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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47화 (47/628)

제47화

쿠르릉!

멀리서 은은한 땅울림이 들려온다.

덜컹! 덜컹!

문과 창문이 아릿한 비명을 질렀다. 침대가 돌이 떨어진 수면처럼 출렁였다.

“…응?”

곤히 잠들어 있던 샘이 눈을 떴다.

잠기운에 눈이 흐릿하던 것도 잠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진?’

등허리가 쭈뼛했다.

지진이란 재해는 누구에게나 공포스러운 존재지만, 광부란 직업을 갖고 있는 자들에겐 특히 더 그랬다. 게다가 샘은 한층 더 지진이 싫었다.

지진은 곧 멎었다. 하지만 샘의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잠깐 보고 와야겠어.’

지진이 광산에 영향을 줬을 수도 있다. 지금 바로 정밀한 조사를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외곽에서 살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샘은 급히 옷을 챙겨 입었다.

* * *

지크가 떠난 이후, 한스는 지크가 떠난 창가에 걸터앉아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시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창에서 뛰어내린 후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지크. 금방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미 시간도 제법 지났다.

먼저 잠자리에 들까도 생각했다. 지크는 그런 면에서는 은근히 관대하기에 별 트집을 잡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방금 전 일어났던 지진이 또 마음에 걸렸다. 일개 인간과 지진이라는 자연 현상 간의 인과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웃기기도 하지만 상대는 그 지크다.

‘충분히 있을 만하지.’

때문에 마음 놓고 잠자리에 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응?’

과연 지진과 지크가 관련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멋들어진 우연의 교차인지 고민하던 한스의 눈에 누군가 밤길을 걷고 있는 게 보였다.

‘샘 씨잖아?’

이 야심한 시각에 무슨 일일까. 한스는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본인은 극구 부정하겠지만, 슬슬 지크에게 물들고 있는 한스였다.

“샘 씨?”

“깜짝이야!”

샘이 화들짝 놀랐다. 어두운 밤, 횃불 하나에 의지해 걷고 있던 참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한스는 충분히 그를 놀래킬 만한 존재였다.

가슴을 부여잡고 쿵쿵 뛰는 심장을 달랬다.

“괘, 괜찮으신가요?”

“예에. 좀 놀랐을 뿐입니다.”

샘이 미안한 표정을 한껏 쥐고 있는 한스를 쳐다봤다.

지크의 곁에, 마치 부속품처럼 늘 붙어 있던 남자다. 종이라고는 하지만 그저 지크가 그렇게 부르는 것뿐, 노예 같은 신분은 아니라고 샘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춰 대했다.

“한스 씨는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창밖을 보고 있는데 샘 씨가 지나가는 게 보여서요.”

한스가 옆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여러 개의 창문 중 활짝 열려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 하나가 보였다.

‘설마 저기서 뛰어내린 건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지만, 한스는 태연하다. 특별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태도다. 오히려 놀란 자신이 비정상 같았다.

‘지크에 비하면 평범하고 얌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지크의 종이라고 해야 하나?’

역시 자신 같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랐다.

“이 밤중에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십니까?”

“지진 때문에 광산을 살피러 갑니다.”

“지금 이 시간에요? 날이 밝으면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바로 가서 확인하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요.”

그때 샘의 표정은 무언가 다급하고 절박해 보여, 한스는 더 이상의 설득을 포기했다.

하지만 시간도 늦었고 이 시간의 산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설령 몬스터가 없다고 해도 일반인은 산짐승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하다.

‘여기서 이 사람을 그냥 보냈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는 날엔 욕을 엄청 먹겠지?’

한스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제가 같이 가 드리겠습니다. 지크 님이 자리를 비우지 않으셨다면 아마 그러셨을 테니까요.”

“폐가 되지 않을까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샘은 기뻤다. 몬스터를 사냥하는 사람이 호위라면 그만큼 안전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괜찮습니다. 얼른 갔다 오죠.”

한스는 숙소에 쪽지로 자신의 행선지를 써 놓고는 샘과 함께 광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지크는 광산 입구에서 팔짱을 끼고 고민하고 있었다.

광산 안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들이 넘실거리며 올라온다. 조금씩 새어나오던 그 기운들은 지진이 지나간 이후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대지라는 거대한 존재가 가로막고 있어 제대로 방향이나 거리가 가늠되지는 않지만 대략 광산 어디 즈음에서 나오는 건 확실했다.

지크는 그 힘 안에서 든든한 둔중함과 생명의 향기로움을 느꼈다.

대지의 기운.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노래하며 퍼지고 있었다.

‘노웸 녀석이 깨어났나 보군.’

