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루벨라는 대신전의 복도를 뚜벅뚜벅 걸었다. 쭉 펴진 어깨. 망설임 없는 걸음.
당당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의 움직임에는 예전 여린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루벨라의 뒤를 와이그는 묵묵히 따랐다. 복도의 통로를 돌아 안뜰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졌다고 생각될 때 즈음이었다.
“휴우~!”
루벨라가 한숨을 쉬었다. 과장되게 폈던 어깨에 힘을 빼고 몸을 늘어뜨린다. 그리고 빙글 뒤를 돌았다.
“어땠나요? 지크 님 모습을 떠올리며 행동해봤는데요.”
“완벽했습니다.”
지크에게 너무 물든 것이 아닐까 걱정될 만큼.
“그놈들도 이제 루벨라 님을 쉽사리 건들지는 못하겠죠.”
애초에 두 사람의 위상은 게임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성녀 후보라고 다 같은 성녀 후보가 아닌 것이다.
“그러면 좋겠네요.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저도 더 이상 참을 생각은 없으니까요.”
루벨라는 결연하게 말했다.
“특히 오늘 같은 막말을 계속한다면 더더욱이요.”
“그래도 그 자리에서 뺨을 올려붙이실 줄이야. 그게 지크 님의 조언이었죠?”
“네.”
루벨라가 윈드네에 대해서 말했을 때 지크는 역시 자기 방식대로의 조언을 해줬다.
상황, 상대, 여건 등을 면밀히 따져야 하지만, 필요하다면 일단 뺨부터 올려붙이라고.
망설이는 루벨라에게 이런 말도 했었다.
루벨라의 조언처럼 폭력을 행사하기 전 몇 번이나 생각을 하는 것도 물론 좋다.
하지만 그렇게 몇 번이나 생각을 했는데도 여전히 폭력을 사용한다는 선택지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실행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냐고.
이번에도 조언을 참신하게 해석해 반대로 자신에게 돌려준 지크에게 루벨라는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지크의 말이니 루벨라는 일단 가슴 깊이 새겨놨다.
“어떻게 보면 루벨라 님이 처음으로 폭력이란 걸 써보셨군요. 어떠셨습니까?”
루벨라는 윈드네의 뺨을 올려붙인 손바닥을 쳐다봤다.
“여러 감정이 들어요.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 죄책감,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손을 가볍게 사용하는 사람이 된 건 아닐까 하는 자조.”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정당성이 자신에게 있다 하더라도, 평소 폭력과 거리를 두고 살아온 사람은 자신이 행사한 사소한 폭력에마저 상처를 입는다.
하지만 그 회한 속에서도 루벨라는 말했다.
“하지만 확실히 속 시원하긴 하네요.”
와이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카르위먼의 성녀로서 전장에 나갈 기본적인 준비는 되셨군요.”
“전 아직 성녀가 아니에요.”
“시간문제입니다.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사람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힘을 휘둘러야 하는 우리지만, 그 힘에 먹혀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카르위먼의 성녀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자격이 없어지는 거니까요.”
“알겠어요.”
루벨라는 와이그의 조언을 가슴에 새겼다.
“자, 그럼 슬슬 교황님의 회의도 끝날 시간이 됐으니 보고를 하러 가죠.”
두 사람은 다시 카르위먼의 교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교황에게 긴 보고를 한 후, 루벨라는 와이그와 헤어졌다. 오랜 여행 끝에 드디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루벨라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안녕하십니까.”
누군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훤칠한 키와 균형잡힌 몸매. 잘생긴 사내였다. 하지만 카르위먼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가슴에 늘어진 브로치가 그의 정체를 말해주고 있었다.
“명예 성기사시군요. 카르위먼의 사람으로서 감사를 표합니다.”
그 브로치는, 예전에 루벨라가 지크에게 권했던 명예 성기사의 증표였다.
“저야말로 외부인으로서 카르위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사내는 살짝 웃으며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그렌 제너드라고 합니다. 루스 신관님의 추천으로서 명예 성기사의 이름을 달게 됐죠.”
“루스님의 추천이셨군요.”
우르원 루스. 대신관은 아니지만 그 공적과 신앙이 높은 신관이다.
