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칭찬 고마워. 그 답례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저승길 선물로 하나 알려주마.”
지크가 한쪽 무릎을 굽혀 사내와 시선을 마주쳤다.
“나는 이래봬도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들은 나쁜 놈들이거든? 거기에 나와도 적대를 해버렸네?”
자신과 적대적인 나쁜 놈들. 회귀 후 착하게 살려는 지크에게 있어, 그것들은 반드시 쳐죽여야 할 놈들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네놈들의 조직을 찾아보려고 해. 그래서 걸리는 족족 네 곁으로 보내줄게. 어때, 지옥에서 외로움 탈 일은 없을 테니 좋지 않아?”
“사후 서비스 한 번 확실하군. 헌데 네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우리 조직과 적대한다면 네놈이 내 곁으로 오는 게 더 빠를 거다.”
“내기를 못 하는 게 아쉽네. 전 세계를 걸라고 해도 걸 수 있는데 말야.”
“네가 네 말을 부디 착실히 지키길 비마. 그래야 조직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기억해둘게. 그럼 슬슬 작별하자고. 나는 얼른 스녹에게 가봐야 하니까. 막든 구하든 달려가는 시간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구해? 그놈을?”
사내가 킬킬댔다.
“녀석을 구하는 건 불가능해. 아, 네가 뭘 생각하는지는 알 것 같군. 내가 심리적으로 뒤흔들었으니 그걸 해결하면 놈이 노웸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하지만 스녹 녀석은 절대로 노웸을 받아들이지 못할 거다. 녀석이 고비 하나를 넘는다 해도, 다른 고비 하나가 또 남아 있으니까. 그건 우리가 계획을 짜기 전부터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 그거 좋지. 내가 깨부수기 정말 좋아하는 단어야.”
“어디 한 번 해 봐라.”
“어디 한 번 해 보마.”
그 말을 마치고 지크는 검을 휘둘렀다. 검은 똑바로 사내의 목을 향했다.
서걱!
사내의 목이 높이 떴다가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끝까지 빈정거리기 위함일까. 지크의 발치까지 굴러온 사내의 머리가 마치 지크를 올려다보듯 멈췄다.
멈춰버린 얼굴 근육이 빙긋 웃고 있었다. 죽어서까지도 비웃겠다는, 사내의 섬뜩한 의지가 그대로 느껴졌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트라우마가 남고, 어느 정도 담대한 자라도 못내 찝찝해 할 만한 그런 의지.
그러나 지크는 덤덤했다. 그가 겪어온 경험들에 비하면 저런 건 저주 축에도 끼지 못했다.
퍽!
공을 차듯 가볍게 사내의 머리를 걷어찼다. 그걸로 전투는 완전히 끝났다.
‘그럼 이제 스녹을 찾아볼까.’
지크가 기감을 넓혔다. 변신한 사내는 지크보다 훨씬 상위의 실력을 가진 상대였기에 평소처럼 기감을 넓게 펼쳐두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모든 신경을 사내에게 집중해 전투의 날을 세웠다.
때문에 지크는 이번 전투 동안 평소처럼 주변의 기척을 훑어볼 수 없었다.
‘응?’
원상회복된 기감에 기척이 잡혔다. 낯익으면서도 낯설다는 부조리한 기척.
스녹이다. 대지의 기운을 줄줄이 뿌리고 있는 걸 보니 틀림없다.
문제는 스녹과 같이 느껴지는 두 개의 기척이었다.
‘이놈들은 왜 또 여기 있어?’
잘 들어보니 저 멀리서 아스라이 전투 소리도 들려온다. 지크는 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달밤에 인적 하나 없는 산 속으로 뜬금없이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는 사실도, 그게 아는 사람이었다는 사실도 지금 한스의 안에서는 별 의미를 갖지 못했다. 분명 무척이나 괴상한 현실임에도.
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한스는 지금 어떤 현상에 대해 이상하다, 이상하지 않다를 느긋이 판단하고 있을 정도로 여유를 갖지 못했다.
콰앙!
바윗덩이가 날아온다. 사람보다 1.5배 정도는 더 크다.
정통으로 맞을시 인간이 어떤 꼴로 변할지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한스는 입술을 깨물고 검을 치켜세웠다.
“하앗!”
짧은 기합과 함께 바윗덩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손아귀가 좀 얼얼하긴 했지만 그래도 성공적으로 바위를 자를 수 있었다.
두 동강난 바위가 한스의 양 옆을 스쳐 지나갔다.
쿠웅! 쿠웅!