지크도 정확한 정체는 모른다. 하지만 대지의 권능을 자유자재로 사용한 녀석인 걸 감안하면, 지금 광산 안에서 눈을 뜬 존재가 노웸일 가능성은 컸다.

‘역시 그놈들, 노웸과 관련이 있는 놈들이었어.’

암살자의 대장 놈이 광산 안에 들어간 후 노웸으로 추측되는 녀석이 나타났으니, 이 정도면 거의 확정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잘 됐어. 이 도시에 온 이유가 노웸을 처치하러 온 거니. 여기서 죽여버리면 되겠지.’

도시와 떨어진 광산이라 인명이나 재산 피해가 날 걱정도 적다.

지크는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어디 아프거나 불편한 곳은 없다. 암살자 놈들이 에피타이저 노릇을 충실히 해서 몸도 적당히 예열됐다. 죽은 암살자들이 들었다면 이를 바득바득 갈 생각이었지만 그는 태연했다.

무장도 괜찮다. 그의 애검은 그의 손에 충실히 쥐여져 있다.

마지막으로 마력을 한 번 회전시켜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광산 입구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섰다.

광산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광산이라는 환경은 대지의 힘을 쓰는 노웸에게 엄청난 이점을 가져다준다. 아직 전성기의 힘을 찾지 못한 지금 적의 홈그라운드에 굳이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나올 테니까.’

‘대지의 폭군 노웸’의 화려한 등장 오프닝은 스울의 괴멸이다. 즉, 녀석은 스울을 괴멸시키기 위해서라도 광산 밖으로 나올 것이다.

그런 지크의 생각을 긍정이라도 하듯, 광산 안에서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기척은 광산 입구를 향하고 있었다.

대지의 기운도 그 기척과 같이 움직이는 걸 보니, ‘대지의 폭군 노웸’이 확실해 보였다.

‘어라?’

그러나 그 기척을 느낀 순간 지크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거…, 느껴본 적 있는 기척인데?’

분명 조금 변질되긴 했지만 그의 기억에 있는 기척이다.

‘설마…!’

뇌리로 스친 생각에 지크는 적잖이 놀랐다.

저벅! 저벅!

광산 안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지크는 팔짱을 풀고 검을 뽑아들었다.

기척의 주인이 광산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이었다. 마을에 가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인간. 특이한 점이라고는 초점이 맞지 않아 멍해 보이는 눈뿐.

하지만 몸에서 유유히 흘러나오는 막대한 대지의 향기가 바로 그가 지크가 찾던 ‘대지의 폭군 노웸’이란 걸 알려주고 있었다.

“진짜 댁일 줄이야.”

지크는 혀를 찼다. 이걸 운명의 농간이라고 해야 하나. 설마 ‘대지의 폭군 노웸’이 그가 아는 사람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며, 지크는 상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스녹 씨.”

자신의 이름이 불렸는데도 스녹은 반응이 없었다.

지크는 일단 질문을 던져봤다.

“당신은 암살자 놈들에게 끌려가지 않았습니까? 광산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당신이 품고 있는 기운은 또 뭐고요.”

“…….”

대답은 없다. 정신이 나간 사람 같다.

“혹시 노웸이란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하지만 지크가 그 질문을 던진 순간, 스녹에게 반응이 나타났다.

희번뜩!

순식간에 두 눈에 초점이 돌아오며 지크를 쳐다본다. 아니, 노려봤다.

‘맞는 것 같군.’

다른 질문엔 반응하지 않다가 노웸이란 단어에 반응했다. 그 말은 곧 노웸이란 이름에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다는 뜻이다.

“크으으으으!”

스녹이 으르렁거린다. 그 모습은 마치 짐승 같았다.

‘노웸이 저런 녀석이었던가?’

지크가 아는 노웸은 상당히 프로페셔널한 녀석이었다. 생존자들의 말에 따르면 난폭하고 잔인하긴 했지만 대지의 권능을 요소요소 써먹어가며 적들을 이성적으로 착실하게 몰아붙였다고 했다.

저런 짐승 같은 모습을 보였다는 정보는 없었다.

‘꼭 폭주하는 것 같잖아.’

“크아아아아!”

스녹이 울부짖었다.

퍼엉!

지면이 가볍게 흔들리더니 지크의 발 어림에서 석순이 튀어나왔다. 말이 석순이지, 그 날카로움과 튀어나온 속도를 생각하면 웬만한 창이나 화살보다도 더 위협적이었다.

당장이라도 지크의 몸을 꼬챙이 꿰듯 꿸 것 같다.

그러나 석순이 꿰뚫은 것은 지크의 몸이 아닌,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기세도 허무하게 목표를 잃은, 그러나 2m는 뻗은 석순의 끝에 지크가 내려섰다.

