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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3화 (53/628)

제53화

“…그러고 보니 나는 지진이 광산에 무슨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알아보려고 올라온 거지.”

워낙에 굉장하고 위험한 상황에 휘말려 버려 깜빡 잊고 있었다.

“이번 지진도 그 환수가 관련되어 있을까?”

“맞아. 정확히는 웬 골때리는 놈이 광산 안에서 스녹과 환수를 강제로 융합시킨 여파야.”

“…그 골때리는 놈이 스녹을 이 꼴로 만든 거지? 어떤 놈이야?”

“몰라. 어떤 특정한 조직에 속한 놈인 건 확실한데, 입을 열지 않을 놈이라 그냥 죽였거든.”

정말로 그 정체에 관해선 짐작가는 바가 없다. 회귀 전의 기억을 뒤져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괜찮아.”

지크가 웃었다.

“이미 나랑 적대한 이상, 다음에 내 앞에 나타나는 족족 그 조직 놈들을 족쳐버릴 생각이니까.”

“…….”

“나쁜 놈들인 것 같으니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어서 기뻐.”

스녹을 끌어들인 그 정체불명의 인간과 조직에 무척 화가 나긴 하지만, 지크의 살벌한 웃음에 샘은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샘에겐 다행히도 지크의 그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런데 광산이야 날이 밝았을 때 확인해도 되잖아. 뭐 하러 이런 위험한 시간에 올라와? 그러니까 이런 위험한 일에 휘말리지.”

지크가 눈을 반쯤 뜨고 타박한다. 그러나 샘은 차라리 아까의, 섬뜩한 웃음을 짓던 지크보다 자신을 타박하더라도 지금의 지크가 더 편했다.

“그러게 말이다.”

후회하는 듯한 어조. 본인도 어리석은 생각이란 걸 알긴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올라올 수밖에 없던 심리도 어렴풋이 느껴졌다.

‘아버지 때문이겠지.’

지진으로 인한 광산 붕괴 때문에 죽은 샘의 아버지. 해가 떨어져 광산에 사람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광산이 붕괴돼 매몰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물론 확률은 극히 낮지만, 사람의 불안감은 그런 확률론으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래도 한스 씨 덕에 안전했어.”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왜 여기 있는 거야?”

주제가 자신으로 옮겨오자 한스가 눈을 깜박였다.

“내가 광산으로 가려는데 호위를 해주겠다 하시더군.”

“지크 님을 기다리는데 창문 밖에 샘 씨가 지나가시더군요. 밤늦게 광산에 가야 하신다기에…. 지크 님의 친구분이기도 해서 호위를 해드렸습니다.”

역시 전 하인인지라 이런 눈치는 빠른 것일까. 만약 한스가 없었다면 샘은 어두운 산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것도 동생처럼 여긴 사람에게 죽는다는 끔찍한 최후를.

“잘했다.”

지크가 한스의 공을 치하했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 칭찬이다. 평소에 욕설과 잔소리를 달고 사는 지크에게 들은 터라 한스는 더더욱 기분이 좋았다. 히죽거리는 뺨을 억눌렀다.

“그런데 너도 참 대단하다. 설마 거기서 용서한다는 말을 꺼낼 줄은 몰랐어.”

트라우마가 되어 늦은 시간에 광산을 확인하려 할 정도로 아버지의 죽음에 얽매여 있는 샘이다. 그런 샘이 한 용서를, 지크는 여전히 놀라워했다.

“그렇게 의외였어? 말을 들어보면 그 환수가 일부러 지진을 일으킨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환수를 원망할 거다.”

인간은 이성보다 감성으로 움직이는 일이 많다. 특히 부모의 죽음 같은 민감한 일에는 더더욱.

“환수가 일부러 그런 거였다면 나도 절대로 용서하지 못했어. 하지만 그게 아니잖아. 스녹도 일부러 아버지를 죽인 녀석을 감쌀 정도로 썩어빠진 놈도 아니고. 그리고 운명을 느끼기도 했으니까.”

“운명이라….”

아까 샘이 뜬금없이 한 말을 상기했다.

“대체 그 운명이 뭐야? 분명 무슨 노래를 언급하며 말했었지?”