뒤에서 살 떨리는 충돌음이 들린다. 그러나 그 소리에 신경 쓸 새도 없이 한스는 다음 공격을 방어해야 했다.
퍼엉!
이번엔 커다란 석순이다. 대지에서 솟구친 날카로운 석순들이 적들이 내리꽂는 창대처럼 밀려들었다.
‘칫!’
심장이 쿵쿵댔다. 하지만 한스는 필사적으로 감정을 추스르며 몰아치는 석순들을 베어냈다.
그 어떤 상황에 직면한다 해도 당황하지 말 것. 지크가 훈련이라는 명목 하에 한스를 온갖 고난과 역경으로 내몰면서 하던 말이었다.
훈련 상황에서는 정말로 죽을 것 같았고 지크에 대한 원망도 들끓었지만, 막상 그 훈련 덕에 한스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한스의 실력을 100% 가까이 뽑아낼 수 있는 자양분이 됐다.
‘쳇! 이젠 속으로 욕도 못 하겠네.’
이렇게 훈련의 효과를 실감했으니 앞으로 훈련에 대한 불평불만을 가지긴 어려우리라.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몸은 착실하게 움직였다. 얼마 전까지 검술은커녕 몸을 움직이는 것과도 무관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한스의 몸놀림은 유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유리한 건 아니었다.
지크의 고된 훈련과 한스의 타고난 재능 덕에 공격을 막아내곤 있지만, 스녹도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공격은 단순하고 투박했지만 그가 타고난 방대한 마력과 노웸의 마력, 권능의 융합은 그저 본능에 맡긴 공격뿐이라고 해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한스에게는 족쇄도 붙어 있었다.
퍼어엉!
지면이 파도처럼 일어난다. 성난 물결처럼 움직이는 막대한 질량의 흙더미가 한스를 덮쳐왔다.
‘칫!’
검으로 요격하기 힘든 공격이라고 판단, 한스는 급히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챙겨야 할 건 자기 몸만이 아니었다.
“꽉 잡아요!”
뒤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샘을 마치 짐짝처럼 들고 얼른 뒤로 물러났다.
콰아앙!
한스가 있던 곳을 흙더미가 덮친다. 하지만 그걸로 성에 차지 않은지 해변을 타고 넘어오는 쓰나미처럼 흙더미가 지면을 훑으며 쫓아왔다.
자기 혼자면 적은 마력으로 훨씬 수월할 수 있는 움직임도 샘의 무게가 더해지자 소모 마력과 난이도가 곱절로 늘었다.
어쩔 수 없이 다리에 마력을 퍼부어 더욱 거리를 벌렸다.
샘을 도망 보내려 시도도 수 십 번 해봤지만 대체 뭔 일이 있었는지 완전히 돌아버린 것 같은 스녹이 샘도 가차없이 공격을 가하는 터라 포기한 상태였다.
“스녹! 대체 뭐 하는 거야! 그만 둬! 나야! 샘이라고!”
한스의 어깨에 매달린 채 샘이 피를 토하듯 외친다.
동생같이 생각하던 스녹이 갑자기 이상한 힘을 얻어 자신을 죽일 듯 공격하고 있으니 샘도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한스에게 보호받으며 스녹에게 외치는 것뿐.
“크아아아아!”
그러나 돌아오는 건 스녹의 짐승 같은 울부짖음과 무정하고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날아든 바윗덩이들을 쳐내며 한스가 머리를 핑핑 굴렸다.
‘샘 씨를 데리고 도망치는 건 힘들 것 같아. 그렇다고 나 혼자 살자고 샘 씨를 미끼로 삼는 것도 싫고.’
그건 한스의 정의감이 허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 지크 님이 이 싸움을 눈치채고 달려오길 바랄 수밖에.’
혹 광산 쪽에서 일어난 싸움의 대상자가 지크가 아니라거나, 지크가 자신들을 눈치 채지 못한다거나 하는 상황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지크가 전투에서 진다는 생각만큼은 일절 들지 않았다.
쿠웅!
몸을 꿰뚫으려 날아온 주먹만한 돌덩이 하나를 베어냈다.
‘지크 님 없이 치르는 실전이 하필 이런 거냐!’
민간인을 지키면서 척 봐도 특수한 힘을 가진 자를 상대하는 상황이라니. 지크에게 코를 꿴 후부터 운이 정말로 주저앉은 것 같아 한스는 한탄했다.
하지만 한탄은 한탄이고 생존은 생존이다.
한스는 계속해서 스녹의 공격을 철저하게 막아냈다. 한스도 스스로에게 감탄할 정도로 잘.
