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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27화 (27/628)

제27화

시장의 저택은 여전히 거대하고 웅장했다.

평민이라면 거주는커녕 일생에 발을 디디는 것조차 불가능한, 까딱하면 궁전이라고 착각할 만도 한 저택.

하지만 기분 탓일까. 그 저택은 지금 그 어떤 낡은 저택보다도 어둡고 음침해 보였다.

지크와 루벨라는 저택의 마당에 내려섰다.

예전과는 달리 마당을 당당하게 활보했다. 숨어야 할 대상이 저택에 존재하지 않은 까닭이다.

“유령 저택이 따로 없네요.”

“사람들이 살고 있어야 비로소 집이죠. 인기척이 없다면 오히려 이런 곳이 더 섬뜩한 법입니다. 쓸데없이 공간이 커서 상상의 여지가 많거든요.”

시장의 저택은 싹 비워져 있었다.

시장이 암살당한 후, 지킬 대상을 잃어버린 경비 병력이 먼저 철수했고 시장의 가족도 불길함을 느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사용인들도 이 저택에 있고 싶지 않아 해, 도시에서도 가장 화려한 저택이었던 이 저택은 순식간에 빈집이 되고 말았다.

“부시장의 입김도 있었을 겁니다. 본격적으로 시장의 저택을 의식의 중심으로 쓸 생각인 거죠.”

“말하자면 지금 저 저택은 밸르의 신전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겠군요.”

“그렇습니다. 아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죠. 단언컨대, 이를 박박 갈고 있을걸요?”

“그건 반가운 소식이네요.”

자신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려는 듯, 루벨라가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지크는 피식 웃었다.

“아무리 우리가 밸리드 놈들의 능력을 많이 깎아냈다 해도 아직 많은 수의 병력이 남아 있을 겁니다. 그 ‘열쇠’라는 것도 복원을 끝냈을 거고요. 보통이라면 후퇴해서 지원을 요청해야 할 상황입니다만, 지금은 시간이 없는 것 아시죠?”

“알죠.”

“어쩔 수 없이 우리 둘이서 해결해야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 되겠죠. 각오는 되어 있습니까?”

루벨라는 자신이 들고 있는 지팡이를 내려다봤다. 그녀가 성녀 후보로 임명됐을 때 받은 것이다.

그때 루벨라는 맹세했다. 카르나의 힘과 이름을 짊어진 자로서, 빛과 정의에 목숨을 걸겠다고.

루벨라가 지크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에 가득 찬 결의가 그대로 보였다.

“되어 있어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지도 마요”

루벨라의 결의가 지나치다고 느낀 것일까. 지크가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전투가 시끄러워진다면 아무리 부시장이 이 도시를 장악하고 있다 하더라도 병력이 달려오지 않을 순 없을 겁니다. 그때 상황만 잘 이끈다면 그 병력을 우리의 응원병력으로 만들 수도 있어요. 겸사겸사 우리의 누명도 풀고요. 놈들도 눈이 삐지 않은 이상 언데드와 싸우는 우리를 대놓고 공격하진 못하겠죠.”

“아, 그런 수가 있었네요.”

굳센 결의를 해도 어쩔 수 없이 긴장을 하고 있던 루벨라의 어깨에 힘이 빠졌다.

‘과연 지크 님이야.’

이젠 완전히 지크를 믿게 된 루벨라다. 오히려 그 혜안에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럼 돌입하죠.”

지크의 말을 신호로 둘은 저택의 정문을 열고 안으로 돌입했다.

* * *

저택 문은 가벼운 잠금장치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그건 이 집이 겉보기와는 다르게 인적이 완전히 끊긴 게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역시 지크 님의 예상이 맞았어.’

밸리드는 이 저택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일단 그 생선 대가리의 조각상이 있는 곳으로 향하죠.”

“제가 안내할게요.”

루벨라가 앞장섰다.

이번엔 예전에 침입했을 때처럼 일일이 숨을 필요가 없었다. 둘은 빠르게 목표였던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벌컥!

지크가 검을 들고 문을 열었다.

순간!

휙!

어둠에 싸인 방 안에서 쏜살같은 섬광이 튀어나왔다.

힘, 속도 모든 것이 상당한 그 섬광은 망설임 없이 지크의 목덜미를 노렸다.

하지만 그것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임팩트와는 달리 너무도 허무하게 빗나갔다.

“깜짝이야.”

가볍게 머리를 옆으로 눕히는 것만으로 기습을 완벽하게 피한 지크가 내뱉었다.

하지만 내용과는 달리 그의 어조는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버릇처럼 내뱉었을 뿐 진심으로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후웅! 후웅! 후웅!

방 안에서 섬광 세 개가 더 튀어나왔다.

