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이번에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 재수없는…아니, 꼴보기 싫은…아니, 웃는 얼굴에 침을 뱉고 싶은…아니, 그러니까….”
“됐어요. 그로팀을 말하는 거죠? 좋게 꾸미지 않아도 되니까 하고 싶은 말 하세요.”
이제 이런 말 정도는 말끔하게 패스해버린다.
와이그는 루벨라의 성장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성장해버린 게 아닐까싶은 걱정도 샘솟았다.
“그 그로팀을 쳐날린 건 제 개인적인 바람도 있었습니다. 전 밸리드를 싫어하거든요.”
“그 마음 이해해요.”
카르위먼의 사람으로서 수백 번 정도도 공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일을 한 저를 여러분은 영웅취급하고 있죠. 즉, 착한 일을 했다는 겁니다. 거기서 깨달았죠. ‘아, 나쁜 놈들을 짓밟는 것도 착한 일이구나’ 하고요.”
“…….”
루벨라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을 처단하는 건 분명 옳은 일이다.
하지만 해맑게 웃는 지크의 표정을 보면 긍정을 해야 할지 의문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어차피 나쁜 놈들이니, 그 놈들 엿먹이고 괴롭히는 것도 상관없기도 하고요.”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루벨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지크의 발언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긍정했다.
“맞는 말 같긴 하네요.”
지크의 극단적 폭론, 하지만 그럼에도 묘하게 맞는 그 깨달음을 흔쾌히 인정하는 것도, 카르위먼의 사람으로서 어떨까 싶었지만 루벨라는 지크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그녀는 지크란 개인의 존재에게 무척이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와이그가 조금 당황한 눈초리를 보내는 것도, 한스가 눈이 튀어나올 듯 놀라는 것도 부드럽게 흘려보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너무 과격한 생각이 아닌가 싶겠지만 당신이니까요. 티미 씨나 수드를 보고 그 사람의 정체성을 금방 파악해낸 지크 님이라면 정확한 판단을 내리실 수 있겠죠. 다만, 예전에 말씀드렸듯 폭력을 사용하실 때는 몇 번이나 더 숙고한 다음에 사용해주세요.”
“노력하죠.”
지크는 뿌듯했다. 자신이 생각한 착한 일을, 자그마치 미래의 성녀인 루벨라가 인정해준 것이다.
“혹시 무슨 고민 같은 게 있습니까? 혹시라도 제가 조언 같은 걸 드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때문이었다. 지크가 먼저 이런 말을 한 건.
가벼운 마음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루벨라가 잠시 고민하는 걸 보니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음, 이런 말씀 드리기는 부끄러운 일이지만요.”
머뭇대던 루벨라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놨다.
와이그는 이미 알고 있는 고민이었는지 루벨라가 말하는 것을 조용히 지켜봤다.
“물론 이제는 괜찮아요. 저도 제법 강해졌으니까요.”
그녀가 팔을 들어 올려 알통을 만들어 보인다.
당연히 튀어나오는 근육은 얼마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벼운 그 행동만으로도 그녀가 고민을 상당히 털어버렸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저 지크라면 더 좋은 조언을 주지 않을까 해서 말해본 것뿐이었다.
“흠,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네? 좋은 생각이요?”
“잠깐 귀좀 빌려주시죠.”
루벨라가 지크에게 귀를 내밀었다.
비밀스러운 모의를 하는 악당들같이, 지크는 조용히 루벨라에게 조언을 건넸다.
“…정말로 그래도 될까요?”
루벨라가 놀라 물었다. 그만큼 루벨라에게는 충격적인 방법이었다.
“어디까지나 전 조언을 했을 뿐입니다. 정하는 건 루벨라 님이죠.”
루벨라는 와이그의 눈치를 봤다.
귓속말을 했다지만 와이그가 못 들었을 리 없다. 와이그는 별다른 말없이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있는 걸 루벨라는 눈치챘다.
조금 과격하다고 생각하지만 와이그는 마음에 든 것이 분명했다.
‘하긴, 와이그 님은 원래 내가 강단 있게 나가는 걸 좋아하셨지.’
“생각해볼게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지크는 배낭을 고쳐 멨다.
“그럼 이제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아, 입구까지 배웅해드릴게요.”
네 명은 신전의 입구를 향해 걸었다.
“다음은 어디로 가실 건가요?”
“일단 가장 가까운 마을로 갈 생각입니다. 그 이후는 차근차근 생각해봐야겠죠.”
