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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35화 (35/628)

제35화

포르티의 사건이 대충 마무리될 즈음. 루벨라와 와이그는 총단에 귀환했다.

오랜 세월동안 카르위먼의 총단 노릇을 해온 ‘대신전 유라스’는 언제 봐도 카르나의 신성한 축복에 가득 둘러싸인 것 같았다.

“여기도 오랜만이네요!”

그곳은 루벨라에게 고향이나 다를 바 없는 곳이다. 밖에서 고생을 하고 고향에 돌아온 탕아처럼 루벨라는 오랜만에 느끼는 고향의 향수에 젖어들었다.

와이그는 루벨라가 잠시 귀환을 즐기며 감상에 젖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루벨라가 이번에 겪은 사건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작은 사치 정도는 충분히 누릴 권리가 있었다.

둘은 새하얀 계단을 올라 유라스로 들어갔다. 둘을 알아 본 신관과 성기사들이 목례를 하며 지나갔다. 둘도 그들에게 마주 고개를 숙였다.

바로 교황에게 보고를 하려 한 두 사람이었지만, 현재 교황은 몇몇 대신관들과 회의를 하는 중이라는 말에 뒤로 돌아 나왔다.

“얼마나 걸릴까요?”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습니다. 정기 회의니, 언제나 끝나는 시간에 끝나겠지요.”

“그럼 잠시 안뜰에 가 봐도 될까요?”

“안 될 게 있겠습니까. 제가 에스코트해 드리죠, 레이디.”

익살스럽게 손을 내미는 와이그를 보며 루벨라가 꺄르르 웃었다. 그러면서도 귀부인 흉내를 내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들이 향한 곳은 대신전에서도 꽤 외진 곳에 있는 뜰이었다.

인적도 드물고 규모도 그리 크지 않다. 색색의 꽃들이 심어져 있었지만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소박한 맛이 느껴졌다. 특색이라고 해 봐야 뜰 중앙에 있는 작은 분수 정도.

하지만 루벨라는 이 뜰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부터 우울한 일이 있으면 이 뜰에 와 마음을 달랬다. 자기만의 조그마한 추억의 장소.

“어머, 이게 누구야?”

그런데 요 근래 이 추억의 장소를 더럽히는 인간이 있었다.

루벨라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고 와이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랜만이네, 루벨라.”

“…그래. 오랜만이야, 윈드네.”

루벨라가 마주 인사를 했지만, 놀랍게도 그녀의 어조에는 탐탁지 않아 하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루벨라의 성정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루벨라 님. 그리고 와이그 님.”

윈드네의 뒤에 있던 중년의 남성이 인사를 해 왔다. 새하얀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있어서 누가 봐도 성기사라고 알 수 있는 인물이었다.

“네, 오랜만이에요, 다이너 님.”

“오랜만이군.”

윈스틴 다이너. 와이그와 똑같이 성녀 후보를 호위하고 다니는 성기사였다. 그런 그와 동행하고 있는 윈드네의 신분은 뻔했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에 봬요, 와이그 님.”

첼시 윈드네.

카르위먼의 성녀 자리를 두고 루벨라와 경쟁하고 있는, 또 다른 성녀 후보.

하지만 와이그는 그녀가 루벨라의 경쟁자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능력도 마음도 천한 것 같으니.’

아무리 도살자니, 킬링 머신이니 하는 살벌한 별명이 붙었다고 해도 와이그는 독실한 카르위먼의 신도다. 악인들에게 엄격하고 잔인할 뿐, 그 성정은 깨끗하다.

그런 그가 욕설에 가까운 평가를 내리는 건 무척이나 의외인 일이었다.

그러나 와이그는 그 평가를 수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카르위먼의 성녀 후보를 뽑는 기준도 갈 때까지 가버렸어.’

그가 생각하기로 윈드네는 성녀는커녕 성녀 후보의 자격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한 자였다.

“있지. 이번에 고생 많이 하고 왔다며?”

역시나 왔다. 간악하게 걱정하는 척하고 있지만 루벨라와 와이그는 알았다.

그 속내는 루벨라의 고생을 무척이나 기꺼워하고 있다는 것을.

“무척이나 힘들었겠다. 거지꼴로 다니고 그랬다며?”

“맞아.”

“어쩜, 대단해라. 나 같은 사람은 그런 꼴을 겪느니 그냥 목숨을 끊었을 거야. 대단한 끈기네.”

“그래?”

“그래. 게다가 이번엔 밸리드의 계략에 휘말린 거라지? 나는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봐 걱정이야. 성녀 후보씩이나 돼서 밸리드의 계략에 빠진다고 말이야.”

“그래. 걱정 고마워.”