지크는 방문에서 몇 걸음 떨어졌다.

“지, 지크 님! 괜찮으신가요?”

갑작스러운 기습에 반응이 따라가지 못해 눈만 깜빡이고 있던 루벨라가 황급히 지크에게 달라붙었다.

“괜찮습니다. 저런 허접한 공격에 어떻게 될 만큼 만만한 놈이 아니거든요, 전.”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 지크는 방 안을 노려봤다.

“그나저나 제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건 이상하군요.”

‘그러고 보니….’

지크의 기척 감지 능력은 굉장했다. 지금껏 그 능력으로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아왔는가.

애초에 지크가 루벨라 자신을 찾은 것도 골목에 숨어 있는 루벨라의 기척을 느껴서였다.

‘그런 지크 님의 기척을 속일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기분 탓일까. 루벨라는 조금 섬뜩함을 느꼈다.

스윽!

방 안에서 지크를 공격한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섀도우 데몬?”

루벨라가 녀석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섀도우 데몬이라면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다. 일명 ‘지옥의 그림자에서 기어 나온 죽음’이라고 일컬어지는 몬스터.

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은밀성을 이용해 소리 소문 없이 접근해 공격을 가하는 몬스터였다.

그걸 생각하면 지크의 감각을 피해 공격을 가한 것도 이해가 갔다.

아니, 오히려 그 섀도우 데몬이 작정하고 매복하고 있었음에도 그 공격을 피한 지크의 반사 신경에 찬사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답을 알았어도 루벨라의 혼란은 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깊어졌다.

“어, 어떻게?”

저 섀도우 데몬이 밸르의 조각상이 있는 곳에 매복하고 있었다는 건, 저것들이 지금 밸리드에 통제되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의식은 힘을 잃은 거 아니었어?’

아니, 저건 오히려 의식의 힘이 증대됐다는 증거다. 언데드를 만든 걸 넘어 저런 고위 몬스터를 소환할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됐다는 거니까.

스윽!

은신을 강점으로 하는 몬스터답게 섀도우 데몬은 그 어떤 소리도 없이 지크에게 달려들었다.

한 마리는 지크의 정면으로 덤벼들었고 두 마리는 섀도우라는 이름답게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지크가 조금의 틈만 보여도 지면에서 솟아 나와 그의 숨통을 끊으려 할 터였다.

정면으로 달려드는 섀도우 데몬이 손 대신 달려 있는 낫을 높이 치켜들었다.

섀도우 데몬의 일격 일격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게다가 그 속도 또한 빠르다.

그러나.

“그나마 제대로 하는 거라곤 암살밖에 없는 것들이 뭔 놈의 정면 승부야.”

후웅!

지크의 검은 그것들의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낫이 지크에게 근접했을 때, 이미 지크의 검은 새도우 데몬의 목을 가르고 지나간 뒤였다.

스윽! 스윽!

그 순간, 공격 후의 빈틈을 공략할 요량인 듯 섀도우 데몬 둘이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왔다. 아니, 튀어나오려 했다.

“어딜!”

콰직!

검을 회수하는 와중에도 균형을 잃지 않고 한쪽 발을 들어 올린 지크가 그림자에서 튀어나오려던 섀도우 데몬의 머리를 짓밟았다.

애초에 맷집은 그다지 강한 게 아닌 섀도우 데몬이다. 마력이 잔뜩 실린 지크의 발에 섀도우 데몬의 머리가 수박 깨지듯 터졌다.

그 틈을 타 그림자에서 몸을 완전히 빼내려던, 마지막 남은 섀도우 데몬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지는 못했다.

서걱!

어느 틈에 다시 날아온 지크의 검이 녀석을 손쉽게 두 동강 냈다.

섀도우 데몬 세 마리가 죽은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새끼들이 어따 대고 그 더러운 낫을 휘둘러.”

지크가 침을 퉤 뱉었다.

일단 당장의 공격은 성공적으로 요격했다. 하지만 루벨라의 안색은 펴질 줄을 몰랐다.

“지크 님! 대체 어떻게 섀도우 데몬이 여기 있는 거죠?”

루벨라의 목소리에는 뚜렷한 위기감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복장이 터지게도 지크는 평온하게 대꾸했다.

“밸리드 놈들이 소환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대체 어떻게요! 의식은 힘을 잃었을 텐데!”

“답은 하나뿐이잖나. 우리의 의식이 힘을 잃지 않았다는 것 말이야.”

“!!!”

지크가 대답한 게 아니다. 루벨라가 급히 몸을 돌려 말한 상대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진동이 그들을 덮쳤다.

쿠르르르릉!