“너도 아는 노래일 거야. 이루스 광산에 봉인된 괴물에 대한 노래. 스울에 엄청 퍼져 있으니까.”

“아, 그건 알지.”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건 광산의 괴물을 두려워하는 노래 아니었던가? 거기에 운명 운운이 들어갈 곳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사실 그거 버전이 하나 더 있어.”

샘이 손가락 하나를 피며 말했다.

“스녹의 부모님이 부르던 버전인데, 스녹의 집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거라고 하더군. 알려진 노래 뒤에 몇 구절 더 내용이 붙어 있어. 나와 스녹은 도시에 퍼진 노래보다 그 노래를 더 좋아했지.”

샘도 내킬 때마다 흥얼거리고 다녔고, 스녹은 한 술 더 떠 슬프거나 마음 아픈 일이 있으면 그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달랬다.

“두 가지 중 어느 게 원본인지는 몰라. 하지만 만약 스녹의 집에 전해지는 게 원본이고, 스녹의 조상 중 누군가가 어떤 목적을 이유로 그 노래를 물려줬으며, 그 환수가 노래에 나오는 그대로의 존재라면 말이야. 둘의 만남에 운명이라는 단어를 붙여줘도 이상하지 않다고 봐.”

“어떤 노랜데?”

이렇게까지 얘기를 듣자 지크도 호기심이 솟아올랐다.

“불러볼까?”

샘이 호흡을 크게 들이켜고 노래를 불렀다.

어두운 하늘, 전투의 여파로 엉망이 된 산중턱에 샘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졌다.

* * *

스녹은 눈을 떴다. 보이는 건 황량한 대지. 방금 전까지 있던 산중턱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진짜 되는구나.’

스녹은 주변을 신기하게 둘러봤다.

지크의 말에 따르면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노웸의 심상 안이었다.

원래 아무리 궁합이 좋다고 해도 서로의 심상으로 들어가는 건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한다.

하지만 지금 스녹과 노웸은 강제적으로 융합된 상태다. 그 특수한 상황이 난이도를 크게 내렸다.

스녹이 지크의 조언대로 눈을 감고 노웸의 심상에 접근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품자마자 바로 노웸의 심상 안으로 잠겨들 수 있을 정도로.

‘노웸은 어디 있지?’

누가 대지의 환수의 심상 아니랄까 봐 주변은 온통 땅밖에 없었다. 발치부터 저 지평선 끝까지 오로지 광대한 대지만이 펼쳐져 있다.

그 흔한 잡초도, 실자락 같은 개울도, 생명력 높은 벌레들도,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압도적인 넓이에 기가 죽을 것 같다.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나 스녹은 쉽게 발걸음을 뗐다.

‘여기 같아.’

마음이 웅성거리며 길을 가르쳐 준다. 그의 발걸음에 주저함은 없었다.

스녹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으로 올라갔다. 완만한 경사면으로 동굴 하나가 보였다. 스녹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빛이 차단된 동굴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동굴 안을 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동굴을 돌아다니던 스녹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우리 광산 아냐?’

구조나 지지대, 벽에 남은 파낸 흔적 등이 똑같았다. 스녹의 발걸음이 한층 더 가벼워졌다.

계속해서 동굴을 나아가던 스녹이 한 갱도 앞에서 멈췄다. 잠시 그 갱도를 쳐다봤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갱도였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스녹이 갱도 안으로 진입했다.

낙반이 가득 쌓여 막혀 있어야 하는 통로가 깨끗했다. 그 지점도 넘어 스녹은 계속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갱도의 끝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앞에, 스녹이 찾던 존재가 있었다.

“노웸.”

엎드려 있던 노웸이 눈을 떴다. 스녹을 확인하고, 이를 드러냈다. 붉어진 눈이 노웸이 폭주의 영향 하에 있다는 걸 알리고 있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고 지크가 말했었지만, 막상 눈앞에 현실로 드러나자 마음이 미어졌다.

“…노웸.”

다시 한번 불러 봤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스스럼없이 불렀던 이름이건만 마치 오랜 세월 부르지 못한 것 같았다.

크으으으!

