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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28화 (28/628)

제28화

그 말은 루벨라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충격이었다.

휘청!

저도 모르게 풀린 다리 때문에 순간 쓰러질 뻔했다. 간신히 중심을 잡았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몸이 휘청이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왜? 분명 의식의 힘은 약해지고 있었는데? 언데드의 출몰도 줄어들었는데?”

“아, 그거야 내가 조절했으니까. 자네들이 의식이 약해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말이지. 어때, 감쪽같지 않았나?”

“조, 조절…!”

“그래. 조절.”

그로팀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의식의 준비가 완전히 끝나면 자연 발생하는 언데드도 조절할 수 있거든. 나름 고민을 많이 했었네. 어떻게 하면 의식이 점점 약해지는 걸 자연스럽게 표현할까 하고 말이야. 어떻게 보면 내 평생의 역작일지도 모르겠군. 이렇게 자네들이 걸려든 걸 보면, 나름 잘 통한 것 같아서 기쁘기 그지없어.”

딱!

그로팀이 손가락을 튕겼다.

스윽! 스윽!

빠른 속도로 차오른 호수 아래서 무언가들이 불쑥불쑥 솟아났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흩어져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언데드와 몬스터들이었다. 그것도 강력한 고위의 언데드와 몬스터들.

루벨라는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그것들이 자신들을 포위하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소리 없이 뻐끔대는 입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했다.

“보다시피 언데드와 몬스터들도 아무런 이상 없이 소환할 수 있다네.”

일단의 언데드와 몬스터들이 포위망 너머까지 진출하는 게 보였다. 루벨라는 깜짝 놀랐다.

“설마 시민들을…!”

“아, 걱정 마. 아직은 아니야. 저건 그저 포위망을 몇 겹 더 펼치기 위해서 보낸 것뿐이네. 예전에 자네들이 도망친 경험 때문에 조심성이 많아졌거든.”

그로팀은 턱을 긁었다.

“뭐, 그래도. 자네들이 쓸데없는 짓을 한다면 내가 깜짝 놀라서, 내 부하들이 조금 흥분할지도 모르겠군.”

동시에 사람들의 고함과 비명이 들려왔다. 필시 언데드와 몬스터를 보고 놀란 것이리라.

하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그로팀의 말이 맞긴 한지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는 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들은 정말 포위망만 구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희생이 없는 것 같아 한숨 돌렸지만 위기가 가신 건 아니다.

주변에 가득 늘어선 몬스터와 언데드들을 보던 루벨라의 시선이 지크에게 향했다. 지크는 검을 들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뭐가 말입니까?”

“의식을 방해하는 방법이라고 했잖아요!”

“아, 그건 내가 대답해줄 수 있을 것 같군그래.”

그로팀이 끼어들었다.

“조사해본 바에 따르면 의식을 방해한답시고 조각상에 이상한 그림을 그리고 다닌 모양인데 말이야. 조각상에 불어넣어진 생기는 바로바로 지하수로 스며들어.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저기 떠 있는 중앙 조각상의 컨트롤을 받지. 그걸 어떻게든 할 수 있다고 떠든 게 그 남자였지만, 위대한 밸르를 신앙하는 신도로서 말하건대 말이야. 그런 방법은 없어!”

그건 루벨라의 희망을 산산이 깨부수는 말이었다.

“거기에 조사에 따르면 생기가 빨린 인간의 생기조차 도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든다며? 카르위먼의 인간이라면 그게 불가능하다는 정도는 알 텐데, 설마 정말로 저 남자의 그 어처구니없는 말을 믿을 줄이야.”

그렇다면 티미의 동생 또한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앙상하게 마른 아이의 몸을 떠올리며 루벨라는 절망했다.

“처음 그 어처구니없는 그림을 조각상에 그려놓은 걸 봤을 때 한참을 웃었다네. 설마 그걸 마법진이라고 그린 건 아니겠지? 자네는 너무 순진하군. 아니면 그저 유일한 방법에 매달렸을 뿐인가? 현실에 눈을 돌리고 말이야. 그렇게 따지면 좀 많이 불쌍하기도 하군. 하긴, 장난 같은 행위라고 해도 저 남자를 믿을 수밖에 없었겠지.”

그로팀이 승리에 도취된 시선을 지크에게 던진다. 지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의식을 실행할 수 있단 뜻인가요?”

“그래.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네.”

“그렇다면 어째서 의식의 방해가 성공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생각되도록 만든 거죠!”

