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창을 뛰쳐나온 지크는 잠시 지면을 밟았다가 가장 가까이 있는 건물의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지붕 위를 밟으며 정체불명의 자들을 쫓았다.
따라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스녹이라는 짐을 둘러매고 있어서인지 그들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어이!”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히자 지크가 크게 외쳤다.
“얘기 좀 하지? 너희들이 데리고 가고 있는 짐짝에 용건이 좀 있는데 말이야!”
상황도 그렇고 지크의 경험으로 봐도 그렇고 절대 제대로 된 자들로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지크가 예상하지 못한 이유로 움직이는 착실한 인간들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지크는 일단 대화를 나눠본다는 온건한 방법을 시도해봤다.
하지만 지크의 배려에 돌아온 건 투척된 단검이었다.
챙!
검을 뽑을 것도 없었다. 공기를 화살처럼 튕겨 단검을 요격했다. 힘을 잃고 공중에서 팽글팽글 도는 단검을 달리는 그대로 낚아챘다.
“떨어뜨렸어!”
훅!
지크가 단검을 던졌다. 마력을 가득 담은 단검이 쏜살같이 날아갔다.
“컥!”
가장 뒤에 있던 자가 단검을 맞았다. 그는 작은 비명을 지르며 경사진 지붕에서 힘을 잃고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달리던 자들이 일제히 발을 멈추고 건물 아래 골목으로 뛰어내렸다.
‘진작 그럴 것이지.’
지크도 그들을 따라 뛰어내렸다.
인적 없는 좁은 골목에서 지크와 수상한 자들이 대치했다.
“너희들 뭐냐?”
지크가 허리에 손을 얹고 먼저 물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대꾸는 없었다.
대장인 듯한 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얼마 전 드루를 죽인 사내였다. 숨이 끊어진 동료의 시체를 발로 툭 찼다.
시체가 움직이며 뒤집어졌다. 뒷목에 박힌 단검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착실한 조직은 아니군.’
동료의 취급을 저렇게 하는 걸 보면 각이 나왔다.
사내가 살벌한 눈초리로 지크를 노려봤다.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갑자기 선물을 주길래. 너무 감동해서 역으로 선물을 되돌려줬지 뭐야. 반성은 하고 있어. 고작 그 정도 선물에 감동해서 죽어 나자빠질 줄은 몰랐거든.”
“죽여.”
그의 명령에 무리가 일제히 단검을 뽑아들었다.
“몸놀림을 보고 예상은 했다만, 역시 암살자 놈들이었나? 그런 놈들이 광부 놈은 왜 끌고 가는 거야? 멍청하도록 순진한 놈이라 남한테 폐를 끼칠 능력조차 없어 보이던데.”
“…….”
“새끼들. 대꾸 좀 해주면 어떻다고.”
지크가 투덜거렸다.
쩍!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휘둘러진 지크의 주먹이 달려들던 암살자의 얼굴에 정통으로 꽂혔다.
누가 뒤에서 강하게 끌어당기는 마냥 암살자의 몸이 튕겨나갔다. 그가 잡고 있던 단검이 땅바닥에 힘없이 달그락거렸다.
“하여간 암살자 놈들 눈치는 더럽게 빠르다니까.”
어느새 달려들던 암살자들은 지크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방금 공방으로 지크의 실력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챈 것이다.
“그런데 보통 암살자 놈들은 이럴 때 시체만 처리하고 잽싸게 몸을 뺄 텐데, 너희들은 안 그러네?”
지크가 웃었다.
“너희들, 그냥 암살만 하는 놈들이 아니구나? 어느 단체냐?”
퍼엉!
갑자기 불덩이가 쏘아졌다. 분명 마법이다.
상대를 암살자라고 생각하고 암습에 대한 경계만 하고 있던 자들에겐 분명 치명적인 일격이었을 것이다.
“뭐야, 이건?”
콰앙!
짜증나는 모기를 쳐내듯 휘두른 손길에 불꽃이 바닥에 처박혔다.
강맹한 불덩이는, 하나 차마 지면까지는 태워내지 못하고 억울한 듯 몸부림치다 사라졌다.
이것에는 암살자들도 놀랐는지 적잖게 동요가 일었다.
“암살자가 마법까지 배웠다고? 그런 놈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길가에 채는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는 건 아니고. 게다가 주문도 없이 마법을 부릴 놈이 여기서 암살자 노릇을 할 가능성도 낮고.”
중얼거리며 선택지를 줄여가던 지크가 조금은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설마 아티팩트냐? 그것도 이 정도의 마법 공격을 할 정도의?”