노웸이 울었다. 얼마 전까지 스녹을 향해 냈던 반가운 울음소리가 아니다.

스녹에게는 무척이나 낯선, 적의가 어우러진 울음소리.

하지만 스녹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저기 말이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단단히 잠긴 문을 억지로 비틀어 열듯이. 커다란 산맥에 막힌 물줄기를 억지로 트려는 듯이.

“미안해.”

가장 먼저 말하는 건 사과다. 그것밖에 없었다.

“너를 버리려 한 것. 너를 외면한 것. 전부 미안해.”

한 번 말문이 트이자 다음 말은 조금 더 쉽게 나왔다.

“네가 원망스러웠어. 화가 났어. 우리 아버지를, 샘의 아버지를 죽게 만든 게 너였다는 사실에 마음이 혼란스러웠어. 그리고 죄책감이 들었어. 너와 계속 지낸다면 아버지에게, 샘의 아버지에게, 그리고 샘에게 죄를 짓는다고 느꼈어. 샘은 내 형 같은, 가족 같은 사람이거든.”

스녹이 노웸을 직시했다.

“너처럼.”

노웸은 여전히 스녹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의 말이 닿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실망할 시간은 없다.

“하지만 말이지. 너를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더라. 들은 것처럼 내 마력 특색이 너와 잘 맞아서 그런 것뿐일까?”

이 급격한 애정의 원인이 같이 쌓아 온 세월과 신뢰가 아니라는 것에 조금 찝찝하긴 했다. 그러나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세뇌를 당한 것도 아니다.

“그래도 널 받아들일 수는 없었어. 아무리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하지만 네가 일으킨 지진 때문에 우리 아버지와 샘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사실이니까. 그런데 샘이 너를 용서한다고 해.”

‘형’의 소중한 용서다. 그랬기에 스녹은 한층 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아무것도 모를 때처럼 행동할 순 없겠지. 그러니까 노웸. 우리 같이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보자.”

그건 한 번 노웸을 거절한 스녹이 굳건한 결의와 함께 내민 손이었다.

노웸의 시선이 뻗어진 손을 향했다. 혹시나 스녹의 바람에 반응할까? 스녹의 손에 땀이 어렸다.

크으으!

그러나 스녹의 기대는 붕괴됐다.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노웸이 정신을 차릴 기미는 없었다.

역시 로브의 사내가 사실을 알리며 압박했을 때, 서글펐던 노웸의 눈길을 뿌리치고 외면했기 때문일까.

스녹의 마음에 비탄이 엄습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금 가라앉혔다. 아직 기회가 사라진 게 아니다.

‘샘은 나와 노웸의 만남이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했어.’

근거로 든 것은 어렸을 때부터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불러줬던 그 노래.

성대가 울리며 목소리가 흐른다. 규칙적인 박자와 변화하는 음이 하나의 노래를 만들었다.

전문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에 비할 바는 못 됐다. 음정도 툭툭 튀어나가고 박자도 미묘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꽤 안정적이어서, 평소에도 스녹이 이 노래를 많이 불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옛날 대지의 존재가 노해 대지가 물결치니, 여지껏 본 적 없는 재앙이노라. 사람들은 그 앞에 두려워하니, 그것이야 말로 공포의 다른 이름이로다.”

누가 봐도 대지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노래다.

스울의 사람 모두 이 노래는 아이들이 광산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뿌린 노래라고 알고 있다. 당연히 그 가사가 고울 리 없었다.

노웸의 눈이 험악해졌다.

노웸에게서 반응을 이끌어 내긴 했지만, 기뻐할 상황은 아니었다. 절대로 좋은 쪽으로 반응을 하는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스녹의 노래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지의 존재는 친우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를 봉인하니.”

그것은 스울에는 전해지지 않는 구절. 공포의 대상인 ‘광산의 괴물’의 다른 면을 알려주는 노래.

“오늘도 그 존재는 슬픔을 머금은 채 내일의 희망을 기다리며 잠을 자노라.”

한숨 쉬듯, 스녹은 마지막 가사를 내뱉었다.

“친우가 말한 미래가, 행복이 결국은 찾아올 것이라 믿으며.”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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