“저희도 곧 총단으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이것저것 보고도 해야 하고, 곧 성녀 후보끼리 모이는 행사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제 조언을 실행할 때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군요.”
“그렇네요. 제가 조언을 받아들인다면의 얘기지만요.”
그렇게 얘기를 나누며 신전의 입구에 나왔을 때였다.
“아!”
입구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일어섰다.
혹시 적이 아닐까. 와이그가 긴장했다. 하지만 그를 지크가 말렸다.
“괜찮습니다. 아는 사람들입니다.”
와이그가 한 걸음 물러섰다.
“어머, 티미 씨가 아닌가요?”
루벨라도 뒤늦게 그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는 예전, 수드에게 동생의 생기를 빼앗겼던 사내였다.
둘을 보자마자 그는 바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두 분!”
“안녕하세요, 티미 씨. 여기는 어쩐 일이신가요?”
혹시 또 뭔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을까.
티미에게는 기본적으로 상당한 죄책감을 갖고 있는 루벨라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티미의 얼굴은 밝았다. 나쁜 일로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두 분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 왔습니다.”
“감사 인사요?”
“이리 와.”
티미가 옆을 향해서 손짓했다. 그러고 보니 티미의 옆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쭈뼛거리는 그를 티미는 옷자락을 잡아 더더욱 끌어당겼다.
“예전에 봤던 동생이로군.”
“아!”
지크의 말에 루벨라도 눈치챘다.
“회복됐군요.”
“네! 시장 저택에서 커다란 싸움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회복됐습니다!”
밸르의 의식을 역이용한 마법진이 효과가 있었다는 뜻이다.
“다행이네요!”
루벨라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마음속에 있던 죄책감이 한결 덜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괜히 루벨라 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아뇨. 그때는 앞뒤 안 가리고 티미 님을 나쁜 사람으로 본 제 잘못이에요.”
“맞아. 그 때는 루벨라 님이 잘못을 했지.”
지크의 핀잔에 루벨라가 앓는 소리를 냈다. 티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 조지. 인사해. 너를 다시 회복시켜 주신 분들이야.”
“가, 감사합니다.”
조지라 불린 티미의 동생이 쭈뼛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 인사를 하려고 기다린 거야?”
“네.”
“설마 우리가 나올 때까지 계속 기다린 건 아니지?”
“생각 같아서는 그러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제 동생이 막 병석에서 일어난 터라 오래 기다리긴 좀 그랬어요. 전 일도 해야 하고요. 그래서 매일 나오긴 했지만 오래 기다리진 못했어요.”
티미가 미안한 듯 말한다. 하지만 한스와 루벨라, 와이그는 물론 지크마저 그런 티미를 감탄스럽게 쳐다봤다.
“그래도 이렇게 여러분과 만났으니 다행히 헛수고는 아니었네요.”
티미가 순박하게 웃었다.
“아, 그만 가봐야겠어요. 슬슬 일 나갈 시간이거든요.”
급히 말한 티미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제 동생을 구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에게 정말로 카르나 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기도할게요.”
그리고 티미는 서둘러 신전을 떠났다. 조지도 다시 한번 지크 일행에게 고개를 숙이고 형을 따라나섰다.
“정말로 좋은 분이네요.”
“그렇습니다.”
루벨라의 말에 대꾸하며 지크는 예전 티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자기를 처음으로 순수하게 도와준 사람이 나라고 했던가.’
타인의 도움을 받지 못했던 건 회귀 전 지크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내가 강해지기 전에 누군가 나를 도와줬다면, 나도 마왕이라 불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까?’
회귀 전 그가 걸어간 길에 후회는 전혀 없지만, 그런 생각이 조금 고개를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 * *
지크와 한스가 신전을 떠났다. 루벨라와 와이그는 신전의 입구에 서서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걸 기다렸다.
둘의 모습이 어느 정도 멀어졌다싶을 때, 와이그가 입을 열었다.
“정말로 특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게요.”
“정체가 뭘까요?”
루벨라가 와이그를 쳐다봤다.
“뭔가 이상한 점이 있나요?”
“많죠. 그 나이답지 않은 실력에, 누구도 알지 못했던 마법진을 알고 있고. 게다가 카르위먼의 비상 신호도 알고 있더군요.”
“비상 신호를요?”