그리고 그의 노력은 결국 보답 받았다.
콰아아아!
거센 마력의 노도가 몰려온다. 한스를 요리조리 괴롭히던 스녹이 기겁했다. 그의 앞으로 흙더미가 일어서고 바위가 벽을 만들었으며 돌덩이들이 뭉쳤다.
급히 세워진 그 방어벽에 마력의 참격이 틀어박혔다.
콰아앙!
거센 폭음이 현장을 휩쓸었다. 흙더미가 흩어졌고 바위벽은 잘렸으며 돌덩이무리가 갈려나갔다.
마력의 참격은 마지막 방어선인, 스녹이 급히 두른 암석 갑옷에 부딪치고서야 사라졌다.
하지만 충격이 전부 해소되진 않아 스녹은 땅바닥을 굴렀다.
“니들이 여긴 어쩐 일이냐?”
목숨 걸고 전투를 하던 자신들의 심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은 태연한 목소리가 들린다.
한스의 가슴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그러나 그 울컥거림보다 반가움이 터 큰 자신을, 한스는 슬쩍 외면하며 자신들의 옆에 내려선 지크를 환영했다.
“지크 님!”
“지크!”
한슨와 샘의 목소리가 겹쳤다.
몇십 년 전에 헤어진 부모와 재회한 것 같은 반응이다. 하지만 지크는 그들의 심정은 아랑곳않고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래그래. 지크다.”
사내놈들의 반짝거리는 눈을 대충 무시하고 지크는 스녹을 쳐다봤다. 한스와 샘이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건 나중에 물어보면 그만이다. 지금은 스녹이 문제였다.
“여전히 절찬리에 폭주 중이군.”
“폭주? 혹시 스녹이 왜 저렇게 된 건지 아는 거야?”
지크가 뭔가를 아는 것 같자 샘이 반응했다.
“골치 아픈 일에 엮였어. 지금 스녹을 저 꼴로 만든 놈을 쳐죽이고 오는 길이다.”
“골치 아픈 일이라니…. 스녹은 그냥 광부일 뿐이라고!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이유가 어디 있어!”
“일단, 샘. 그냥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골치 아픈 일에 안 휘말리는 건 아냐. 보통 그 골치 아픈 일을 만드는 놈들은 ‘남한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 뭐, 이런 생각을 일절 안 하거든.”
회귀 전, 그 골치 아픈 일을 만들던 인간으로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말이야. 아마 스녹은 그냥 광부가 아닐 거야. 저 녀석은 재능이 있어.”
“재능?”
“그래. 재능. 그것도 상당히 뛰어난 재능. 그 정도면 골치 아픈 일에 충분히 휘말릴 만하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은 보통 타인의 관심을 끄는 일이 많다. 그게 좋은 관심이든, 나쁜 관심이든.
그리고 이번에 스녹은 재수 없게 나쁜 관심을 끈 것뿐이다.
설마 철없는 동생같이 여기던 스녹이, 지크 같은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자가 ‘재능이 있다’라고 일컬을 정도라는 대단했다는 사실에 샘은 적잖이 놀랐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지금 스녹이 저렇게 된 것도 그 재능 때문이란 거야?”
“관련이 없진 않지.”
“그럼 원래대로 돌릴 수 있어?”
그에 대해서는 지크도 확답을 줄 순 없었다.
“생각하는 게 있긴 해. 일단 대지의 환수와 강제로 융합된 지금의 상태를 어떻게든 해야지.”
“대지의 환수?”
“아마도 너희들이 광산의 괴물이라고 말하던 녀석일 거야.”
“그건 그냥 전설이…!”
“그런 전설 중에 골 때리게도 진짜인 케이스가 종종 있거든. 아마 이번도 그런 경우겠지.”
지크는 검을 고쳐 쥐었다. 넘어졌던 스녹이 일어서 살기를 뿜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상대할 테니까 조금 떨어져 있어. 그리고 한스!”
“넵!”
“어째서 네가 여기서 샘을 지키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마디는 해두마.”
혹시 샘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화를 내려는 것일까? 아니면 고작 스녹 정도 쓰러뜨리지 못했다고 타박하려는 것일까? 한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한스에게 날아든 것은 매도의 말이 아닌, 곧게 치켜올려진 지크의 엄지였다.
“잘했다! 까다로운 상대에다 사람 한 명을 지키면서 하는 어려운 싸움에 훌륭히 대응했구나! 적어도 이번 전투에 대해서는 만점을 주마!”
잠시 지크가 무슨 말을 했는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만큼 예상외의 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지크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그의 표정이 환해졌다.
“가,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