루벨라는 계속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그게 마음에 안 든 것일까. 윈드네의 눈꼬리가 조금 솟아올랐다.

“그런데 정말로 눈치 못 챘어? 아무리 밸리드 녀석들이 꽁꽁 숨었더라도 카르위먼의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파악은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아?”

그러다 윈드네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미안해. 딱히 이번 일이 네 탓이라는 뜻은 아니었어. 그저 걱정돼서 그래. 내 마음 알지?”

그리고 윈드네는 와이그를 보면서 눈웃음쳤다.

“와이그 님에게도 사과드려요. 누가 악감정 갖고 들으면 제가 두 사람을 모욕하는 것처럼 들리겠어요.”

‘들리는 게 아니라 그런 의도겠지.’

와이그는 스산하게 윈드네를 바라봤다.

아집과 열등감에 똘똘 뭉쳐서 가장 성녀에 가까운 루벨라를 적대시하는 자가 그녀다. 언제나 루벨라를 만나면 이런 식으로 루벨라를 위하는 척하며 깎아 내리곤 했다.

‘배짱만은 두둑하다만.’

아무리 성녀 후보라는 입장 때문에 와이그가 밸리드 다루는 것처럼 단칼에 베어버리진 못한다지만, 카르위먼 최고, 최강의 성기사인 그에게 이런 식으로 나댈 수 있는 이도 많지 않다.

‘하긴, 나도 원망의 대상일 테니.’

루벨라가 성녀에 가장 가까운 자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에는 능력, 심성 같은 이유도 있지만 와이그가 스스로 그녀의 호위기사를 자청한 이유도 크다.

‘그래서 자신의 성기사로 저놈을 뽑은 걸 테고.’

윈스틴 다이너. 그에 대한 와이그의 평가는 심플했다.

바로 윈드네의 성기사 버전.

‘질투의 대상은 나고 말이야.’

연배도 경험도 공적도 한참을 떨어지는 인간이 자신을 질투하는 모습이 어처구니없다. 어떻게 보면 윈드네보다도 더한 인간이었다.

‘아주 끼리끼리 잘 모였어.’

평소라면 루벨라는 우물쭈물하며 대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와이그가 루벨라에게 유일하게 가졌던 불만이 바로 그 여린 심성이 아니었던가.

루벨라가 지크에게 털어 놓은 고민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 정도로 루벨라는 이 일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평소라면 와이그가 그만 하라며 끼어들고, 거기에 다이너까지 끼어들어 작은 소동이 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와이그는 방관했다. 아니, 아예 팔짱까지 끼었다.

“맞아. 설마 네가 나를 모욕하려고 그런 말을 했겠어?”

언제나 입술을 지그시 물고 묵묵히 자신의 말을 듣기만 하던 루벨라가 끄떡도 하지 않고, 오히려 담백하게 대꾸까지 하자 윈드네가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루벨라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만약 네가 나를 모욕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거야.”

루벨라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성녀 후보에 더 가까운 나를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말이야.”

윈드네의 얼굴이 굳었다.

오늘은 웬일인지 완전히 방관자세로 임하고 있는 와이그를 은근슬쩍 견제하고 있던 다이너도 놀라 루벨라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렇게 열등감에 찌든 인간이 남을 깎아 내려 희열을 느끼는 거 같은 저열한 짓을, 네가 할 리 없잖아? 그러고 보니 우리 카르위먼에도 그런 인간이 있다며? 아닌 척하며 남을 헐뜯다니. 밸리드 같은 짓을 하는 인간이 카르위먼에도 있다니 난 참 마음이 슬퍼.”

새빨갛다. 루벨라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윈드네의 얼굴에 피가 올랐다.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도 같았다. 그러나 루벨라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윈드네는 아니잖아? 아닌 척하며 남을 모욕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나는 너 같은 친구를 둬서 정말로 다행이야.”

‘이건 기대 이상인데?’

평소와는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 아닌가.

이번의 경험이 경험인지라 제법 강단 있게 대응하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루벨라가 이렇게 잘 빈정거릴 수 있을 줄도 몰랐다.

하지만 효과는 발군이었다. 윈드네의 쌔액, 쌔액 거리는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이 차 어쩔 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윈드네가 루벨라를 노려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시선이 꺼려졌다.

하지만 루벨라는 스스로가 놀라울 정도로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 따위, 수드의 독기 어린 시선과 그로팀의 살기 어린 저주에 비하면 귀여울 따름이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워.”

윈드네가 입을 열었다. 메마른 목소리가 그녀의 기분을 대변했다.

언제나 자신의 시선에 기죽어 고개를 숙이던, 스트레스 해소용 물건이 감히 자신에게 대들었다.

머릿속에서 열이 뻗쳤다. 어떻게든 저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었다.

