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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2화 (52/628)

제52화

‘역시 이렇게 되나.’

대지의 환수의 권능을 그렇게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정도로 마력의 특성이 대지 쪽에 치우쳐 있다면, 분명 서로에게 본능적인 친근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스녹은 극렬하게 거부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정말 지독하게 심리를 흔들어놓은 모양이었다.

일단 설득을 해보기로 했다.

“당신을 납치한 사내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모두 당신을 폭주시키기 위한 음모입니다. 당신을 농락한 드루조차도 그가 고용했을 확률이 커요.”

드루의 이름이 나오자 스녹이 반응했다. 좋은 현상일까. 지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마도 당신과 환수 사이를 이간질을 한 모양인데, 놈이 한 말은 모두 흘려버리는 게 좋습니다. 환수와 정식 계약을 하는 건 당신에게도 나쁠 건 없….”

“싫어요!”

“…….”

예상 이상으로 철벽이다. 지크는 오랜만에 난감함을 느꼈다.

스녹이 고집을 부리자 이번엔 샘이 나섰다.

“무슨 소리야! 감정만으로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잖아! 일단 네 안전을 먼저 생각해야지!”

지크도 원호했다.

“당신이 정신을 차린 건 내가 ‘폭주하는 당신’의 의식을 날려버렸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폭주 상태의 당신이 기절했으니까 당신이란 본의식이 부상한 거예요. 폭주 의식이 깨어난다면 당신은 다시 의식을 잃을 겁니다.”

“저 봐! 지금 네가 안전해진 게 아니라잖아!”

“…….”

스녹의 안색이 파리해진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하지만 입만 달싹일 뿐, 스녹은 여전히 계약에 부정적인 모습이었다.

‘뭔가 있는 건가?’

그냥 이간질에 넘어갔다기엔 스녹의 행동이 이상했다.

샘의 다그침에도 계속되는 묵묵부답. 그만큼 계약에 대한 거부감이 큰 것일까.

‘아니, 저건 어찌할 줄 모르는 태도에 더 가까운데.’

지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 생각을 했다.

‘태도만 보면 무슨 부모의 원수를 거부하는 것 같은…!’

순간 지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노웸이라는 환수가 정말 전설에 나오는 광산의 괴물이라면 녀석은 이루스 광산에 봉인되어 있었을 거야. 그리고 어떤 계기로 인해 봉인이 풀려 나온 거겠지.’

그게 어떤 계기였는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건 계기가 아니다. 봉인이 풀렸을 때 일어났을 현상이었다.

‘대지의 환수인 만큼 아마 봉인 안에 대지의 기운이 많이 축적되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봉인이 깨졌을 때 한꺼번에 풀려났을 거고.’

그리고 그건 아마도 지진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을 것이다.

‘지진이 위험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냐만, 광산은 특히 더 그렇지. 갱도가 붕괴될 수도 있으니까.’

지크는 예전 샘과 술집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술에 잔뜩 취한 샘은 지크를 붙잡고 스녹에 대해 한탄을 했다. 그때 지크는 왜 스녹이 광산 일을 지독히도 싫어하게 됐는지 알게 됐다.

‘지진으로 갱도가 붕괴 돼 스녹의 아버지가 죽었다고 했지.’

만약 그 지진이 일어난 원인이 환수의 봉인이 풀렸기 때문이라면? 그 사실을 가지고 로브의 사내가 스녹의 심리를 뒤흔든 것이라면?

어떤 이유와 인과가 있든 아버지를 죽게 만든 존재.

‘만약 그렇다면 저렇게 발작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이해가 돼.’

그리고 스녹을 설득하는 것에 무척이나 애로사항이 꽃필 것이라는 사실도 더불어 알 수 있었다.

“음….”

지크가 소리를 내자 스녹과 샘의 시선이 지크에게 쏠렸다.

일단 사실 파악을 위해 지크는 자신의 가설을 묻기 시작했다.

“혹시 당신을 납치한 사내가 이렇게 말했나요? 당신의 아버지를 죽인 지진을 일으킨 존재가 그 대지의 환수라고요.”

“!!!”

스녹의 눈이 흔들렸다. 당황한 얼굴이 정답의 종을 댕댕 울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원수라면 일이 복잡해지는데.’

혹 스녹과 가족같이 지낸 샘이라면 뭔가 해결의 실마리라도 같고 있지 않을까. 지크는 샘을 쳐다봤다.

