이렇게 끝내면 되겠지. 그럼 다음은….’

지크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 암살자 놈들의 배후가 어떻게 나오는가인가.’

아마도 상당한 규모와 정보력을 갖고 있는 집단일 것이다.

스녹의 마력 특성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광산에 노웸이 풀려난 것도 알고 있었으며 그 둘을 드루를 통해 만나게 했다.

‘그것만이 아니지.’

아무리 둘의 궁합이 좋고, 노웸을 봉인하던 봉인석을 갖고 있었다 해도 인간과 환수를 강제로 융합시키는 방법은 시중에 일반적으로 돌아다니는 게 아니다.

‘그놈들의 시체를 뿌려 놓고 왔으니 뭔가 반응을 하면 좋고. 그 놈들의 시체를 통해 스울의 윗대가리들이 뭔가를 알아내도 좋고.’

하지만 지크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그 조직의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 * *

“다녀올게!”

스녹이 손을 흔든다. 그가 안고 있던 노웸도 귀엽게 ‘쿠!’ 같이 울었다.

스울의 성문에서도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가도. 드디어 이 도시를 떠나게 된 지크와 한스, 그리고 스녹을 샘이 마중나와 있었다.

지크는 이제 같이 여행하게 될 스녹을 쳐다봤다.

드디어 고대하던 여행을 떠난다는 게 기분 좋은 것인지 그는 마치 당장이라도 하늘을 날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역시 이제서 이 녀석이 대지의 폭군이 되진 않겠지. 내 개입으로 역사가 달라진 거야.’

대지의 폭군이 나타나지 않아 이 도시에 온 목적은 이룰 수 없었지만 지크는 만족했다.

‘이미 그 녀석이 나타날 만한 시기는 지났어. 내 덕에 대지의 폭군이 나오지 않아 피해를 막았으니 이건 분명 착한 일이야.’

그리고 설혹 녀석이 조금 늦게 대지의 폭군으로 각성하다고 해도, 이제 자신이 옆에 붙어 있을 테니 그때 쳐죽이면 된다. 스녹을 일행으로 받아들인 이유에는 그것도 있었다.

‘겸사겸사 짐꾼도 한 명 추가되고 말이지.’

“지크 말 잘 듣고. 들떠서 오두방정 떨다가 폐 끼치지 말고.”

샘이 스녹을 붙잡고 이것저것 주의를 주는 모습이 보인다.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서글펐다.

동생 같은 스녹이 세상으로 나가는 일에 옅은 아련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지크는 끼어들지 않았다. 저건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다. 이제 떠나는 지크가 뭐라 말 할 게 아니었다.

샘은 한동안 계속해서 잔소리를 퍼부었다. 혹시 뭐 두고 가는 건 없는지 물품도 샅샅이 살폈다.

앞으로 상당한 기간 동안 얼굴을 볼 수 없기에 최대한 샘의 잔소리를 들어주던 스녹도 결국 한계가 왔다. 스녹이 진저리를 친 후에야 샘의 잔소리 폭풍은 끝났다.

“그럼 우리는 슬슬 가마.”

지크가 작별인사를 했다.

“여러모로 고마웠다.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어.”

“쉽게 만날 수 없는 행운이긴 하지. 앞으론 조심하는 게 좋아. 나를 만나는 걸로 운을 몽땅 써서 앞으로 불행이 잔뜩 찾아올지도 몰라.”

“주의할게.”

이 자뻑질도 그리우리라. 샘은 지크의 손을 맞잡고 피식 웃었다.

“그럼 간다.”

그 말을 끝으로 지크는 한스와 스녹을 데리고 도시를 뒤로 했다.

샘은 한동안 떠나는 세 사람의 등을 쳐다봤다.

스녹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샘과 눈을 마주쳤고 그런 스녹 탓인지 한스도 몇 번 돌아봤다. 그러나 지크는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한스가 지크에게 뭐라고 말을 거는 게 보인다. 그가 여전히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걸 알리는 것일까.

하지만 지크에게 그다지 필요한 정보는 아닌 모양이었다. 지크가 한스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게 보였다.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는 샘도 움찔할 정도로 시원한 스윙이었다. 스녹이 움찔거렸고 한스가 뒤통수를 부여잡고 낑낑거렸다. 하지만 교훈은 확실히 새겨졌는지 한스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스녹도 그때부터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하여간 매정한 자식.’

저게 여행자의 이별 방식인 것일까. 샘은 손을 허리에 올리고 한숨을 한 번 쉰 후, 피식 웃었다.

‘돌아갈까.’

샘은 마지막으로 엉거주춤 걸어가고 있는 스녹의 등을 눈에 새겼다.

《지크를 동경하냐?》

얼마 전에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맞아. 내가 꿈에서 그리던 모습을 현실에 그려낸 듯한 사람이니까.》

자유롭고 강하다. 모험가는 아니라지만 여러 사건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은 스녹의 가슴을 뛰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앞으로 여행을 할 때 저 사람을 목표로 움직이려고 해.》

《무척 어려울 것 같은데.》

《그건 그래.》

아무리 경험을 쌓아도 지크처럼 되기는 힘들 것 같다. 하지만 스녹은 개의치 않았다.

《그래도 드디어 꿈을 이룰 토대가 만들어졌으니까. 노웸과 힘을 합치면 꿈 하나 정도는 더 지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노웸이 크게 울어 스녹의 말에 힘을 실어줬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난 더 할 말이 없어. 응원하마.》

더 이상 스녹의 꿈을 반대할 생각이 없는 샘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 말 한마디는 덧붙여야 했다.

