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터벅. 터벅.
힘없는 발걸음이 이어진다. 축 늘어진 상체는 무거운 고뇌를 인 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 장비를 두고 왔네.’
무턱대고 뛰쳐나온 터라 곡괭이 같은 장비를 챙길 겨를도 여유도 없었다. 머리를 부여잡고 스녹은 주저앉았다.
‘잃어버리진 않겠지만.’
거기엔 샘이 있다. 어렸을 적부터 형제처럼 커왔던 그가 스녹의 장비를 챙겨주지 않을 리 없다.
그저, 다음에 장비를 찾으러 가기 위해 그와 다시 얼굴을 맞대야 한다는 사실이 껄끄러울 뿐이다.
‘당분간은 말하기 좀 그런데.’
하지만 어쩔 수 있는가. 그게 없으면 당장 먹고 살 길이 사라진다.
어쩔 수 없이 내일 그에게 가야 했다.
물론 잔소리를 몇 번 들을 뿐, 그가 자신에게 심하게 욕을 하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 잔소리도 전부 자신을 위해 한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꿈보다 그의 말이 더 일리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래도 모험가가 되고 싶어.’
역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마치 쓰러질 것 같은 자신의 꿈을 다시 세우려는 것처럼 스녹은 벌떡 일어났다. 다리에 힘을 주고 걷기 시작했다.
축 처진 어깨를 일부러 펴고 걸었다. 우울함을 지우기 위해 작게 노래를 불렀다.
“그 옛날 대지의 존재가 노해 대지가 물결치니, 여지껏 본 적 없는 재앙이노라.”
불러 보니 조금 이상했다. 가사가 마음을 달래기는커녕 우울함을 더 증폭시킬 것 같다.
하지만 무시하고 계속 불렀다. 어쨌거나 이 노래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였다.
“사람들은 그 앞에 두려워하니, 그것이야 말로 공포의 다른 이름이로다.”
쿵!
순간 스녹의 눈앞이 반짝였다.
충격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린 엉덩이를 문지르며 스녹이 자신과 부딫친 사내를 올려다봤다.
스멀스멀 퍼지는 하늘의 어둠을 배경으로 그가 보였다.
그는 스녹이 동경할 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든든해 보이는, 잘 손질된 가죽 갑옷과 멋들어지게 맨 검. 그가 상상만 해왔던 모험가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네가 스녹이지?”
“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낯선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스녹은 깜짝 놀라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남자는 개의치 않은 듯 웃음 지었다. 어딘가 오싹해 보이는 웃음을.
“너, 모험가가 되고 싶다며?”
* * *
오늘도 지크와 한스, 정확히 말해 한스는 혼자서 열심히 몬스터들을 때려잡고 있었다.
몬스터가 늘어나고 있다는 샘과 폴체누의 걱정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확실히 몬스터와 마주치는 빈도가 늘어나 있었다.
한스를 훈련시키기엔 좋은 상황이었지만 스울과 스울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우랴아아앗!”
한스가 크게 기합을 지르며 검을 휘두른다. 강맹한 위력이 담긴 검이 트롤의 목덜미를 스쳤다.
끄르르륵!
피가 확 튀며 목이 벌어진다. 기도로 피가 넘쳐 트롤은 제대로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하지만 트롤의 놀라운 재생력은, 다른 생물이라면 치명상이 분명할 그 상처를 빠르게 치유하기 시작했다.
“합!”
기합성이 다시 한번 울린다. 한스의 검이 우웅 울었다. 허우적대는 트롤의 팔을 피한 한스가 다시 한번 트롤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검은 상처 입은 목을 감싸고 있던 손과 함께 트롤의 목을 이번에야 말로 완벽하게 잘라냈다.
아무리 재생력 좋은 트롤이라도 목이 떨어진 상태에서까지 살아남을 수는 없다.
쿵!
트롤이 쓰러졌다. 한스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땀을 닦아냈다.
“이제 덜 큰 트롤 정도는 충분히 잡을 수 있게 됐네.”
뒤에서 구경 중이던 지크가 다가오며 말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가문에 있을 때는 검을 휘두르기는커녕 오로지 시종 일에만 매진했던 한스다. 처음 여행을 떠날 때만 해도 고블린 한 마리를 처리하고 헉헉대던 그가 아니던가.