건물 전체가 흔들린다. 지진이 온 것 같았다. 그것도 보통 규모의 지진이 아니다.

걸려 있던 액자나 놓여 있던 장식품들이 떨어지고 깨지며 섬뜩한 비명을 질렀다. 벽에 금까지 쩍쩍 갔다.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는 루벨라를 지크가 부축했다. 지크는 그 심한 진동에도 꿋꿋하게 중심을 잡고 있었다.

“이, 이건 뭐죠?”

“아무래도 의식의 전초인 모양입니다.”

“의식이요?”

자신들의 활약 덕에 의식은 약해지지 않았나? 그래서 의식의 완성 또한 뒤로 미뤄진 것 아니었나? 그녀의 머릿속에서 온갖 질문들이 뱅뱅 돌았다.

“어떻…!”

“일단 빠져나가죠. 꽉 잡아요!”

지크는 왼손으로 루벨라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그리고 검으로 벽을 힘껏 내리쳤다.

마력이 이글거리며 거대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콰아앙!

저택 벽이 너무도 쉽게 터져나갔다. 지크는 구멍을 통해 뛰었다.

탓!

그들은 정원에 착지했다. 지크는 몇 걸음 더 걸어 저택과 거리를 뒀다.

콰아아앙!

그들이 빠져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소리를 내며 저택이 무너져 내렸다.

한때 이 도시에서 가장 커다랗고 화려한 건물로서, 도시의 통치자인 시장이 거주하기까지 한 건물 치고는 너무나 허망한 최후였다.

우르르!

건물이 무너지는 걸 넘어 지반이 통째로 가라앉았다.

지면이 입을 벌려 저택을 게걸스럽게 삼키는 것 같다.

루벨라는 넋을 놓고 건물의 잔해가 사라진 구멍을 쳐다봤다. 그녀의 머리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일이 연이어 벌어졌다.

필사적으로 머릿속에 펼쳐진 혼란을 수습하며 사태를 파악하려 애쓰는 그녀의 눈에 어떤 물체가 들어온 것은 그 때였다.

“…밸르의 조각상?”

붕괴된 지반 위로 그것은 오연하게 떠 있었다.

루벨라는 마치 그 조각상이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헛된 희망을 믿고 우습게 뛰어다니는 광대가 된 것 같았다.

퍼엉!

구멍에서 뭔가가 튀어나와 높게 솟구쳤다.

물이었다. 아마 저택 아래를 통과하던 지하수일 것이다.

하늘로 솟구친 물은 다시 비처럼 지상으로 돌아와 텅 빈 구멍을 점차 호수로 바꾸기 시작했다.

“아름답지 않나?”

목소리가 들린다. 아까 지크 대신 루벨라의 질문에 대답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루벨라는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시장.”

“음, 부시장이란 호칭도 싫어하진 않지만 이젠 슬슬 내 본래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겠나? 내 이름은 앨리드 그로팀일세. 카르위먼의 성녀 후보, 루벨라여.”

“당신에게 내 성을 부르라고 허락한 적은 없어요!”

“그럼 이름으로 불러드릴까? 아이네라고 말이야.”

루벨라가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로팀은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작게 웃어 루벨라를 더 자극했다.

루벨라는 잠깐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지금은 화를 내고 있을 시간이 아니다. 사건의 전말을 알아야 했다.

“보아하니, 저택을 무너뜨리고 물을 끌어온 건 당신의 짓인 듯하군요.”

“물론 내가 그랬네. 우리의 위대하신 밸르 님을 위한 의식의 시작이지.”

“…거짓말.”

목이 바짝바짝 탄다. 루벨라는 심부에서 올라오는 꺼림칙한 불안을 내리 누르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로팀의 말을 부정할 때의 목소리는 거칠고 갈라져 있었다.

“당신의 의식의 힘은 약해졌잖아. 그래서 의식도 뒤로 미뤄졌을 텐데.”

그로팀이 폭소를 터뜨렸다. 통쾌하고 유쾌해서, 순진하게 속은 불쌍하고 어리석은 멍청이를 비웃는 그런 웃음이었다.

“자네들이 의식을 막겠다고 열심히 돌아다닌 건 보고받고 있었네. 그 의지에 이 나도 굉장히 감탄을 했어. 그러니 자네들에게 이 실망스러운 말을 전해야 한다는 게 마음 아프기 그지없군.”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그로팀은 전혀 마음이 아파 보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말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게 빤히 보였다.

그와 비교해 루벨라는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고 결국 그로팀의 말은 무자비하게 루벨라의 고막을 때렸다.

“자네들이 한 짓은 말이야. 전혀 쓸모없는 짓이야. 우리의 의식은 전혀, 눈곱만큼도 방해받지 않았다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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