“그건 아이네 루벨라, 자네 때문이야.”

“…나 때문에?”

“카르위먼의 성녀 후보. 괜찮은, 아니 훌륭한 전리품이지. 그런 것이 눈앞에 얼쩡거리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당연히 의식에 휘말리지 않게 따로 빼놓아 우리 교단에 가져다 놔야지.”

그로팀은 팔짱을 꼈다.

“자네가 처음 시장 저택으로 왔을 때, 솔직히 환호성을 질렀어. 밸르의 가호가 나에게 미쳤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과연 그 비열한 카르나의 신관이라고 해야 할까. 이미 내 손 안에 있는 거나 다름없다고 여겼는데 자네는 무척이나 잘 빠져나가더군.”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기분 나쁜 감정이 실렸다.

“처음에 자네를 잡으려 할 때는 성기사들 때문에 실패했지. 두 번째는 저 빌어먹을 작자가 ‘열쇠’를 손상시켜서 실패했어. 솔직히 저 작자가 눈앞에서 도망친다고 말했을 때, 내색하진 않았지만 힘이 쭉 빠지더군. 결국 자네를 잡을 수 없다고 여겼어. 하지만 말이야. 그때 저 작자가 재미있는 말을 하지 뭔가.”

멍청하고 어리석은, 그러나 그로팀에게는 다시 한번 희망을 품게 만든 그 말.

“다른 조각상들에 특수한 처치를 하면 의식을 방해할 수 있으니, 그 후에 주조각상을 처리하러 돌아오자고 말이야.”

그때 그로팀의 머리는 팽팽 돌았다. 또 한 번 루벨라를 사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올 것 같았다.

“그래서 자네들이 의식의 방해를 성공적으로 하고 있다 생각할 수 있도록, 그래서 자네들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나기를 생각하며 계획을 짰지. 이상하지 않았나? 어디 있는지도 모를 조각상을 자네들이 너무도 쉽게 찾았단 걸?”

그러고 보니 그랬다. 그저 지크의 능력이 뛰어나서 그랬거니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하니 어디 있는지도 모를 조각상들을 자신들은 짧은 사이에 너무 수월하게 찾아냈다.

“자네들이 쉽게 조각상을 찾아낼 수 있도록 조각상 근처에 시끌벅적하게 병력을 배치했지. 내가 유도한지도 모르고 쫄래쫄래 잘 돌아다니더군.”

“…그럼 처음부터 우리를 잡을 생각이 없었군요.”

“자네들이 병사들을 풀어 잡으려든다고 쉽게 잡힐 자들도 아니고. 계획만 잘 풀린다면 이렇게 떡 하니 내 앞으로 스스로 올 자들인데 뭐 하러 그런 헛고생을 하겠나? 그 때문에 저 자의 수배서는 일부러 대충 그리기까지 했지. 자네들이 더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말이야.”

완전히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꼴이다.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 말게나. 당장이라도 의식을 행하려던 걸 미뤄서 포르티의 인간들의 생을 며칠이라도 늘려준 거니까 말이야. 그 정도면 충분히 할 일은 한 걸세.”

“만약 우리가 당신에게 오지 않았다면?”

“그럼 어쩔 수 없지. 자네가 의식에 휘말리는 걸 각오하고 의식을 실행할 수밖에. 우리도 나름 시간이 촉박했거든. 나라나 카르위먼이 간섭하기 전에 이 일을 끝내야 하니까.”

말을 끝낸 그로팀은 빙그레 웃었다.

“궁금증은 대충 풀렸나? 그럼 슬슬 이쪽으로 와줘야겠네. 이제 의식을 거행할 거거든. 여기까지 와서 자네를 말려들게 할 수는 없지.”

“그래서 건물도 무너뜨렸군요. 이제는 들키든 말든 상관없으니까.”

“그렇지. 어차피 이 도시에 있는 인간들은 몇 시간 후면 우리의 충실한 군대가 된다. 더 이상 다른 자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

루벨라는 잠시 눈을 감았다. 온갖 상념과 감정들이 그녀의 뇌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로팀은 감탄했다.

“과연 카르위먼의 성녀 후보라고 해야 하나? 그 사이에 마음을 가라앉혔군.”

“지금까지 당신이 준비해둔 서프라이즈 때문이죠. 덕분에 여행의 목적인 경험치 쌓기는 초과 달성한 것 같아요.”

