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벨리 와이그?”
“와이그 님이요?”
루벨라와 그로팀의 목소리가 겹친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감정은 완전히 상반됐다.
루벨라가 환희와 기쁨에 휩싸인 것에 반해 그로팀은 당혹과 공포감에 휩싸였다.
“와이그? 벨리 와이그? 그 괴물 자식이 여기 있다고?”
곧 있을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 여러 강자들이 나타났지만 그들이 힘을 얻은 경위는 각자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평화 속에서도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아 혼란 초기부터 강했었고 어떤 이는 혼란 속에서 겪은 역경으로 강해졌다.
강대한 아이템을 얻어 순식간에 강자로 발돋움한 이도 있고 다른 존재에게 힘을 받아 강해진 자도 있었다.
혼란 속에 겪은 역경으로 강해진 대표격인 인물이 지크였던 것에 비해 와이그는 대표적인, 평화 속에서도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아 혼란 초기부터 강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평화 시기에도 그 강대한 힘으로 카르위먼의 적들을 말 그대로 분쇄하고 다녔다.
당연히 그 적 중에는 카르위먼과 앙숙인 밸리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로팀이 그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웃기지 마라! 그 괴물이 어떻게 여기 있단 말이냐!”
그로팀은 지크, 루벨라를 만난 이후 가장 당황했다. 그만큼 밸리드에게 와이그란 이름은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그 사람이 여기 루벨라 님의 호위기사 대장이야. 이 도시에 들어오기 전에 일이 생겨서 잠깐 빠졌던 거고. 다행히 그 임무가 이 근처에서 하는 임무라 사람 시켜서 얼른 불렀지.”
‘그러고 보니, 분명 지크 님은 와이그 님의 파견지를 물어본 적이 있었어!’
지크가 흘리듯 한 질문이라 별 생각없이 대꾸해줬던 걸, 루벨라는 떠올렸다.
“어, 언제 부른 거죠?
“한스 녀석에게 시킨 게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녀석에게 시킨 일이 그겁니다.”
“아!”
루벨라는 지크의 종을 떠올렸다.
‘이미 그때부터 와이그 님을 불러 올 생각이었던 거야?’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아무리 와이그 님이 총단이나 다른 주요 지부보다 더 가까이 계셨다고 해도 파견지까지의 거리도 꽤 멀었는데요? 어떻게 불러오신 거죠?”
“한스가 노력했죠.”
지크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게 노력으로 해결되는 일일까.
하지만 더 이상 질문을 할 겨를은 없었다. 그들을 포위한 언데드와 몬스터가 움직이고 있었다.
“흥, 상대가 그 벨리 와이그라도 이미 내 군세는 충분한 전력을 갖췄다. 차라리 잘 됐군. 이참에 성녀 후보와 같이 그놈의 목도 전리품으로 들고 가야겠어!”
그로팀이 호기롭게 외쳤다. 바깥 쪽 포위를 맡고 있는 군세가 폭음이 인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괜찮을까요?”
루벨라가 와이그를 걱정했다. 그가 대단한 성기사인 건 알지만, 그로팀이 이끄는 병력이 만만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크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이것보다 더한 지옥도 태연히 걸어나오는 인간한테 뭔 걱정이야.’
콰아아앙!
지크의 생각을 긍정하듯 다시 한번 터진 커다란 폭음이 주변을 울렸다. 폭발은 아까의 것보다 더 크고 가까웠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폭음이 터진 곳으로 향했다.
“과, 과연 벨리 와이그로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작 혼자…!”
콰아아아아앙!
이번의 폭발은 더더욱 가까웠다. 성력의 충격이 이곳까지 전달될 정도였다.
후두둑!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지크가 자신과 루벨라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들을 검집으로 툭, 툭 쳐냈다.
“…이건.”
그로팀이 떨어진 것들을 확인했다. 피가 흐르는 팔, 다리와 이곳저곳 금이 간 뼈. 언뜻 보면 참살된 인간들의 끔찍한 흔적 같다.
하지만 그건 인간이 아닌, 언데드와 몬스터들의 잔해였다.
“…….”
이것에는 그로팀도 놀랐는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콰앙! 콰앙! 콰앙!
연신 폭음이 울린다. 폭발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성력의 흐름 또한 가까워졌다.
“어때. 장난 아니지?”
지크가 보란 듯 얼굴을 기울이며 비웃었다. 그로팀의 입가가 씰룩였다.
얄미운 지크의 얼굴을 당장이라도 짓밟고 싶었지만, 점점 다가오는 폭발음과 성력의 파도는 그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
그로팀이 시선을 이리저리 던졌다. 폭음이 다가오는 쪽을 한 번, 자신의 남아 있는 군세를 한 번, 그리고 지크와 루벨라에게 한 번.
