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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30화 (30/628)
  • 제30화

    ‘자, 경고는 했고.’

    지크는 주위를 둘러봤다.

    언데드와 몬스터들이 우글우글 몰려온다. 루벨라를 지키며 이 자리를 사수해야 하는 상황.

    ‘쉽지.’

    지크가 바람처럼 움직였다.

    카앙! 서걱! 카앙! 서걱!

    자신에게 오는 공격을 피하고 루벨라에게 가는 공격을 쳐내며 언데드와 몬스터의 빈틈을 찾아 검을 쑤셔 넣는다.

    파상공세를 펼치지만, 정작 쓰러지는 것도 언데드와 몬스터들이었다.

    물론 루벨라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적을 쓰러뜨리는 빈도는 늦어졌다.

    얼핏 보면 그로팀 쪽이 유리해진 상황.

    하지만 지크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고 그에 비해 그로팀의 표정은 점점 썩어들어갔다.

    “자, 어쩔 거냐! 빨리 날 쓰러뜨리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벨리 와이그가 온다고!”

    “닥쳐라!”

    “이건 순수하게 너를 위한 충고야. 후퇴 시간 잘못 재면 너 정말로 큰일 난다?”

    “닥치라고 했다!”

    그로팀이 발작적으로 반응했다. 초조감이 점점 그를 옭아맸다.

    ‘어쩔 수 없나.’

    그로팀은 마음을 굳히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건 ‘열쇠’라 불렸던 책이었다.

    지크의 검에 베여나간 페이지는 이미 깔끔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그로팀이 책을 펴자 음울한 기운이 책에서 슬금슬금 뻗어나왔다.

    끼익! 끼익! 키키키키끼이익!

    괴성이 울려 퍼졌다. 고문당하는 사람의 비명 같기도, 손톱으로 철판을 긁는 소리 같기도, 저주를 행하는 유령의 소리 같기도 하다.

    꾸워어어!

    끄엑! 끄엑!

    따다다닥!

    언데드와 몬스터들이 반응하며 같이 괴성을 질렀다. 마치 책에서 나온 소리에 호응을 하는 것 같다. 소름끼치도록 기괴한 광경이었다.

    “인정하마! 네놈은 무척이나 짜증나는 놈이다. 카르위먼의 놈들보다도 더! 갑자기 튀어나온 놈한테 이렇게 방해를 받을 줄은 몰랐어!”

    “어라? 칭찬이 과한 거 아냐?”

    밸리드의 신자가 앙숙인 카르위먼보다 더 질색하는 것은 극히 희귀한 일이다.

    “마음대로 지껄여라. 이젠 그 입을 놀릴 수도 없을 테니까!”

    그로팀이 책을 들어올렸다. 스스로의 의지가 있는 듯 책은 스스로 책장을 넘겼다.

    “그걸 쓰게? 열쇠의 힘을 쓰면 진짜로 의식이 늦춰지지 않냐?”

    “조금! 아주 조금이다! 네놈을 쓰러뜨릴 딱 한 방 정도라면 상관없다!”

    “제대로 쓸 수는 있고? 네가 ‘열쇠’용으로 조정한 시장은 나한테 죽었잖아. 네가 쓸 수 있는 힘은 별 대단한 힘이 아닐 텐데?”

    “네놈을 죽이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루벨라는? 귀하디귀한 루벨라까지 휩쓸릴 수 있다고.”

    “그럼 어쩔 수 없지.”

    상황이 여의치 않자 결국 그로팀도 루벨라를 반쯤 포기한 모양이었다.

    지크는 혀를 찼다.

    “아쉽네.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다면 냅다 방패로 쓰려고 했는데.”

    “그런 건 제발 제가 못 듣도록 속으로만 생각하라고요!”

    이제는 루벨라도 제법 지크에게 사양이 없어진 모양이다. 그녀가 빽 소리를 질렀다.

    쿠르르릉!

    호수에서 물기둥이 솟았다. 건물 몇 채 정도는 쉽게 삼킬 수 있을 정도로 물기둥은 거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것이 커다란 뱀처럼 몸을 줄기줄기 꼰다. 뱀으로 치면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지면, 지크와 루벨라가 있는 쪽을 향했다.

    언데드와 몬스터들이 갑자기 무턱대고 밀려들기 시작했다. 상처 따위는 아랑곳없이, 연계도 협력도 하지 않고 그저 몸을 무작정 들이밀었다.

    지크와 루벨라가 피하거나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이번에도 전 가만히 있으면 되죠?”

    위기의 순간이지만 의외로 루벨라는 차분했다. 지크가 자신을 두고 도망칠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확합니다. 단, 이번에는 회복 마법 위주로 준비해주세요.”

    “걱정 마세요. 그건 제 특기니까요.”