“아무리 많은 경험을 쌓는다 해도 전혀 발전이 없는 놈들도 많지. 어쩌면 다음 대 성녀는 정말로 자네였을지도 모르겠어. 우리로선 잘된 일이지. 그리고 자네나 카르위먼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 되었고.”

“그건 해봐야 알죠.”

루벨라가 지팡이를 내밀었다.

그로팀은 그 모습을 가소롭게 쳐다봤다.

“뭐, 자네의 용기를 폄훼할 생각은 없네. 아까 쓸데없는 짓 운운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민간인을 인질 삼지도 않겠네. 나중에 우리의 군대가 돼야 하는 인재들이니까 말이야. 그러니 열심히 노력해보게나.”

딱!

그로팀이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쿵!

포위를 하고 있던 언데드와 몬스터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그 박력은 대단했다. 각오를 단단히 한 루벨라지만 저도 모르게 침을 한 번 삼켰다.

“지크 님.”

“네.”

지크는 그로팀과 만난 이후 전혀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루벨라는 그게 잘못된 방법으로 위기를 자초한 죄책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루벨라는, 아마도 지크는 목숨을 잃고 루벨라 자신은 잡혀 가 죽음보다 더 끔찍한 일을 당할 가능성이 높음에 꼭 이말을 전하고 싶었다.

“전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이 위기 상황에서도 그녀는 웃었다.

“오히려 감사해요. 비록 결과가 이렇게 됐다고 해도 당신이 절 계속 도와주려고 했던 건 분명하니까요. 아니, 당신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 하고 더러운 뒷골목에서 숨이 끊어졌겠죠.”

“눈물 나는 광경이군.”

그로팀이 야유했다. 하지만 루벨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조금 어설프긴 하지만 당신이 정말로 착하게 살려고 하는 건 확실히 알았어요. 당신의 그 꿈은 분명 고귀한 거예요. 힘들긴 하겠지만 가능하면 당신은 도망쳐주세요. 뒤는 제가 최대한 막아볼게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주세요. 다른 자들이 당신의 행동을 비웃는다 해도 저만은 당신을 응원했다는 걸 기억해주시고요.”

“이봐 이봐. 내가 그 자를 놓칠 리 없잖나. 너무 그렇게 챙겨주지 말라고. 버릇 나빠져.”

루벨라에게 비아냥댄 그로팀이 이번엔 지크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자네도 책임은 지게나. 이제껏 저 여자에게 쓸데없는 희망을 던져주고 이리저리 휘둘렀잖나. 그럼 이번에 목숨을 걸어. 남자라면 그 정도 책임은 져야지. 아무리 아무것도 몰랐다 해도….”

“내가 뭘 몰라?”

드디어 지크가 입을 열었다. 그로팀은 멈칫했다.

지크의 목소리가 상황에 맞지 않게 너무도 편안해 조금 당황했다.

‘설마 지금 자기가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모르는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그 조악한 그림을 마법진이랍시고 조각상에 그리고 다닌 녀석이 아닌가.

애초에 제정신이 아닌 녀석일 수도 있다.

“네 녀석이 조각상에 이상한 그림을 마법진이랍시고 그리고 다닌 것 말이다. 어디서 그런 이상한 걸 지식이라고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전부 쓸데없는 짓이 되지 않았나. 오히려 자네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내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 스스로 사지로 걸어들어 왔지.”

“아, 그거?”

여전히 지크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을 떨어뜨렸다.

“알고 있었는데?”

“뭘 말이지?”

“네가 우리, 정확히 말해서 루벨라를 끌어들이기 위해 우리를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고 있던 거 말이야.”

“……!”

“……!”

서로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는 루벨라와 그로팀이지만, 이번에는 정확히 마음이 맞았다.

둘 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크를 바라봤다.

그로팀의 심상이 언데드와 몬스터에게도 미쳤는지 지크와 루벨라에게 접근하던 그것들도 걸음을 멈췄다.

“…후우~. 헛소리를 들어줄 생각은 없다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내 앞에 루벨라를 데리고 왔지?”

“당연히 널 끝장내려는 것 아니겠냐.”

지크가 보란 듯 검을 휘둘러 보였다. 그로팀은 기가 찼다.

“대체 어떻게? 이 상황에서 너희 둘에게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나?’

주변엔 고위 언데드와 몬스터들이 득실거린다. 지크의 실력이 제법이긴 하지만 누가 봐도 이 포위망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어보였다.

“우리 둘만 있다면 승산은 없지.”