“그나저나 너 좀 변한 것 같아. 이번 여행에서 뭔가 얻은 게 있는 거니? 나한테도 가르쳐 주지 않겠어?”

윈드네가 웃었다. 비열하게 그리고 음험하게.

“너를 지키다가 죽은 성기사들을 보며 배운 것 같아서 말이야. 그 희생 속에서 배운 건, 분명 가치 있는 것이겠지?”

윈드네가 감탄했다. 아니, 감탄한 척했다.

와이그의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지금 윈드네는 루벨라를 모욕하기 위해 죽어간 성기사들까지 끄집어냈다.

도가 지나치다. 분명하게 선을 넘었다. 평소 윈드네가 하는 짓을 방관하던 다이너조차 일순 당황할 정도였다.

한소리 안 할 수가 없다. 그가 입을 열어 노성을 뿜어내려 할 때였다.

짜악!

깨끗하고 맑은, 와이그의 마음이 확 트이는 소리가 들렸다.

“…너!

붉어진 뺨을 감싸며 윈드네가 분노했다.

하지만 방금 그녀의 뺨을 후려갈긴 루벨라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싸늘하게 그녀를 노려봤다.

“무슨 짓…!”

다이너가 루벨라에게 화를 내려 했다. 하지만 먼저 그 앞을 가로막는 팔이 있었다.

“가만히 있어.”

와이그였다.

“가만히? 지금 모습을 보고…!”

“성녀 후보끼리의 다툼은 본인들이 해결한다. 틈만 나면 네가 말하던 것 아니던가?”

다이너가 이를 갈며 와이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가 이를 갈든 말든 와이그는 상관없었다. 솔직히 다이너 따위는 그에게 길가에 돌아다니는 개미만도 못한 존재였다.

두 사람이 대치 상태에 들어갔을 때, 두 성녀 후보끼리도 움직임이 있었다.

휙!

윈드네의 손이 날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루벨라에게 잡혔다.

“이익! 이거 놔!”

윈드네가 손을 빼내려 힘을 줬지만 쉽지 않았다. 꾸준히 신체 단련을 하는 루벨라와는 달리 윈드네는 신체 단련 따위 하지 않았다.

“사과해.”

“뭐?”

“돌아가신 분들에게 사과하라고.”

서릿발 같은 음성이 그녀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보여줬다.

“웃기지 마! 내가 그딴 걸 할…!”

짝!

다시 한번 상쾌한 소리가 울렸다.

“너…!”

이번에 다른 쪽 볼이다. 설마 한 대를 더 때릴 줄은 몰랐다.

“너 같은 애가 욕할 수 있는 분들이 아니야. 이제 됐어. 너한테 사과를 요구한 내가 등신이지.”

루벨라가 욕을 했다.

루벨라가 행한 폭력에 이어, 사람들은 두 번째로 놀랐다.

“와이그 님. 가죠. 더 이상 상대할 필요가 없네요.”

잡고 있던 윈드네의 손을 거칠게 내팽개치고 루벨라는 등을 돌렸다.

얼얼한 양 뺨을 감싸고 루벨라의 등을 보던 윈드네가 빽 소리를 질렀다.

“너,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가만히 안 있으려면 어쩌려고?”

루벨라가 코웃음쳤다.

“어떻게? 여기 있는 일 다 알리려고? 네가 돌아가신 분들을 모욕한 사실까지?”

윈드네가 입을 다물었다.

평소 같지 않은 반응을 하는 루벨라에게 반발심이 일어 막말을 했지만, 그녀도 선을 넘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만약, 그 말을 다른 이들이 알았다간 어떻게 반응할지도.

“아니면 내 뒷담이라도 하려고? 네 이미지는 알고 있지? 너와 나. 사람들은 과연 누굴 믿을까?”

“…….”

“그래도 하겠다면 말리진 않겠어. 나도 과거에 있던 일까지 싹 끄집어내면 되니까. 난 소심해서 네가 예전에 한 말 전부 기억하고 있거든.”

윈드네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만약 루벨라의 말처럼 진실공방으로 정면으로 붙는다면 어떻게 될까.

윈드네에겐 분하게도 그녀가 승리할 기회는 없다시피 했다. 신뢰, 위상, 실력, 그 모든 것이 떨어지는 것이다.

“더 이상 할 말은 없는 것 같네.”

루벨라는 ‘쌩!’ 소리가 날 것 같이 몸을 돌리고 대신전 안으로 사라졌다. 그 뒤를 와이그가 어깨를 쭉 펴고 따랐다.

남은 건 빗속에 내팽겨진 패배견들처럼, 굴욕과 모욕감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불쌍한 영혼 둘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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