하지만 이제는 아슬아슬하게라도 트롤을 잡아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게 설령 아직 미성숙한 개체라도.
한스도 자신이 설마 트롤을 잡게 될 줄은 몰랐는지 쓰러진 트롤을 빤히 쳐다봤다. 자신의 힘을 확인하듯 주먹을 꽉 쥐어봤다.
부스럭!
수풀이 흔들렸다. 한스가 흠칫 몸을 돌리고 검을 겨눴다. 깔끔함 경계. 하지만 지크가 손을 들었다.
“검 내려. 몬스터 아니다.”
이미 지크는 자신들에게 접근하는 자들을 알아채고 있었다.
한스가 검을 내렸다.
지크의 말대로 수풀을 제치고 나온 건 사람이었다.
수는 둘. 모두 지크와 한스가 아는 얼굴들이다. 그리고 같이 다니는 게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어라? 스녹 씨 아닙니까?”
지크가 그나마 친분이 있는 사람을 불렀다. 이름이 불린 스녹이 깜짝 놀라 지크를 쳐다봤다. 마치 장난을 치다 어른한테 걸린 어린아이 같다.
“뭐하고 있지? 빨리 안 가나?”
낮은 목소리가 스녹의 뒤에서 그를 재촉했다. 사람을 깔보는 뉘앙스가 크게 느껴지는 말투.
스녹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지크가 스녹의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을 쳐다봤다.
‘드루라고 했었나?’
도시에서 다음 대규모 토벌전 까지 몬스터의 머릿수를 줄이기 위해 고용했다는 모험가가 거기 있었다.
‘누가 모험가 아니랄까 봐 성질 참 더럽게 보이네.’
그런데 저 둘이 같이 다니는 건 좀 의외였다. 광부와 모험가. 접점이 보이지 않았다.
스녹을 재촉하던 드루가 지크와 한스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그의 눈이 상황파악을 위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다 땀범벅이 된 한스와 목이 잘려 쓰러진 미성숙한 트롤을 보고 입꼬리를 울렸다.
“제대로 크지도 못한 트롤 한 마리에 쩔쩔매는 등신이 있었군.”
다짜고짜 나오는 욕에 한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스녹도 놀랐다. 그러나 지크만은 별 표정변화가 없었다.
‘음음, 한스 저놈은 등신이 맞긴 하지.’
지크는 드루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긍정했다.
하지만 한스가 등신이라고 해서 아무나 막 등신이라고 부르는 걸 용납하는 건 아니었다.
‘근데 저놈이 아무리 등신이라도, 저놈을 등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주인인 나뿐이거든.’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놈한테 등신이라고 부르는 또라이가 있네?”
비스듬하게 올라가 있던 드루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내려왔다. 날카로운 눈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있는 지크를 쳐다봤다.
“…지금 뭐라고 했지?”
“뇌에 문제가 있는 줄만 알았더니 귓구녕마저 쳐막혔나? 사람 볼 줄도 제대로 모르니 눈깔도 비정상이고. 이런, 내가 아픈 사람인 줄도 모르고 험한 말을 해버렸네. 사과할게.”
지크가 고개를 까딱인다. 사과랍시고 하는 행동이었지만 그 행동을 사과로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쥐새끼가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군!”
드루가 등에 매고 있던 대검을 뽑아들었다.
“이봐, 그러지 마. 나는 착하게 살고 싶다고. 눈도 귀도 뇌도 마음도 아픈 불쌍한 녀석이랑은 칼부림하기 싫어.”
하나 말과는 달리 지크도 희희낙락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폭발할 것 같은 살기와 긴장감이 장내를 채웠다.
“자, 잠깐만요!”
그때 둘 사이에 스녹이 끼어들었다.
“두, 두 분 다 진정 좀 해 주세요!”
“비켜라!”
드루가 싸늘하게 눈을 부라렸다.
스녹의 등허리가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젖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버텼다.
“저, 절 봐서라도 이번 한 번만 넘어가주시면 안 될까요? 저 분은 제 친구의 지인이에요!”
그리고 이번엔 고개를 돌려 지크를 쳐다봤다.
“지크 씨라고 하셨죠? 당신도 참아주세요! 이 분은 제 선생님이세요!”