평생에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하듯 그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팼다.
하지만 그 행동은 길지 않았다. 돌아다니던 그로팀의 시선이 지크와 루벨라에게 꽂혔다.
“이제 정했냐?”
기다렸다 지쳤다는 듯, 지크가 건들거렸다.
“와이그 저놈이 아무리 대단한 인간이라고 해봤자 의식에 휘말리게 해버리면 끝이다.”
그로팀이 루벨라를 응시했다.
“일단 원래 챙기려 했던 전리품부터 챙겨야지.”
“하여간 전략의 전자도 모르는 놈이라니까. 이런 때는 잽싸게 몸을 빼야 하는 거야. 제들이 무슨 적을 앞에 두고 등을 보이면 안 된다는 기사 집단도 아니고. 오히려 바퀴벌레처럼 쫄래쫄래 도망다니면서 이딴 어이없는 짓이나 하는 겁쟁이들이 이젠 상황판단도 못 하네.”
“…피신이 늦어져 피해가 좀 더 늘어난다 해도 네놈만은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 결국 폭발했다. 그로팀에게서 흘러나온 진득한 살기가 똑바로 지크를 향했다.
“이야! 무섭다, 무서워. 잡힌다면 정말 뼈도 못 추리겠는데?”
언데드와 몬스터들의 포위진이 점점 좁혀지는데도 지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진해졌다.
“그런데 말이야.”
지크가 검자루를 쥐고 있는 손아귀에 힘을 준다. 검이 슬쩍슬쩍 흔들렸다.
“왜 내 목숨을 네 주머니 속에서 마음대로 꺼낼 수 있는 물건처럼 여기는 걸까? 제 주제도 모르고.”
“네놈의 목숨 따위는 내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딸 수 있는 하찮은 것에 불과해!”
그로팀의 외침과 동시에 언데드와 몬스터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분명 그 수는 많고 질은 높았다. 하지만 지크는 기죽지 않았다.
“해 봐.”
담담하게 중얼거리고 지크가 검을 든다. 거대한 마력이 깨어나며 온 몸에 힘이 날뛰었다.
후웅!
“응?”
갑작스럽게 힘이 더 커졌다.
지크가 뒤를 돌아봤다. 루벨라가 눈을 감고 지팡이를 들어 올리고 있는 게 보인다. 그녀의 몸에 엷은 서광이 어려 있었다.
“밸르의 기운이 보호하고 있어 제 성력은 언데드에게 통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적어도 부상은 걱정하지 마세요. 이래봬도 카르위먼의 성녀 후보예요. 조금 낯부끄러운 말이지만 성녀 후보들 중에서도 실력은 최고라고 자부하니까, 웬만한 부상 정도는 쉽게 치료할 수 있어요.”
“믿음직하군요.”
아니,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믿음직했다.
회귀 전, 용사와 함께 미친 듯 자신을 몰아붙였던 여자가 그녀가 아니던가.
물론 실력은 그때보다 한참 떨어지고 경험도 일천하다.
하지만 심리적 안정감만은 최상이었다.
‘솔직히 그때 루벨라 같은 아군 한 명만 있었어도 내가 지진 않았을 텐데.’
지지 않다 뿐인가. 오히려 압도적으로 녀석들을 몰아붙였을 것이다.
몸에 날뛰는 힘을 안정적으로 갈무리한다.
지크가 검을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허공을 벴다.
검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노도처럼 짓쳐들었다.
스윽!
길게 날아간 마력의 검이 주변을 무차별적으로 찢고 벴다.
왕년의 지크처럼 공간 자체를 절단하듯 베어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언데드와 몬스터들의 수를 줄이기에는 충분했다.
서걱! 서걱! 서걱!
절삭음이 연달아서 들린다.
재빠른 몸놀림으로 피하는 녀석도 있었고 마주 공격해 요격하는 녀석도 있었으며 단단한 몸으로 우격다짐식 돌파를 하는 녀석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많은 언데드 및 몬스터들은 몸이 갈갈이 찢겨 나갔다.
“이봐, 계획이 조금 틀어진 것 같지 않아? 저쪽으로 보낸 녀석들 중 얼마 정도는 불러 들이지그래?”
물론 그 때문에 와이그의 도착 속도가 빨라지는 건 책임지지 않는다.
“내 군세를 모두 처리한 다음에나 허세를 부려라, 개자식!”
그로팀의 말처럼 잡졸들은 처리했지만 아직 많은 수의 언데드와 몬스터들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남은 녀석들은 한층 수준이 높은 녀석들.