차세대 대신관으로까지 거론되는 그의 추천을 받았다면 충분히 믿을 만한 사람일 것이다.
“실례지만 성녀 후보 중 한 분인 아이네 루벨라 님이 맞으십니까?”
“네. 부족한 능력이지만 성녀 후보라고 불리고 있죠.”
“그렇군요.”
기분 탓일까. 제너드란 사람은 조금 당혹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루벨라가 제너드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을 때, 그런 기미는 없었다.
‘착각이겠지.’
루벨라는 작별 인사를 하고 계속 방으로 가는 걸음을 이으려 했다.
제너드는 어디까지나 카르위먼의 손님. 그녀가 계속 대화를 나눠야할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제너드가 말을 걸어 왔다.
“혹시 이번에 가슴 아픈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네?”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아서요.”
‘그럴 리가?’
루벨라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표정 관리를 잘 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없는 고민이 드러날 정도도 아니었다.
‘혹시 나도 모르게 성기사분들의 일을 마음에 두고 있던 걸까?’
하지만 이미 그 일은 매듭을 지은 상태였다.
이번 추서 때 그녀가 대표로서 그들의 명복을 빌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지키기 위한 그들의 희생을 기리며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것이 루벨라가 내린 매듭이었다.
“혹 그렇다면 사정을 들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심이라곤 하나 없는 순수한 얼굴이 물어온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고민은 없어요.”
“…그렇습니까?”
제너드는 미안한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아무래도 제가 잘못 본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루벨라 님을 돕고 싶은 건 진심이니, 혹 나중에라도 고민이 생긴다면 찾아주세요.”
“선량한 분이시군요. 과연 루스 님이 추천하실 만해요. 제너드님의 조언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한 번 더 숙이고 루벨라는 가던 길을 계속 가기 시작했다.
제너드는 루벨라가 사라질 때까지 잔잔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러나 루벨라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변수가 생겼군.”
지금까지의 친절하고 선한 인상은 가면이었다는 듯,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비뚤어져 보였다.
루벨라가 사라진 장소를 한참이나 응시하던 그는, 곧 발을 돌려 대신전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스울. 왕국에서 가장 거대한 광산 도시로, 왕국에서 소비하는 철의 50% 이상을 생산하는 이루스 철광을 끼고 있는 도시다.
아침부터 일터로 향하는 광부들의 움직임이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등불 하나에 의지한 채 한 자루 곡괭이로 파고 들어가야 하는 어두컴컴한 광산은 더럽고 위험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훌륭하고 치열한 광부들의 전장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광산 일을 하는 스울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광부인 건 아니다.
그곳도 사람들이 사는 곳인 만큼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몬스터 퇴치사들이었다.
이 세계에 몬스터들의 위협을 받지 않는 곳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설사 일국의 수도라고 해도 몬스터의 위협은 존재한다. 당연히 스울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전략 물자인 철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것은 국가로서도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왕국은 보통 계절마다, 여건이 안 돼도 최소한 1년의 두 번 정도는 도시 근처에서 대규모 몬스터 소탕 작전을 벌였다.
때문에 스울은 여타의 도시 및 마을보다는 몬스터들에게서 안전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일. 위협이 완전히 가라앉는 건 아니다. 그건 이 세상에서 몬스터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왕국은 보완제도를 뒀다. 그게 바로 몬스터 퇴치사다.
몬스터들을 잡아오면 일정 금액을 주는 심플하기 이를 데 없는 제도. 하지만 그 효과는 제법 괜찮았다.
왕국에서 작정하고 몬스터들을 퇴치하는 정도의 효과는 없었지만, 적어도 다음 정벌 때까지 몬스터의 증가를 억제하는 정도의 효과는 있었다.
무엇보다 정규 병력을 움직이는 것보다는 훨씬 저렴했다.
왕국에서 주는 보상금도 제법 쏠쏠한데다가 몬스터의 사체는 돈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적절한 수익을 만들 수 있는 그 일엔 제법 잡다한 사람들이 모였다.
어떤 이는 은퇴한 용병이었고, 어떤 이는 여행자금을 모으기 위한 모험가였으며, 어떤 이는 빚을 갚기 위한 농민이었다.