석순 끝에 발을 디디고 지크는 서늘한 눈으로 스녹을 내려다봤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감히 날 공격하고 멀쩡하리라는 생각을 한 건 아니지?”

지크가 웃었다. 제정신이 아닌 스녹조차 움찔 할 정도로 사나운 웃음이었다.

“선제공격도 받았겠다. 그럼 원래의 목적을 달성해볼까?”

그가 이 도시에 온 이유는 ‘대지의 폭군 노웸’을 퇴치한다는 착한 일을 하기 위함이다.

“그래도 일단은 아는 사이니 도중에 정신을 차리면 멈춰주긴 하마. 그러니까.”

퍼석!

지크가 발을 구르자 석순이 부서져내렸다. 동시에 지크의 신형이 쏜살같이 쏘아졌다.

“험한 꼴 보기 싫으면 빨리 정신 차려!”

지크가 검을 내려쳤다.

콰아앙!

묵직한 울림. 마력을 잔뜩 머금은 검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스녹에게 피해를 주는 것에는 실패했다.

끼긱! 끼긱!

검신이 바위를 긁으며 거슬리는 소리를 낸다.

어느새 지면에서 튀어나온 바위 벽이 스녹의 앞에서 지크의 검을 방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크는 예상했다는 듯 힘을 더욱 주며 마력을 주입했다.

콰앙!

벽이 터져 나갔다. 흩날리는 돌덩이와 흙먼지 사이로 놀란 스녹의 얼굴이 보인다.

이렇게 허무하게 벽이 박살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지크는 비산하는 돌멩이 중 하나를 검을 들지 않은 손의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퍼억!

“커억!”

빠른 속도로 날아간 돌멩이가 스녹의 복부에 정통으로 틀어박혔다. 숨 막히는 신음을 토하며 스녹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맷집이 상당히 올랐군.’

평범한 인간이 맞고 주춤거리기만 할 정도의 위력이 아니다.

솔직히 복부가 꿰뚫려도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하며 튕겨낸 돌멩이였다.

“크아아아!”

스녹이 손을 들어 올렸다.

콰아아앙!

지크 아래의 지면이 폭발했다. 지면의 작은 흙 알갱이부터 커다란 돌들까지 빠르게 비산하며 무차별적으로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지크가 물러나며 검을 휘둘렀다.

따다다다다당!

그건 기예였다. 검이 휘둘러지며 움직이는 바람이 작은 공격들을 막아내고, 뚫고 들어오는 커다란 위험들은 일일이 검으로 튕겨냈다.

투웅!

공간 찌르기가 펼쳐졌다. 지크의 검 끝에서 공기가 날카롭게 벼려져 스녹을 향해 쏘아졌다.

푸욱!

“크익!”

스녹의 어깨에 구멍이 뚫리며 피가 튀었다.

투웅! 투웅!

찌르기가 몇 번 더 쏘아졌다. 스녹이 바위를 세워 막았지만 그 사이에 몸에 두 개의 구멍이 더 뚫렸다.

‘약하네.’

몸을 숙여 절절 매는 스녹을 보고 지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힘과 공포로서 군림하며 ‘대지의 폭군’이라는 명칭을 받은 녀석이라고는 무척 약했다.

‘이 녀석 정말로….’

대지의 폭군이란 존재에 의문을 품을 때였다.

콰아앙!

다시 발밑에서 석순이 솟아났다.

콰지직!

지크의 발에 석순이 짓밟혀 부서졌다.

아까보다도 더욱 처참하게 막힌 공격에 더 이상 스녹의 승기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부서진 석순의 파편을 보는 지크의 얼굴은 뭔가를 깨달았다는 표정이었다.

‘위력이 올랐어.’

석순이 튀어나오는 스피드, 석순의 단단함 등 모든 면에서 아까의 것보다 뛰어났다. 석순을 짓부순 발이 얼얼했다.

‘강해지고 있군.’

그것도 강해지는 속도가 심상치 않다.

아마도 이런 식의 강화 끝에 지크 자신이 알고 있는 ‘대지의 폭군’이 탄생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강해지기 전에 끝내는 게 좋다. 지크가 검을 휘둘렀다.

스녹이 방어를 위해 다시 바위벽을 세웠지만 이번엔 막히지 않았다. 벽을 진흙처럼 잘라내며 지크의 검이 계속 전진했다.

콰아앙!

곧장 스녹의 목으로 향할 것 같은 지크의 검이 멈췄다. 시퍼런 살기를 머금은 검이 지크의 검을 막아서고 있었다.

“생명은 소중히 해야죠. 다른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지옥 간답니다?”

“너 같은 놈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냐?”

지크가 자신의 검을 막은, 스녹을 납치했던 암살자들의 대장을 보며 이죽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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