아티팩트는 귀하다. 게다가 방금 전 정도의 마법 공격을 할 정도의 아티팩트라면 더욱.
하지만 지크가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귀한 아티팩트도 엄청나게 본 것이 그가 아니던가. 그가 놀란 이유는 다른 것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네? 그런 것까지 사용하는 놈들이 그 광부 놈은 왜 납치해?”
납치를 하든, 고문을 하든, 살인을 하든 스녹이란 광부 하나 때문에 움직였다고 생각하기엔 양도 질도 너무 고급인 녀석들이다.
의문만이 쌓여갔다. 하지만 지크는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뭐, 됐어. 잡아다가 족친 후에 물어보면 되겠지.”
스르릉!
지크가 검을 뽑았다. 서슬 퍼런 날이 이빨을 드러냈다.
암살자들의 대장이 잠시 지크의 검에 시선을 주다 입을 열었다.
“…셋이 남아라. 나머지는 계획을 진행한다.”
지크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암살자 셋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왔다.
대장은 그들을 남기고 다른 이들과 함께 다시 지붕 위로 올라 달리기 시작했다.
“얘기 좀 하자니까 거 참 말 더럽게 안 듣네.”
이 정도로 요구를 했으면 적어도 듣는 척이라도 하는 게 매너이건만.
‘하긴. 이런 놈들에게 매너를 따지는 것도 우습지.’
지크는 저 멀리 떠나가는 무리를 쳐다봤다. 그러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마 너희가 목숨을 걸고 나를 막아 저 녀석들을 도망치게 하려는 모양인데.”
지크가 가볍게 검을 한 번 돌렸다. 자세를 낮추고 무게 중심을 앞으로 움직였다.
“주제 파악을 못 한다는 소리 좀 듣지 않았어?”
팡!
한껏 응축된 지크의 몸이 펴지며 파공음이 인다. 암살자들도 앞으로 나왔다.
후웅!
지크의 검이 날카롭게 휘둘러졌다. 한 명이 단검으로 지크의 검을 부딪쳐왔다.
동시에 나머지 둘이 지크의 양옆으로 파고들었다. 새파란 단검이 맹독을 품은 독사의 머리처럼 흔들렸다.
제법 좋은 협격.
스녹이라는, 되찾아야 할 물건이 아니라면 잠깐 놀아 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우웅!
지크의 검에 마력이 스며든다. 감각이 손을 넘어 검의 끝까지 확장됐다.
위잉!
검날을 타고 마력이 마치 톱날처럼 돈다. 단순히 마력을 검에 집어넣었을 때보다 절삭력이 수십 배는 더 뛰어올랐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찰나의 순간 네 번의 절삭음이 겹쳤다.
지크의 검은 가장 먼저 부딪친 단검을 잘라내고 그 기세 그대로 단검의 주인이었던 암살자마저 베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더욱 달려 나간 검은 옆에 있던 또 다른 암살자의 단검과 그 신체마저 베어냈다.
촤아아악!
피가 비처럼 뿜어졌다. 두 동강 난 암살자의 상체와 하체가 시간차를 두고 떨어졌다. 주변으로 피가 웅덩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턱!
마지막 남은 암살자의 공격을 손쉽게 피한 지크가 시체 옆에 내려섰다. 남은 암살자는 허둥지둥 지크와 거리를 벌렸다.
“무, 뭐…!”
암살자가 동요했다. 침묵이 미덕이라 배워 온 그도 설마 동료 둘이 썩은 무처럼 베일 거라곤 생각도 못 한 것이다.
그것도 단 일순간에.
하지만 그 경악스러운 행위를 한 지크는 묘하게 인상을 쓰며 자신의 검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반발력이 있어.’
암살자들의 무기도 실력도 범상치가 않다. 정면 승부에 약한 암살자들이 이 정도라니.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놈들일까.
“잠깐 기다려 봐.”
지크가 자신의 머리를 검지로 툭툭 두드렸다.
그가 이 도시로 온 것은 곧 나타날 재앙 때문이다. 그런데 시기도 적절하게 이런 놈들이 튀어나왔다?
“혹시 너희들, ‘대지의 폭군 노웸’과 뭔가 관련이 있냐?”
대지의 폭군 노웸.
마인 시대에 등장한 마인 중 하나다.
이명 그대로 대지의 힘을 사용하던 자로, 그 등장은 스울에서였다.