하지만 그 누가 됐건 몬스터를 퇴치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몬스터 퇴치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한테는 최적의 일이란 거야.”
지면 위를 뚫고 나온 굵은 나무뿌리에 앉아, 나무 몸체에 등을 기대고 지크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한스는 대꾸를 할 겨를조차 없었다.
끄에에에엑!
오크가 괴성을 지른다. 어디서 얻었는지 녹슨 도끼를 붕붕 휘두르는 기세가 제법 매섭다.
코를 찌르는 악취는 아까부터 절찬리 한스의 코를 괴롭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한스는 철저하게 오크의 행동을 주시했다.
규칙도 질서도 없이 그저 힘에만 맡겨 붕붕 휘두르는 도끼라도 맞는다면 치명상이다.
오오오!
녀석이 달려들었다. 반쯤 썩은 자루를 두 손으로 힘껏 쥐고 한스의 두개골을 부수기 위해 내려쳤다.
“흡!”
조용하던 한스의 움직임이 급격해졌다. 발을 크게 디디고 들고 있던 검을 비스듬히 올렸다.
‘네가 아무리 근력 훈련을 하고 마력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래봤자 초짜다. 오크의 힘에는 대적하지 못해. 반드시 녀석들의 무기는 빗겨 막아 힘을 흘려.’
지크의 조언이 떠오른다. 지금껏 받은 고된 훈련과 목숨을 건 실전으로 인해 익숙해진 몸이 조언에 따라 스스로 움직였다.
카앙!
녹슨 도끼날과 검신이 맞부딪쳤다.
“크윽!”
오크의 강한 힘에 한스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스는 검을 놓지 않았다.
끼기기기긱!
도끼날이 비스듬히 세운 검날을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오크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흐아아아앗!”
커다란 기합. 한스의 팔뚝이 불끈 솟았다. 발을 내딛어 오크의 옆으로 한 걸음. 검은 스치듯 도끼날을 미끄러져 따라왔다.
후웅!
막고 있던 도끼날이 사라지자 검이 거칠 것 없다는 듯 훌륭한 반원을 그린다.
서걱!
검날이 오크의 목을 파고들었다.
꾸드득!
검은 오크의 단단한 목뼈를 잘라내지 못하고 목 절반쯤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이것도 익숙했다.
한스는 급히 몸을 옆으로 던지며 검을 빼냈다.
후웅!
그가 있던 자리로 도끼가 지나갔다.
‘독한 자식들!’
사람이라면 목이 반쯤 잘리는 경험을 한다면 패닉에 빠져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할 텐데, 이놈의 오크는 목이 잘리든 말든 어김없이 도끼를 날려왔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때는 정말 죽을 뻔했다.
하지만 한스는 그 위기를 훌륭한 경험으로 삼아 오크를 상대할 수 있었다.
끄륵!
오크의 목에서 피가 역류하는 모습이 보인다. 누가 봐도 치명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크는 덤벼들었다.
반쯤 덜렁거리는 목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 다른 손으로 도끼를 쳐드는 모습에 한스는 질려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터프한 오크라도 그 이상을 버틸 수는 없었다.
풀썩!
오크는 몇 걸음 옮기지 못하고 땅바닥에 엎어졌다.
한스는 쓰러진 오크에게 조심히 다가갔다.
푸욱!
확인사살로 머리를 찔렀다. 오크의 몸뚱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끝났다. 한스는 겨우 긴장을 놓았다.
“끝났냐?”
지루한 듯 하품을 하며 묻는 지크의 모습이 그렇게 얄미울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가까운 폭력은 무서운 법.
“네.”
한스는 힘없이 대답했다.
앉아 있던 나무뿌리에서 일어난 지크는 껄렁대며 오크의 사체 옆으로 걸어갔다.
그대로 사체를 들어 올렸다. 2m는 되는 것 같은 오크의 거체가 솜털처럼 들렸다.
그들과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썰매 하나가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오크의 시체 다섯 구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털썩!
지크가 내려놓음으로서 한 구가 더 추가됐다.
“이쯤 하면 됐다. 이제 돌아가자.”
한스가 기다려 온 말이 떨어졌다.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넵!”
지금까지의 목소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한스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