《그래도 저 녀석의 태도는 배우지 말아 줘.》

《…저건 배우고 싶어도 못 배울걸?》

그때의 어리숙한 스녹의 얼굴을 떠올리며 샘은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전의 큰 사건이 마치 거짓말인 듯, 스울의 위로 펼쳐진 하늘은 무척이나 파랬다.

* * *

지크 일행은 가도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한스는 이번부터 새로 여행 동료가 된 스녹을 쳐다봤다.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지금부터 떠나는 여행에 잔뜩 기대를 하는 모습이다.

‘불쌍하게도.’

그 기대가 처참하게 부서질 날이 선명하게 보여, 한스는 속으로 애도의 감정을 표했다.

그렇게 스녹을 불쌍하게 쳐다보던 중 스녹의 어깨 위에 늘어져 흔들거리는 노웸이 보였다.

‘대지의 환수라고 했지?’

폭주한 스녹의 힘의 근원이라고 해도 좋을 환수. 당시 폭주한 스녹을 상대한 경험이 있는 한스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정말로 대단했지.’

아무리 샘이라는 짐이 딸려 있었더라도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존재.

하지만 지크는 그런 존재를 무척이나 쉽게 처리했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한스는 지크에 대해 다시 한번 감탄했던 걸 떠올렸다.

그리고 폭주 상태의 스녹을 망설이 없이 개패듯 패는 모습에는 그 더러운 성질머리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왜 그렇게 보냐?”

어느 순간 시선이 지크를 향해 있었다. 지크가 눈을 찌푸리자 한스가 화들짝 놀랐다.

“그, 그게….”

여기서 말을 끊는다면 더 곤경에 빠진다. 한스는 근래 늘어난 임기응변을 최대로 활용했다.

“조금 아쉽지 않습니까? 지크 님께서 하신 착한 일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게요.”

나이스! 자기가 말해 놓고도 제법 괜찮은 변명이었다.

지크가 착한 일에 상당한 집착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 이번에 하신 일은 도시를 지키는 일과 다를 바 없지 않았습니까? 만약 알려졌다면 스울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을 텐데요.”

예전 밸리드를 막아냈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긴 하지.’

질문을 던지긴 했지만, 한스는 이미 스스로 답을 내리고 있었다.

이번 일에는 스녹이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그를 지키기 위해선 사건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한스는 그런 대답을 예상했다.

그러나 지크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상관없다.”

“네?”

“칭송 같은 건 상관없다고.”

한스가 눈을 끔벅였다.

“그딴 걸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야. 칭송을 하든 선망을 하든 경멸을 하든 증오를 하든 나랑은 상관없어.”

“그, 그럼 뭐 때문에 착한 일을 하려 하십니까?”

계기는 회귀 전 용사 그렌 제너드의 말 한마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계기일 뿐. 지크가 타인의 칭송조차 상관없이 착한 일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내가 하고 싶어서.”

오직 그것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한스는 침묵했다.

지크의 모습이 마치 사람들의 이해나 이익을 바라지 않고 묵묵히 선의 길을 걸어가는 영웅처럼 보였다.

평소의 껄렁한 태도 때문에 그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착한 일이라는 ‘놀이’를 한다 여겼다. 하지만 의외로 자신은 지크를 잘못 보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을 하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다. 당장이라도 주먹이 날아올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나 궁금했다.

다행히 주먹은 날아오지 않았다.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가벼운 마음으로 하고 있다만?”

‘역시인가.’

역시 영웅놀이였다. 왜인지 모르지만 조금 실망한 기분이 들었다. 입을 삐죽였다.

“부럽네요. 힘이 있으니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도 위험한 일에 몸을 들이밀 수 있으니까요.”

말하고 흠칫했다. 요새 지크가 너무 풀어준 데다가 자신도 모르게 찾아온 실망감 때문에 말이 도를 지나쳤다.

이번에야말로 주먹이 날아올 것이다. 아니, 주먹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한스가 잔뜩 긴장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돌아온 건 폭력이 아닌 대화였다.

“별로 힘이 있어서 착한 일을 하는 게 아니야.”

한스가 지크를 쳐다봤다.

“솔직히 이런저런 일에 얼굴을 내밀고 있긴 하지만 나도 지금의 내가 최강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실제로 이번에 스녹을 노웸과 강제로 융합시킨 놈은 나보다 강하기도 했고.”

마왕인 시절이라면 스스럼없이 자신이 최강이라고 했겠지만 지금의 힘은 약하디약하다.

“힘 따위는 상관없다. 이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뿐이야. 설혹 그 끝이 죽음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하고 싶은 것. 그건 회귀 전부터 지크를 움직인 단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진중하지도 경박하지도 않은 담담한 말투.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지크의 말에 강한 설득력을 부여했다.

“…그렇습니까.”

한스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그건 무엇일까. 어렸을 적 어머니가 줬던, 어떤 용사님의 모험을 담은 책.

그 책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두근거림과 비슷하다고, 한스는 느꼈다.

조용히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스녹도 눈을 반짝였다.

역시 자신은 따라갈 상대를 제대로 골랐다. 가슴이 새삼 뛰는 것을 느끼며 스녹은 노웸을 꽉 껴안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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