“그래? 그러면 그 후에 말해줄게.”
지크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앙!
접근한 몬스터의 날카로운 손톱을 막아낸다.
끼기긱!
검날과 손톱이 서로를 밀어내고 긁어대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다. 그 순간을 노려 세 마리의 언데드가 지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순간 지크가 힘을 뺐다. 검이 뒤로 밀려났다.
휘청!
손톱을 날렸던 몬스터가 중심을 잃고 급격하게 몸이 앞으로 쏠렸다. 녀석의 머리로 지크의 무릎이 날아갔다.
콰직!
녀석의 머리가 깨졌다. 뼛조각이 섞인 피와 뇌수가 화려하게 꽃폈다.
후웅!
지크가 디디고 있는 다른 쪽 발에 힘을 꾹 줬다.
그의 몸이 회전했다. 동시에 상체를 눕혔다.
투확!
지크의 상체가 있던 곳으로 녹슨 칼날이 지나갔다. 듀라한 한 마리가 찔러넣은 칼이었다.
덥석!
눈앞에 보이는, 칼을 쥔 듀라한의 손목을 확 잡아당겨 그 반동으로 몸을 튕겼다.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서걱!
일 검에 한 마리씩.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무기와 언데드의 사이사이를 뱀처럼 빠져나간 검은 정확하게 언데드의 머리를 직격했다.
털썩! 털썩! 털썩! 털썩!
1차로 덤벼든 언데드와 몬스터들이 거의 동시에 쓰러졌다.
그로팀의 얼굴이 굳었다. 그와 대비되게 루벨라의 얼굴은 환해졌다.
“더 덤벼 봐.”
지크가 손을 까딱이며 도발했다. 2차로 언데드와 몬스터들이 달라붙었다.
다시 한번 지크의 검이 춤을 췄다.
‘굉장해!’
지금껏 지크의 도움을 많이 받아 왔다. 그래서 지크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본격적으로 싸우는 지크의 모습을 보는 건 루벨라는 처음이었다.
마치 상대가 어떻게 공격을 할지 알고 있는 것 같다.
지크의 움직임은 충분히 빠르고 강맹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눈에 비치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적의 공격은 지크를 빗나갔고 지크의 공격은 모조리 적중했다.
“이런 젠장!”
결국 참지 못한 그로팀이 욕지기를 내뱉으며 명령을 변경했다.
“그 여자도 공격해라! 팔다리 정도는 날려도 괜찮다! 어떻게든 목숨만 붙어 있으면 돼!”
“그렇다는군요.”
다가온 몬스터의 목을 쳐날린 지크가 힐끗 뒤를 돌아봤다.
“괜찮은 방패였는데 아쉽네요.”
언데드와 몬스터들이 루벨라를 피하며 공격을 하던 터라, 루벨라를 등 뒤에 두고 있던 지크는 상당한 이득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득이 이제 끝난 모양이었다.
“남을 방패 취급하지 말아 주세요!”
루벨라가 투덜대며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이제 녀석들이 본격적으로 당신도 공격할 텐데 괜찮습니까?”
“…사실 별로 괜찮지 않아요.”
기본적인 신체 단련은 했지만 본격적으로 전투 기술을 갈고닦지는 않았다.
이렇게 포위된 상황에서 전력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뭐, 괜찮습니다. 별 도움이 안 될 거라는 건 예상했던 일이니까요.”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지크 님은 말을 상당히 얄밉게 한다는 건 알고 계시죠?”
“성질이 더러워서 어쩔 수 없습니다.”
큭큭대며 지크는 자세를 바로 했다.
“루벨라 님은 그냥 거기서 가만히 있어요. 공격하려고도, 반격하려고도, 피하려고도 하지 말아요. 그냥 꼼짝도 하지 말고 거기 가만히 서 있어요.”
카아앙!
루벨라에게 날아온 공격이 지크의 검에 튕겨나갔다.
루벨라가 움찔했다.
“…가만히 있으라고요? 여기서요?”
“아, 지원과 회복은 계속 해주고요. 그거야 움직이지 않고도 할 수 있잖아요?”
“그렇긴 한데…. 아니, 이 와중에 가만히 있으란 게 말이 되나요!”
카앙! 카앙!
또다시 공격이 튕겨 나간다. 그 때마다 루벨라의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그럼 저 녀석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습니까?”
카앙! 카앙! 카앙!
루벨라는 고개를 떨궜다.
“…꼭 지켜주셔야 해요.”
“걱정 마세요.”
루벨라는 두 손을 모아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카르나를 찾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