그리고 무섭도록 굳은 그의 얼굴을 보고 일이 한층 더 복잡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뇌리에 예전 술자리에서 샘이 했던 다른 말도 떠올랐다.

‘샘의 아버지도 스녹의 아버지가 죽은 갱도 붕괴 때 같이 죽었다고 했지.’

아버지를 죽게 만든 것뿐만 아니라 형제처럼 자란 사람의 아버지조차 죽게 만든 원인. 그게 바로 노웸이란 이름의 대지의 환수였던 것이다.

그 정도라면 스녹이 강하게 거부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문득 로브의 사내가 한 말이 생각났다.

‘스녹 녀석은 절대로 노웸을 받아들이지 못할 거다. 녀석이 고비 하나를 넘는다 해도, 다른 고비 하나가 또 남아 있으니까. 그건 우리가 계획을 짜기 전부터 정해진 운명이야.’

‘이걸 얘기한 거군.’

스녹이 설혹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만든 걸 용서한다고 해도, 샘이란 피해자가 한 명 더 있다. 그리고 샘은 스녹의 유일한 가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

정말로 더럽게 꼬였다.

‘할 수 없나.’

웬만하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스녹과 대지의 환수를 계약시키려 했지만, 사정이 이렇다면 강요할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둘 수도 없다. 시간이 지나면 스녹은 다시 폭주할 테니까.

지크는 들고 있는 검의 손잡이를 살짝 쓸어내렸다.

‘가능할까.’

지크는 마력의 양과 운용을 한 번 점검했다.

‘아슬아슬하려나?’

본질을 꿰뚫는 검. 지크의 기술 중에서도 극상에 랭크되는 기술이다. 그 녀석을 사용한다면 노웸만을 처리할 수 있긴 하다.

‘문제는 불완전하게 쓰면 스녹도 죽어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크다. 하지만 저렇게 완고하다면 이런 선택지도 있다는 걸 가르쳐줘도 되리라.

“당신이 위험하다고 해도 노웸만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하시겠습니까?”

“네?”

스녹이 당황하며 어버버거렸다. 역시 자신이 위험에 빠지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일까. 지크가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이제 됐어.”

샘이 한 걸음 나섰다. 기분 탓일까. 그의 얼굴에 묘한 결심이 어린 것 같았다.

그는 스녹의 머리를 고정시키듯 그의 볼을 꽉 눌렀다. 당황한 스녹의 눈이 뒤룩뒤룩 굴러갔다.

“스녹.”

“으, 응?”

“내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 줘.”

“어, 응.”

“너, 그 대지의 환수에게 정을 느끼고 있지?”

스녹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정곡을 찔린 것 같다.

“무, 무슨 소리야! 우리 아버지와 샘의 아버지를 죽인 그놈을 내가 왜…!”

“거짓말하지 말고. 네 어설픈 거짓말 정도는 얼마든지 알 수 있으니까. 그 녀석을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어서 더욱 발악하는 걸로밖에 안 보여.”

“그, 그런 일….”

스녹의 목소리가 작아지다 결국 말을 끝맺지 못했다.

“혹시 그 녀석이 우리 부모님을 일부러 죽였냐?”

“그건 아냐!”

스녹이 화들짝 놀라 부정했다. 그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꿈속에서 녀석의 기억을 잠깐 봤어! 그 녀석은 봉인이 풀려서 나온 것뿐이야!”

급하게 노웸을 옹호하던 스녹이 자신의 행동에 또 한 번 놀란다. 불안정한 스녹의 심리상태가 그대로 보였다.

“그럴 거라 생각했어. 그렇지 않다면 너도 딱 잘라 녀석을 거부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노웸은 우리 아버지들을 죽였어.”

그리고 둘의 어머니들 또한 아이들을 키우다 똑같이 과로로 죽었다.

노웸의 존재가 그들의 단란한 가정을 파괴한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샘은 스녹을 쳐다봤다. 머리가 큰 이후로 말은 죽어라 안 듣고 사고도 제법 치고 다닌 녀석이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가슴 펴 말할 수 있는 녀석이다.

‘형’으로서 혼란스러워하는 스녹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샘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웅성대는 마음을 다스리고 혹시 이 결심을 후회하지 않는지 되물었다. 마음의 소리는 이 결정을 찬성했다.

그는 갈등하고 있는 스녹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살짝 미소를 지었다. 반 쯤 울상을 짓고 있는 스녹에게 그 말을 전했다.

“용서할게.”

“…응?”