분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마왕이었던 시절의 지크라면 콧방귀를 끼며 포위망 자체를 으깨버릴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지크는 아니다.

예전의 힘을 되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 짜증나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너, 설마 내가 진짜 그 어처구니없는 마법진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리고 다녔다고 생각하는 거야?”

“……!”

“……!”

다시 한번 루벨라와 그로팀의 마음이 맞았다.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다녔다고?”

“그래.”

“어째서?”

그로팀은 지금껏 지크와 루벨라가 자신의 손 안에서 놀아났다고 생각하고 둘을 깔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크의 말이 맞다면 그의 우월감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 된다.

입장이 반대가 됐다.

지크가 느긋하게 설명을 하는 반면 그로팀은 잔뜩 인상을 썼다.

“일단 우리가 떡하니 이곳에 쳐들어 온 이유는 간단해. 네놈을 끌어내기 위해서야.”

“날?”

“그래. 괜히 네 녀석이 도망가게 해서 찝찝함을 남기기 싫었거든.”

그리고 그로팀을 짓밟을 기회를 놓치기도 싫었다.

그로팀은 침묵했다. 하나 그것도 잠시. 곧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 날 끌어내기 위해서라고? 방금 자신이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자기 입으로 둘이서라면 승산이 없다고 해놓고 이제는 날 끌어내려 했다? 하하하하!”

배까지 잡고 꺽꺽 대던 그가 슬쩍 흘러나온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역시 제정신이 아닌 놈이었군. 그래, 네 계획대로 내가 끌려 나왔다. 이제는 어떻게 할 거지? 설마 둘이라면 승산이 없다고 한 말이 거짓말이라도 된다는 건가?”

“아니, 거짓말은 아니야. 우리 둘이라면 승산이 없지.”

지크는 어깨를 한 번 으쓱여 긍정했다. 그러나 그 입가에 미소가 지워지는 일은 없었다.

“우리 둘이라면 말이야.”

“뭐야. 응원군이라도 불렀다는 건가? 안 됐지만 국가도 카르위먼도 끼어들기에는 너무 일러.”

“그런데도 있는 걸. 응원군이.”

“뭐?”

“너는 내가 착각을 하고 의식을 방해하려 다녔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아니야. 그것들은 그저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어.”

웃는 낯이었던 그로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네 앞에서 괜히 조각상을 처분한 후에 돌아온다 운운했던 게 아냐. 네 녀석이 착각하길 바라서 그랬던 거지. 우리가 네 앞에 돌아올 거라고. 그래서 네가 의식을 미루길 기대하며 말이야.”

지크의 음성은 낭랑하고 어조는 쾌활했다. 하지만 그의 비례해서 그로팀의 표정은 점점 썩어들어갔다.

“루벨라라는, 너희 입장에서는 반드시 갖고 싶은 전리품이 있는 이상 당연히 너는 의식을 미루겠지.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우리가 네 앞에 도착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게 우리를 도와줄 테고. 뭐, 네가 의심하지 않도록 적당히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척 하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었어.”

“그, 그럼 이것도 저것도 당신의 계획대로였단 말인가요?”

“맞습니다.”

루벨라의 표정도 그로팀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로팀보다 충격이 더 큰 것도 같았다.

“나도 속인 거군요.”

“루벨라가 얼마나 연기를 잘 할지 모르니까요. 거짓말은 서툴잖아요? 그리고 굳이 루벨라가 알지 않아도 계획에는 지장이 없었고요.”

당당하고 뻔뻔한 말에 루벨라는 할 말을 잃었다.

“예전에 루벨라가 그랬죠? 내 지식을 의심했다며, 죄송하다고요. 그리고 그때 분명 전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죄송해할 필요 없다’고.”

“…그저 겸양이 아니었나요?”

“아니었어요.”

목숨을 건 최후의 전투를 위해 잔뜩 긴장을 끌어올리고 있던 루벨라는 맥이 탁 풀렸다.

“우, 웃기지 마라!”

드디어 자신이 놀아났다는 실감이 들었을까. 그로팀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응원군이라니! 그딴 게 있을 리가! 실제로 지금 너희 곁에는 아무도 없잖나! 어디서 뻔뻔한 거짓말을!”

“거짓말 아니야.”

“그럼 그 응원군이 누구라는 말이야!”

“아, 그거 말이야.”

그 순간.

콰앙!

저택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거대한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었다.

지크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벨리 와이그라고 알고 있지?”

아니면 ‘타스니아의 킬링머신’이라든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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