    지크의 검이 변했다. 지금까지 수세적인 태도를 고수해서 방어와 요격에 중점을 뒀다면, 지금의 검은 거칠고 날카로워 공격적이었다.

    서걱! 콰직!

    아까보다 더 섬뜩하게 휘둘러지는 검은 영향권 안에 있는 모든 걸 가르고 부쉈다. 몸통으로 억지로 밀고 들어오던 언데드와 몬스터들의 벽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하지만 스타일을 공격적으로 바꾼 만큼 방어에 빈틈이 생긴 건 어쩔 수 없었다.

    푹! 콰직!

    공격 몇 개가 지크의 방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것들은 지크의 빈약한 방어구를 뚫고 혹은 박살내고 지크의 몸에 상처를 냈다.

    몸을 슬쩍슬쩍 틀어 치명상을 피했지만 군데군데 꽤 깊은 상처도 생겼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지크는 루벨라에게 향하는 공격만은 전부 튕겨냈다.

    물론 지크의 몸에 상처를 낸 녀석들은 바로 지크의 검에 목이 날아가야 했다.

    “회복시킬게요!”

    지크의 상처가 순식간에 없어졌다. 간간이 걸린 독 같은 상태 이상도 완벽하게 회복했다. 과연 대단한 성력이었다.

    루벨라의 지원에 힘입어 지크는 언데드, 몬스터 무리를 어느 정도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로팀이 물기둥을 쏘아낸 건 그 때였다.

    “죽어어어!”

    퍼어엉!

    가공할 위력의 수압이 모든걸 찢고 뭉개기 위해 다가온다. 지크는 물기둥을 올려다봤다.

    스윽!

    억지로 만들어낸, 그들과 몬스터 포위망 사이의 공간에서 지크는 발을 움직여 자세를 잡았다. 검을 뒤로 쭈욱 빼고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우우웅!

    검이 울리며 마력이 검신 주변을 소용돌이처럼 회전한다. 지크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물기둥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지크가 있는 곳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와 반대로 지크는 물기둥이 날아오는 허공을 향해 느릿하게 검을 찔러넣었다.

    파앙!

    깔끔한 파공음. 대기가 일그러지며 무형의 기세가 쭈욱 쏘아졌다.

    물기둥과 찌르기가 충돌한다.

    그리고 찌르기는 물기둥에 삼켜졌다.

    쿠우우우웅!

    땅이 울렸다. 그 질량과 수압으로 대지를 후려친 물기둥의 위력은 굉장했다. 휩쓸린 언데드와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전멸해버렸을 정도였다.

    “후우!”

    그로팀이 숨을 몰아쉬었다. 인상을 팍 찡그리고 ‘열쇠’를 내려다봤다.

    ‘빌어먹을! 역시 소모가 너무 커!’

    지크의 말대로 시장이 죽은 것이 너무 뼈아팠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면…!’

    빌어먹을 놈이 뭔가를 한 모양이지만 그것도 헛된 게 분명했다. 그의 권능이 아무런 장애도 없이 전투지점을 삼켜버리지 않았는가.

    ‘그래도 그 녀석이 루벨라를 살리려고 노력했으면 그 년만은 숨이 붙어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된다면 그의 완벽한 승리다.

    ‘성녀 후보를 사로잡고 벨리 와이그마저 의식에 휘말리게 해서 죽여버린다면, 교단에서 나의 지위는 누구보다 탄탄해진다.’

    상상만으로도 달콤한 미래였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너무 일렀다.

    “이게 끝? 역시 생선 대가리를 신이랍시고 모시는 놈들이라니까.”

    뻔뻔하고 재수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로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어, 어떻게?”

    물기둥이 완전히 가라앉은 후, 사방은 완전히 물바다였다. 권능에 휘말린 언데드와 몬스터의 잔해가 홍수에 쓸려내려간 나무토막들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로팀의 목표였던 지크와 루벨라만은 멀쩡했다.

    물 때문에 흠뻑 젖어 있긴 했지만 그게 전부. 부상은커녕 생채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내 권능에 삼켜졌을 텐데…!”

    “아, 그거?”

    젖은 옷을 쥐어짜 물을 빼내던 지크가 대답했다.

    “질량과 수압으로 찍어누르는 공격. 나쁘지 않지. 근데 아무리 커다란 물기둥이라고 해도 우리에게 직접 닿는 물 면적은 얼마 안 되거든. 거기만 뚫어서 수압을 분산시키면, 우리가 맞는 건 그냥 조금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수일 뿐이야.”

    지크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는 사람도 있지만.”

    물에 빠진 생쥐꼴을 한 루벨라가 기침을 계속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익사 직전에서 간신히 구출된 사람 같았다.

    “괜찮아요?”

