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오래전 기억이다.
기억 속에서 가장 뚜렷하게 기억나는 건 한 명의 여성이었다. 봉인되기 전에 계약을 나눴던 최초이자 최후의 인물.
그러나 그녀는 그저 계약만 나눴던 존재가 아니었다.
태어난 후 처음 만난, 소중한 친구였다. 처음으로 만난 자신과 다른 존재로서, 그녀는 노웸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려줬다.
그러나 그들의 끝은 비참했다.
그저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고,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어 본능적으로 맺은 계약. 하지만 환수 특유의 특수한 마력은 일반인에게는 독과 마찬가지였다.
막대한 대지의 힘에 쩍쩍 갈라진 메마른 토양처럼 그녀는 죽어갔다. 게다가 마력의 반발 때문에 간간이 일어나는 폭주까지.
어느새 그녀는 인간들에게서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계약을 끊는 것도 불가능했다. 태초부터 정해진 절대적인 계약. 그건 둘 중 한 명이 죽어야만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노웸은 몇 번을 죽으려고 했다. 누군가 죽어야 끝난다면 당연히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막았다. 자신이 죽는다면 바로 따라 목숨을 끊을 거라며 위협했다.
둘은 길을 떠났다. 그리고 계약을 해제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온갖 고난과 시련을 헤쳐 다니기를 얼마. 그들은 드디어 방법을 찾아냈다.
그건 바로 봉인이었다. 그것도 서로 간에 묶여 있는 계약마저 끊어내는 강력한 봉인.
봉인은 필연적으로 헤어짐을 뜻했지만, 그 이상의 방법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 그녀의 시간이.
고목나무 같은 피부, 빛바랜 머리카락, 혼탁해진 눈동자. 처음 만났을 때의 싱그러움은 찾아 볼 수 없는, 하지만 미소만은 여전한 그녀가 자신을 쓰다듬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네.》
이미 그녀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는 이 봉인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노웸이 밀어붙였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자신이 없는 편안한 시간을 그녀가 누렸으면 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녀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넌 꼭 좋은 인연을 만날 거야.》
그녀가 말했다.
《나처럼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아닌, 너의 능력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꼭 나타날 거야.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 꼭 너의 행복을 찾아 줘.》
절절한 진심이 노웸의 마음을 두드렸다.
그녀는 노웸을 꼭 안았다. 부드러운 털과 앙증맞은 몸, 그리고 사람보다 조금은 더 높은 온기.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그 감촉을 몸 안에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것 같았다.
그 상태로 그녀는 잔잔히 노래를 불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세상에 퍼지고 있던 노래가 하나 있었다. 자신을 무서워하고 원망하는 뜻이 가득 들어찬 가사가 소리 높여 자신을 규탄하는 노래.
《나중에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면 세상을 돌자.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저 노래를 바꾸는 거야.》
그 노래를 듣고 그녀가 한 말이다.
하지만 그건 실패했다. 여전히 그녀와 노웸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긴 노래가 아니다. 노래는 금방 끝났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장난을 치려는 못된 악동처럼 말했다.
《비록 너에 대한 노래를 바꾸진 못했지만 네가 오로지 무서운 존재만이 아니라는 걸 알릴 거야. 너에 대한 공포가 노래가 되어 흩날리니까 나도 노래로서 알릴게.》
반쯤 쉰 목소리로 결의하는 맹세.
《만약 사람들이 믿지 못한다고 해도. 그래서 퍼지지 않는다고 해도. 반드시 계속해서 노력할게. 만약 내게 가정이 생겨서 아이들이 생긴다면 아이들에게라도 가르칠 거야. 그래서 설령 부르는 사람이 세상에 단 한명뿐이 없게 된다 해도, 너에 대해 공포가 아닌 사랑과 희망을 담은 노래가 울려 퍼지게 만들겠어!》
그리고 그녀의 노래가 다시 시작됐다. 자신의 공포가 가득 담긴 노래에 뒷붙인 노래.
자신의 감정과 희망을 담은, 꿈 같은 노래였다.
그 노래는 노웸의 감정 깊은 곳에, 그녀의 얼굴과 함께 묵직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노웸은 봉인됐다.