녀석은 등장하자마자 스울을 완전히 파괴한 후, 이루스 광산에 터를 잡고 그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다행히도 그 엄청난 힘과는 달리 이루스 광산을 중심으로 일정 반경 이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에 그 위험도는 다소 떨어졌다.
물론 왕국은 어떻게든 스울을 탈환하려고 노력했다. 이루스 광산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은 그들의 주요한 전략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파견된 병사들은 모두 매장당했다.
광산 안에 숨어 있는 노웸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안 그래도 대지의 힘을 다루는 노웸이 광산이라는 홈그라운드를 쓸 때 얼마만 한 재앙이 되는지를 왕국은 몇 번이나 엄청난 병력을 잃어가며 깨달았다.
‘결국 왕국은 멸망했지.’
이루스 광산의 소실과 광산을 탈환하려다 잃은 병력은 왕국에 너무 뼈아픈 데미지를 안겼다.
아무리 마인 시대라고 불릴 만큼 마인이 많았다 해도 나라 하나를 멸망시킨 마인은 그렇게 많지 않다.
강력함보다는 환경과 조건이 맞아 떨어진 결과였지만 그래도 노웸은 한 나라를 몰락시킨 마인으로서 굉장한 악명을 떨쳤다.
‘마인이 등장할 시기와 이런 녀석들이 활동하는 시기가 우연히 겹쳤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작위적이지. 뭔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아.’
노웸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동요한 빛이 드러나는 암살자의 모습이 그 설득력을 더욱 높였다.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암살자가 목소리를 높인다. 그만큼 놀랐다는 뜻이다.
“뭐야. 정보 교환이라도 할까? 네 놈이 알고 있는 정보를 가르쳐주면 내가 어떻게 알게 됐는지도 가르쳐줄게.”
“…….”
“그럴 줄 알았다.”
표독스럽게 단검을 내미는 암살자를 보며 지크는 혀를 찼다.
‘일단 스녹을 데리고 간 놈들을 쫓는 게 낫겠지. 정보야 다른 놈들에게 얼마든지 뽑을 수 있으니까.’
게다가 더 좋은 정보를 갖고 있을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거기 있었다.
탓!
지크가 발을 굴렀다. 다시 칼끝까지 감각이 확장됐다. 마력이 회전하며 절삭력을 높였다.
달려오는 지크에게 암살자도 마주 달려갔다. 지크의 검에 비해 그의 단검은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다.
지크와 암살자의 거리가 지척까지 줄었다. 지크는 어두운 로브 안에 숨어 있는 암살자의 눈을 봤다.
‘뭔가 있군.’
자포자기해 무작정 덤벼오는 게 아니다. 나름의 각오와 결단이 보였다. 지크는 몸에 마력을 둘렀다.
스윽.
암살자가 단검을 쥐지 않은 손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확인하기도 전에 지크가 검을 휘둘렀다.
뭔가 개수작을 부리려는 게 확실하니 이런 건 그 전에 박살내야 한다.
하지만 조금 늦었다.
급격하게 흐르는 마력의 흐름. 암살자의 옷자락이 펄럭이며 몸이 부풀었다.
콰아앙!
폭발이 일었다. 규모는 작았다. 하지만 위력이 작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파괴력을 작은 공간에 오롯이 때려박는 폭발이라 범위 안에 가해지는 위력은 더욱 강대했다.
사람이 휘말리면 몸이 산산이 분해될 그런 폭발이었다.
폭발이 잦아들었다. 빛과 굉음이 사라지고 은은한 열기만이 흔적으로 남았다.
그 안에서 옷자락이 조금 찢어진 지크가 걸어 나왔다.
기분 나쁘게 옷을 툭툭 털고 침을 퉤 뱉었다.
‘누가 제 목숨 안 사리는 놈들 아니랄까 봐 자폭을 하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암살자를 생각하며 지크는 혀를 끌끌 찼다. 고작 옷 조금 찢기 위해서 제 목숨을 내다 버린 암살자가 무척 미련했다.
‘그런데 자폭 방식도 상당히 고급스럽단 말이야.’
자신의 마력을 폭주, 외부의 마력과 동조 시켜 소용돌이를 그리듯 폭발시키는 자폭 방식은 상당한 기교를 요구하는 기술이었다.
물론 자폭하기 직전 품속에 손을 넣은 것으로 보아 자폭용 아티팩트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녀석들은 아까 화염 마법을 더해서 자폭용 아티팩트까지 일선 암살자들에게 보유시킬 정도로 배후가 대단하다는 증거였다.
‘역시 이 녀석들의 배후가 궁금해.’
지크는 다시 암살자들의 추적을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