    “…기분 안 좋아요. 이거 저 작자가 불러낸 물이잖아요. 물 안에 밸르 냄새가 지독해요.”

    “아, 그거 안 됐네요.”

    지크는 유감을 표했다.

    “웃기지 마! 그 권능에 담긴 힘이 얼마였는데, 고작 그런 작은 힘에 흩어질 수가 있단 말이냐!”

    “쯧쯧쯧, 이 자식은 진짜 아무것도 모르네.”

    지크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런 걸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기술인 거야, 멍청아.”

    그것도 미래에 올 혼란 속에서 최강자로 군림하던 자의 기술.

    “자, 이제 어쩔래? 네 그 대단한 권능 때문에 네 부하들도 싹 쓸려갔는데.”

    “고작 권능 하나 막았다고 나대지 마라! ‘열쇠’의 힘이 고작 이 정도…!”

    “아, 이제 됐어.”

    지크가 잔잔하게 그로팀의 말을 끊었다.

    “너 끝났어.”

    “무슨 헛소…!”

    콰아앙!

    폭음이 울린다. 아까와는 다르게, 바로 지척에서.

    낡아 버려진 풍차가 숨을 몰아쉬듯 느릿하게 회전하는 것처럼 그로팀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시장 저택의 담벼락. 파괴되어 젖은 잔해만이 점점이 흩어진 곳에 그가 있었다.

    보통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반백의 머리는 어수선했고 몸에는 온갖 피와 살점, 뼛조각이 묻어 있다. 스산하게 비치는 눈빛이 명부의 사신 같다.

    아니, 그로팀 입장에서는 사신이라고 표현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카르위먼 최강의 사내가 거기 있었다.

    “내가 말했잖냐. 후퇴시간 잘못 재면 큰일 난다고.”

    지크가 한껏 이죽였다.

    루벨라가 와이그를 보고 기뻐했다.

    “와이그 님!”

    “괜찮습니까, 루벨라 님.”

    와이그의 시선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진다. 아끼는 손녀딸을 보는 것 같다.

    루벨라는 마음속에서 뭔가 울컥하는 것 같았다.

    그가 사라진 후,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던가. 이번 사건을 통해 많이 성장한 루벨라였지만, 그래도 자신을 아껴주던 와이그의 앞에서는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흐른다. 손녀같이 아끼던 그녀의 눈물을 보는 순간, 와이그의 마지막 남은 인내심마저 날아갔다.

    “네노오오오옴!”

    와이그의 노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울던 루벨라마저 흠칫할 정도로 극도의 분노가 담긴 외침. 그 살기를 정면으로 받은 그로팀은 몇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났다.

    ‘우와, 더럽게 무섭네.’

    지크도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만큼 와이그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베, 벨리 와이그!”

    지금의 병력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둥, 의식에 휘말리게 할 거라는 둥 말은 잘 하더니 정작 벨리 와이그를 보자 그로팀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네놈이 밸리드의 그 개잡종놈이냐?”

    와이그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왔다.

    “빌어먹을 밸르 같은 걸 섬기는 쓰레기 자식이 도시를 제물로 바치려고 해? 거기에 감히 루벨라까지 건드려!”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밸르를 욕한 것에 분이 났는지 더 이상 기세에서 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그로팀이 마주 악을 써댔다.

    “아무리 ‘밸리드 도살자’인 너라도 ‘열쇠’를 갖고 있는 나를 이길 수 있을 성 싶더냐!”

    ‘우와, ‘타스니아 평원의 킬링 머신’ 전의 별명은 ‘밸리드 도살자’였어?’

    성기사란 작자가 어떻게 저렇게 살벌한 별명이 붙는 것인지.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퍼엉! 퍼엉! 퍼엉! 퍼엉!

    연못에서 이번엔 네 개의 물기둥이 솟았다. 덩치는 아까의 세 배 이상.

    꾸물꾸물 대는 그것들의 박력에 루벨라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죽어어어어엇!”

    발작하듯 외치는 그로팀. 그와 함께 물기둥이 와이그에게로 짓쳐들었다.

    와이그가 피하지 못하게 하려는 듯 물기둥들은 모두 다른 방향으로 제각각의 궤적을 그렸다.

    하지만 와이그는 피하지 않았다.

    “흥!”

    콧방귀를 끼고는 카르위먼의 표식이 새겨진 검을 치켜든다. 그리고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앙!

    순간, 와이그의 지척까지 파고들었던 물기둥들이 터져나갔다.

    와이그에게 덤벼들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사방으로 휘날리는 물줄기들. 그건 마치 마른하늘에 떨어지는 빗줄기 같았다.

    입을 벌리고 어버버 거리는 그로팀을 향해 와이그가 말했다.

    “끝이냐?”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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