잠들었을 때는 계속해서 꿈을 꿨다. 이렇게 봉인되지 않고 계속해서 그녀와 평화로운 생활을 보냈으면 이랬을까 하는, 기쁘면서도 슬픈 꿈.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게 꿈, 오지 않은 미래인 것은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처럼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아닌, 너의 능력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꼭 나타날 거야.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 꼭 너의 행복을 찾아줘.]
그 말이 계속해서 메아리친 것은.
* * *
스녹을 바라보는 노웸의 눈에서 붉은빛이 점점 사라진다. 날카롭게 드러내던 이빨과 발톱이 들어갔고 연신 흘리던 울음소리도 멈췄다.
그저 하염없이, 하염없이 노래하는 스녹을 바라봤다.
오랜 세월이 지난 터라 부분부분 변형됐지만, 스녹이 부른 노래는 봉인 전 들었던 바로 그 노래였다.
전반부는 노웸이 한창 도망치던 때 사람들이 자신을 원망하고 두려워하며 부른 노래. 절대로 즐겁지 않고 익숙해지지 않는 그런 노래다.
그래서 폭주하는 와중에도 반응했다. 혼란한 와중에도 익숙한 증오가 들어찼다.
하지만 바로 뒤에 이어진 노래에 노웸은 증오의 증폭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기억과 똑같지는 않다. 가사도 멜로디도 변화되어 있다.
하지만 봉인 전, 그녀가 불러준 노래와 분명 비슷했다. 멜로디도 가사도, 그리고 자신을 향한 애정도.
《내가 약속했지?》
이미 오래 전 죽었음이 분명한 그녀가 자신을 향하며 말하는 것 같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장난을 성공시킨 아이처럼 무척이나 짓궂게.
하지만 그 웃음은 바로 부드러운 그것으로 변했다. 언제나 자신을 향하던 바로 그 웃음이었다.
《아이들을 통해서라도 전한다고 했잖아.》
몸 이곳저곳을 흐르던 광폭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광기에 물든 노웸의 눈에 천천히 상이 잡혔다. 스녹이 보였다.
봉인 후에 만난, 자신과 같은 기운을 가진 인간. 환상일까. 흐릿해지는 시선 속에서 그에게 그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 * *
날이 밝았다. 밤중에 일어난 그 치열한 전투가 마치 거짓말이라도 되는 양, 지저귀는 새 소리는 맑았고 뭉게구름 뜬 하늘은 파랬다.
하지만 차분하게 아침 일을 시작한 자연과는 달리 인간들은 시끌벅적했다.
밤새 일어난 지진과 광산에서 들려 온 정체 모를 굉음 때문이었다. 스울에 제대로 밤잠을 이룬 이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당장 조사대가 꾸려져 광산으로 투입됐다. 여러 관리와 전문가들, 그들을 보호할 병력이 북적대며 광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호기심 많고 담력이 센 자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물론 조사대가 광산 주변을 통제해 사건 현장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고 그 주변을 어슬렁대는 게 다였다.
광산은 잠시 폐쇄됐다.
아무리 광산업이 이 도시의 최대 산업이라고 해도, 광산 근처에 남은 엄청난 전투의 흔적을 보고도 광산 일을 강행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오래 봉쇄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시의 사정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도시는 조사에 엄청난 자원과 인력을 동원했다.
당연히 지크와 스녹이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안다면 무척이나 귀찮게 할 게 뻔했다. 노웸의 취급을 어떻게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도시의 안정을 위해 이 혼란을 일으킨 자로서 취급될 수도 있었다.
때문에 지크는 망설임없이 이 사건의 대응책을 정했다.
모른 척이었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어.”
현관이 열리며 샘과 한스가 돌아왔다. 심력을 상당히 소모했는지 둘은 조금 피곤해 보였지만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어땠어?”
“무조건 모른다고 잡아뗐어.”
샘이 말했다. 한스도 임무를 다했다는 듯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이거 정말 괜찮겠지?”
둘에게는 조사대에서 협력 요청이 들어와 있었다.
밤중에 광산을 살펴보러 나선 샘과 한스는 지크나 암살자들과는 다르게 문지기의 허락을 맡고 성문을 나섰던 터라 그 시간에 광산에 올라갔다는 증거가 남아버렸다.