“선생님?”
지크가 드루를 쳐다봤다.
‘저런 놈을 선생으로 모신다고? 실력도 그저 그래 보이고 인성은 완전히 되바라진 놈인데?’
배울 거라고는 인상 쓰는 법과 시비 거는 법밖에 모를 게 분명했다.
그때였다.
부스럭!
수풀이 다시 한번 거칠게 바스락거렸다. 한스와 스녹이 깜짝 놀랐다.
그에 비해 지크와 드루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가볍게 고개만 돌렸을 뿐, 크게 놀란 기색은 없었다.
쿵!
더러운 녹색 발이 튀어나왔다. 곧이어 커다란 몸통과 못생긴 얼굴이 잇따라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트롤이었다. 조잡한 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는 그것은 장내를 살폈다. 그리고 히죽 웃었다.
사냥감의 등장에 기뻐하는 모양새가 뚜렷하게 보였다.
‘큰 놈이군.’
성장이 끝난 트롤이다. 아직 한스가 감당하기에는 무리인 녀석.
지크가 가볍게 검을 고쳐 잡을 때였다.
“흥!”
드루가 뚜벅뚜벅 트롤에게 걸어갔다. 빼들고 있던 대검이 섬뜩하게 빛났다.
우워어어어어!
트롤이 괴성을 지르며 돌진해왔다. 비대한 근육이 울끈불끈 움직이는 폼이 무척 위협적이었다.
지크가 검을 집어넣었다. 팔짱을 끼고 드루가 하는 폼을 지켜봤다.
콰앙!
트롤의 몽둥이가 지면을 내리쳤다. 흙과 풀들이 이리저리 날리며 지면이 움푹 파였다. 하지만 드루는 이미 옆으로 몸을 뺀 상태였다.
“하앗!”
드루가 검을 휘둘렀다. 은빛의 검격이 날카롭게 빛났다.
콰직!
트롤의 어깨에 깊은 상처가 났다.
크아아앗!
고통과 분노에 트롤이 위협스럽게 고함을 질렀다. 상처는 아랑곳없이 다시 몽둥이를 휘둘렀다.
스으윽!
그리고 그 상처조차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드루는 당황하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한 개의 상처가 회복되면 두 개의 상처를 냈고 두 개의 상처가 회복되면 세 개의 상처를 냈다.
아무리 트롤이라도 움직임에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흡!”
다시 몽둥이를 피한 드루가 자신의 앞에 드리워진 트롤의 팔에 도끼로 찍듯 검을 내리쳤다.
콰직!
크아아아악!
트롤의 팔에 검이 반쯤 파고들었다. 지금껏 입힌 상처 중 가장 깊은 상처였다.
비틀거리는 트롤의 품에 드루가 파고들었다.
“흐아아앗!”
커다란 기합 소리를 내며 드루가 검을 찔러넣었다.
콰직!
대검이 트롤의 목을 꿰뚫었다. 검의 폭이 넓어 그 찌르기는 트롤의 목을 거의 끊어놨다.
켁!
트롤이 혀를 쭉 빼고 켁켁댔다. 드루가 힘을 줘 검을 비틀었다.
투확!
쥐어뜯듯 한 트롤의 머리가 허공 높이 떠올랐다.
척!
마치 보란 듯이 드루가 검을 어깨에 걸쳤다.
피범벅이 되어 고꾸라진 트롤의 시체 앞에서 취한 그 포즈는 그럭저럭 멋이 있는 모양이었다.
드루의 제자라는 스녹은 물론이고 한스조차 그 모습을 취한 듯 바라봤다.
‘쌩쇼를 하고 있네.’
물론 지크는 예외였다. 고작해야 트롤 한 마리 저렇게 힘겹게 잡고 저런 똥폼을 잡고 앉았다니.
자신은 부끄러워서 수치사를 해버릴 게 분명했다.
스윽!
트롤의 시체가 드루가 갖고 있는 상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상자를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 한스와 한스가 쓰러뜨린 미성숙한 트롤을 번갈아 봤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지크에게 머물렀다.
“흥!”
마치 상대할 필요조차 없다는 반응이다.
“가자.”
검을 갈무리하고 드루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스녹이 그의 뒤를 따랐다. 마지막에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까닥인 후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