“숲에서 몬스터 퇴치를 하고 있는데, 누가 카르위먼의 비상 신호를 올리더군요. 다가가 보니 지크 님의 종인 한스 님이었습니다. 루벨라 님의 얘기를 그때 들었고요. 나중에 카르위먼의 비상 신호를 어찌 알았냐고 물어 보니 지크 님에게 들었다더군요.”
“…정말로 여러 방면의 지식을 알고 계시네요.”
와이그는 팔짱을 끼었다.
“다행히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도 하고요. 하지만 그 지식들의 출처가 궁금하긴 하군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는데, 지크 님 스스로가 귀족 출신이라고 하더군요.”
“…귀족이요?”
와이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울린 시간이 길진 않지만 지금껏 보아온 지크의 행동거지는 전혀 귀족답지 않았다. 오히려 뒷골목의 양아치들과 비슷했다.
귀족 출신이라면 어느 정도 귀족적인 행동이 몸에 배어 있을 텐데.
“스틸월 백작가의 지크 스틸월을 찾아보라더군요.”
“지크 스틸월…? 아니, 스틸월 백작가? 제가 아는 그 스틸월 백작가가 맞습니까? 왕국의 강철벽이라는 그?”
“네.”
그렇게 구체적으로 말했다면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한번 알아보는 것도 재밌겠군요.”
“뭔가 알게 되면 저한테도 꼭 알려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슬슬 우리도 돌아갈 준비를 하죠. 돌아가신 분들을 어서 추서하고 싶으니까요.”
그로팀의 말처럼 정말로 전부 갈아서 물고기밥으로 던져준 것인지, 아니면 언데드가 되어 지크나 와이그의 손에 죽었는지, 루벨라를 보호하기 위해 죽은 성기사들의 시체는 끝내 찾지 못했다.
그들을 생각하면 루벨라는 울적하기만 했다.
“그들은 분명 카르나 님의 품에서 루벨라 님이 건강하게 지내시는 걸 상냥하게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렇겠죠?”
마치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 루벨라는 하늘을 쳐다봤다.
“자세한 보고도 올려야죠. 특히 이번에 얻은 ‘도시 제물 의식’의 방식과 마법진은 큰 힘이 될 겁니다.”
밸리드의 음모의 방식과, 그 음모를 막고 그들의 의식을 방해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게다가 만약 그 진을 연구한다면 밸리드의 힘을 더욱 효율적으로 막는 힘을 개발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만, 지크 님의 정보는 조금 숨겨야겠습니다.”
“네? 지크 님의 공을 줄이자는 건가요?”
루벨라가 경악했다.
마치 믿고 따르던 부모님이 흉악한 범죄자임을 깨달은 아이 같았다.
와이그도 그걸 깨닫고 얼른 변명했다.
“그분의 공을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의식을 무효화하는 마법진을 가르쳐줬다는 사실 정도는 숨겨야죠. 만약 그 사실마저 퍼질 경우, 지크 님은 큰 위험에 처하게 되실 겁니다. 밸리드가 눈에 불을 켜고 쫓을 테니까요.”
그 진이 어떤 진인지, 그리고 출처가 어디인지를 알기 위해 밸리드의 제1 표적이 될 게 뻔했다.
루벨라는 등허리가 섬뜩해지는 것 같았다.
“알려지면 위험하겠네요.”
“일단 이 정보는 교황님과 몇몇 고위 신관님에게만 알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적절한 정보를 조작해 우연히 찾아낸 걸로 할지, 아니면 사실대로 지크 님에게 받은 걸 공표할지 정하기로 하죠. 물론 이건 지크 님과도 이야기가 끝난 상황입니다.”
정당한 이유도 있고 지크의 동의도 있었다면 더 이상 루벨라가 할 말은 없다.
“충분히 납득할 만하네요. 그럼 어서 총단으로 돌아가서 정보를 넘기죠.”
“괜찮겠습니까?”
지금껏 돌아가자고 얘기를 하던 와이그가 뜬금없이 그런 말을 꺼냈다.
하지만 거기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아까 루벨라가 지크에게 조언을 구한 이유도 그것이다.
루벨라가 미소지었다. 흐릿하긴 하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자신감은 분명히 전해졌다.
“괜찮아요. 지크 님에게 든든한 조언도 들었으니까요.”
“그거 볼 만하겠군요. 그럼 돌아갈 준비를 끝내죠.”
두 사람은 지크와 한스가 사라진 거리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신전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