당연히 조사대는 둘에게 주목했다. 사건의 목격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말이 요청이지 그 요청을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특히 그냥 도시를 도망치면 되는 한스와는 다르게 샘은 이 도시에 계속 살아야 한다. 때문에 그들은 조사에 순순히 협조했다.
하지만 이미 지크와 입을 다물자고 정한 샘이 진실을 말할 리 없었다.
“내가 가르쳐준 대로 했지?”
“그래. 올라가는 도중에 웬 굉음이 들려와서 광산 중턱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고 했어. 무서워서 덤불 안에 숨어서 굉음이 멈추길 기다렸다고도 했고.”
“그럼 됐어. 어차피 너희들에게 물어 본 건 혹시나 하는 희망 때문일 뿐이야. 한스는 몰라도 신분 확실한 일개 광부에게 무슨 용의를 씌우겠냐. 한스도 너를 호위한다는 명목이 있었고. 그리고 뒤처리도 확실히 해놨거든.”
전투 흔적을 아예 없던 것처럼 지우는 거면 몰라도 자신들이 특정되지 않게끔 조작을 하는 정도야 지크에겐 쉬운 일이었다. 회귀 전에도 밥먹듯 하던 일이다.
“그렇겠지?”
“이번 사건을 일으킨 놈들의 시체도 적당히 뿌려뒀고, 우연히 찾은 드루의 시체도 이용해서 잘 연출했으니까 걱정 마. 우리를 특정하진 못해.”
지크가 확실하게 못박아주자 샘은 안도했다. 하지만 완전히 안정을 찾지는 못했는지 의자 하나를 빼 앉고는 다리를 달달 떨었다.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하기 싫어.”
“익숙해지면 꽤 재미있는데?”
아마 지크에게도 조사대가 올 것이다. 드루의 시체를 사건 현장 바로 옆에 내팽개치고 왔으니 곧 그와 트러블이 있었던 지크, 스녹, 샘의 존재를 알아낼 터.
하지만 그래봤자 스녹과 샘은 일방적인 피해자인데다가 평범한 광부. 그나마 조사대가 의심스럽게 볼 만한 인물은 지크뿐이었다.
물론 지크는 조사대의 신문 정도야 웃으며 회피할 자신이 있었다.
“나랑 너를 똑같이 보지 마. 나는 그냥 평범하게 광석이나 파면서 평온하게 살 거야.”
“소시민 녀석.”
“내가 원하는 완벽한 인생이 그거다.”
그렇게 쓰잘데기 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샘의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제법 잘 웃고 잘 말하며 떨던 다리도 멎었다.
샘이 진정되자 지크는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자, 그럼 이제 저 녀석들에 관해 말해보자고.”
지크가 바라본 곳에는 노웸을 꼭 안고 구부정하게 앉아 있는 스녹이 있었다.
노웸의 눈이 뒹굴뒹굴 주변의 분위기를 살핀다. 환수 특유의 민감한 본능이 주변의 분위기를 잡아챘고 높은 지능은 이 상황이 자신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거라는 걸 짐작케 했다.
쿠우.
낮은 목소리로 울며 자신을 안고 있는 스녹을 올려다본다. 어떤 굳은 다짐이라도 했는지 단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스녹의 얼굴이 보였다.
“일단 노웸이 더 이상 폭주하지는 않을 것 같고. 남은 건 너희 사이의 응어리와 노웸의 처우 정도군.”
“난 분명 예전에 말했어. 용서한다고.”
지크의 정리에 샘이 망설임 없이 말했다. 이미 마음의 정리도 완벽하게 끝냈는지 어투에 작은 흔들림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네 그 완고함은 나도 감탄할 만한 거지만 문제는 저 녀석들의 감정이지.”
지크의 말대로 스녹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죄책감과 미안함이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하얀 천으로 닦아낸다면 그대로 묻어날 것 같았다.
“샘이 그렇게 말해준 건 정말로 고마워. 하지만 노웸이 우리 둘의 아버지들을 돌아가시게 만든 건 사실이니까. 그런 말로만 넘어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스녹의 말은 쥐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조그마했다. 그러나 그 말뜻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샘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용서한다는 마음에 아무런 후회도 없지만 스녹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미묘한 감정은 무척이나 어려운 문제였다.
그때 지크가 끼어들었다.
“그럼 착한 일을 해보는 건 어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