“노웸을 용서할게.”

잔잔한 음성이 사람들의 귀로 파고드다. 스녹은 물론이고 지크와 한스조차 놀랐다. 샘의 말은 그 정도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그 환수가 소중하지? 마치 가족같이 느낄 정도로.”

그 정도가 아니라면 스녹이 이렇게 괴로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용서할게. 그러니 나에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 오로지 네 감정만으로 정해. 그 아이를 받아들일지, 부정할지 말이야.”

“…어째서 그럴 수 있는 거야? 어째서 그렇게 용서란 단어를 쉽게 입에 담을 수 있어? 노웸은 우리 아버지를, 샘의 아버지를 죽인 녀석인데.”

“쉽게 담은 거 아니야. 많은 생각과 각오 위에서 정한 거지. 네가 말했잖아. 그 아이가 의도한 게 아니라고.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노래를 생각해 봐.”

좋아하는 노래. 광산에 봉인되어 있다는 괴물-아마도 노웸-을 주인공 삼은 노래다.

“그 아이가 노래의 주인공이 맞다면 분명 괜찮은 녀석일 거야. 게다가 그 노래는 너희 집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잖아. 어쩌면 운명이 너와 그 녀석을 이어주고 있는지도 몰라.”

“…….”

운명까지 들먹이는 샘을 스녹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멍청하게 샘의 얼굴을 쳐다봤다.

뭔가 더 말하려던 샘이 입을 다물었다. 스녹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구차한 말들이 아닌 진심이 필요하다고 깨달은 것이다.

“일단 지금 내가 말한 것들은 핑계가 아니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대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

그러곤 샘은 한 점의 미혹도 없이 말했다.

“소중한 동생이 행복하길 바라는 게 이상한 거냐?”

“!!!”

그건 분명 가족을 위한 사랑이었다. 거대한 망치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사람처럼 스녹은 충격을 받았다.

샘의 올곧은 눈이 방금 그 발언의 진실성을 알렸다.

“정말로….”

‘형’의 조언이 통한 것일까. 스녹이 조심조심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노웸을 용서해도 될까? 녀석을 받아들여도 될까?”

“말했지? 나는 그 아이를 용서한다고. 이젠 네 마음에 달렸어. 어떤 선택을 해야 네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지. 어떤 게 네 행복으로 이어질지 잘 선택해.”

“노웸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화가 났어. 분노가 치밀었어. 그렇지만 샘. 그 녀석이 싫어지지가 않아.”

그래서 더욱 녀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돌아가신 두 분에게도 그리고 샘에게도 면목이 서질 않았다.

“그럼 일단 계약을 맺는 게 어떻습니까?”

상황을 조용히 주시하고 있던 지크가 끼어들었다.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폭주를 가라앉히세요. 그리고 그 환수와 대면한 이후 정하세요. 지금처럼 당장의 감정만으로 움직이면 나중에 후회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스녹 같은 미숙한 사람은 더욱 그랬다.

“어떻게 할래?”

샘이 다시 물었다. 스녹의 눈에 결심의 빛이 어렸다.

* * *

“괜찮겠지?”

마치 죽은 듯이 누워있는 스녹을 보며 샘이 불안해했다.

스녹이 노웸과 마주보기 위해 침잠한 지 고작 몇 분. 하지만 샘은 벌써 안달을 냈다. 아까 차분하게 스녹을 설득하던 모습과는 대비되는 모습에 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지크는 납득할 수 있었다.

‘그게 인간이지.’

자신의 원망조차 내던지고 상대를 위해 따뜻한 말을 건네는 대범하게 행동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고작 몇 분의 기다림에도 침착하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 하고 소심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행동 원리는 같았다.

‘가족에 대한 사랑인가.’

종교인으로서 불특정 다수에게 널리 사랑을 베푸는 루벨라와는 다르다.

그저 한 개인으로서, 가족을 소중히 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사랑.

하지만 샘의 그것이 루벨라의 그것보다 떨어진다고 누가 주장할 수 있을까.

지크 자신은 겪어보지 못했고 이해도 잘 가지 않는다. 그냥 그런 게 있다 정도만 이해하는 수준이다.

‘그래도 좋은 광경인 건 알겠어.’

“너는 여기 어쩐 일로 온 거냐?”

궁금한 것도 해결하고, 스녹에 대한 걱정으로 당장이라도 뒷목잡고 드러누울 것 같은 샘의 의식을 돌리기도 하려 지크가 입을 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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