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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26화 (26/628)
  • 제26화

    쏴아아아아!

    요 며칠 하늘을 가린 구름이 곱게 물러나지 않겠다고 투정을 부리는 양, 기어코 비를 뿌렸다.

    빗줄기는 상당히 굵었다. 차갑게 내리는 비는 시야를 가리고 소리를 지웠다.

    사람들은 대부분 집 밖을 나오지 않았고, 나다니는 사람도 대부분 볼 일만 잠깐 보고 돌아갔다.

    하지만 이런 궂은 날씨를 반기는 사람도 있었다.

    뒤집어 쓴 후드에서 빗물이 폭포수처럼 떨어진다. 하지만 그 악조건 속에서도 후드 속 안의 눈빛은 맹렬하게 반짝였다.

    지크였다. 그는 그와 똑같이 후드를 푹 뒤집어 써 비를 피하고 있는 루벨라를 데리고 어느 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저 집이 맞을까요?”

    루벨라가 조금 자신없는 투로 물었다.

    수드의 집의 조각상을 처리한 후, 지크는 바로 다음 목표를 잡았다.

    그 어떤 단서도 없이 조각상이 있는 곳을 지크가 특정하자 루벨라는 당연히 적잖게 놀랐다.

    그리고 정말 조각상이 있는 곳이 맞는 건가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지크는 확신했다.

    “낮에 경비병들이 순찰을 도는 루트를 확인했습니다. 도시에서 중요한 곳, 혹은 우리가 숨을 만한 인적 없는 곳을 순찰 돌며 뒤지는 건 당연하지만 이곳을 포함한 몇몇 곳은 도저히 집중적으로 순찰을 돌 만한 이유가 없는 곳입니다. 당연히 뭔가 중요한 것이 있단 뜻이죠.”

    “그게 밸르의 조각상이란 소린가요?”

    “그렇습니다.”

    루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녀가 납득을 하든 못 하든 상관없었다. 지금 루벨라는 전적으로 지크에게 의존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돌입하죠.”

    지크는 루벨라를 데리고 집으로 진입했다.

    과연 지크의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집 안은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던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크는 그 경계를 쉽사리 벗겨냈다. 경비병은 기절시키고 함정은 해제했다.

    건물 안을 수색하자 예전 수드의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비밀 방이 발견되었다.

    어찌나 그렇게 잘 찾아내는지 루벨라는 지크의 직업을 다시 한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크는 비밀의 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못생긴 생선 대가리의 조각상이 떡 하니 서있었다.

    “있네요.”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지크가 으스댔다.

    “이런 놈들은 원래 좀 단순한 법입니다. 그리고 찔리는 게 많아서 자기가 지키고 싶은 걸 싸고돌기를 좋아하죠.”

    “그래도 이렇게 간단하게 찾을 줄은 몰랐어요.”

    “별로 간단하게 찾은 건 아닙니다. 그놈도 머리를 쓴답시고 상당히 미끼를 많이 만들어냈거든요. 그 중에서 진짜를 찾은 건 제 능력이죠.”

    지크는 자신의 성과를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누가 본다면 눈꼴 시릴 수도 있는 장면. 하지만 도시의 위기에서 지크의 능력은 정말로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루벨라는 순순히 칭찬했다.

    “그렇네요. 정말 대단하세요.”

    “이야, 부끄럽네요.”

    으스대며 자기 자랑을 할 때는 언제가 이제는 또 겸양이다. 하지만 지크도 이렇게 순수한 칭찬을 받는 건 색다른 기분이었다.

    ‘누가 한 번 자기 자랑을 하면 온갖 야유와 비웃음이 날아다녔는데. 아니면 낯간지럽게 아부를 떨거나.’

    지크가 살고 있던 세계는 그런 세계였다.

    “일단 얼굴에 금칠하는 건 그 쯤 하고 빨리 용건이나 끝내죠.”

    “그래요.”

    그들이 밸르의 조각상을 찾는 이유는 의식을 방해하기 위함이다. 지크는 품에서 작은 물감통과 붓을 꺼냈다.

    “루벨라 님. 부탁드립니다.”

    “네.”

    루벨라는 물감에 카르나의 성력을 불어넣었다. 붉은색의 물감이 잠시 번쩍였다 원래대로 돌아갔다.

    푹!

    지크는 물감에 붓을 쿡 찍었다. 그리고 마치 인생의 역작을 그리듯, 밸르의 조각상에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루벨라는 뒤에서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저게 정말 통할까?’

    그녀의 눈빛이 조금 불안하게 흔들렸다.

    지크를 믿는다. 믿을 수밖에 없다.

    부시장과 수드에게 배신을 당한 그녀로서 솔직히 더 이상 사람을 믿기 힘들 수도 있지만, 지크는 도저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오직 착한 일을 하겠다는 이유만으로, 마녀라고 누명을 쓴 그녀를 도와 도시를 장악한 밸리드라는 거대 세력과 싸우고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그를 믿지 않는다면, 루벨라는 앞으로 도저히 사람을 믿을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믿는다.

    하지만 사람을 믿는 것과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지식을 믿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끝났습니다.”

    “…그런가요?”

    뒤돌아 붓과 물감을 집어넣는 지크. 루벨라는 그의 뒤로 보이는 조각상을 자세히 관찰했다.

    지크가 그려놓은 온갖 선과 도형이 조각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저것이 바로 의식을 방해하고 더 나아가 도로 생기를 돌려놓을 수 있게 하는 마법진일 것이다.

    하지만 루벨라의 눈의 착각일까.

    그것은 태양과 달과 별, 인간과 동물과 식물, 성력과 마력 등 온갖 자연의 이치와 신의 기적을 수식, 도형화 한 다른 마법진들과는 달라 보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무척이나 조잡했다. 마치 장난으로 그린 아이들의 낙서같이.

    과연 그것이 정말로 이번 사태를 해결할 마법진일까.

    카르위먼의 사람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지위와 지식을 가진 그녀로서도 처음 알게 된, 카르나의 성력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다는 의식 방해.

    “이제 마무리를 해주시죠.”

    지크의 말에 루벨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조각상에 다가가 성력을 퍼부었다.

    이제와 이 행위에 대해 의심을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지크를 믿고 따를 뿐.

    의심하고 시험해서 진실을 밝히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밸리드의 의식은 코앞이었으니까.

    “조각상은 이대로 내버려둬도 되나요?”

    “이미 성력이 지하수로 흘러내려가서 상관없습니다. 부수든 말든 우리의 용무는 끝났어요.”

    지크는 다시 다른 조각상을 찾자며 앞장섰다.

    지크의 등을 한 번 지그시 눈에 담은 루벨라는 곧 지크를 뒤따랐다.

    * * *

    하지만 그녀의 그건 그저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것뿐일까. 그렇게 밸르의 조각상에 우스운 마법진을 그리고 성력을 퍼붓고 다닌 지 얼마 쯤 됐을 때였다.

    “좀비군요.”

    “좀비네요.”

    오늘도 밤의 어둠을 틈 타 또 다른 조각상에 조치를 취하려 움직이던 지크와 루벨라는 좀비 한 마리를 만났다.

    이미 밸리드의 의식이 완성 직전인 이 도시에서 좀비가 배회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루벨라는 그 좀비에게서 분명한 이상을 느꼈다.

    “저거 왜 저러죠?”

    좀비는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 까지는 이상한 것이 아니다. 원래 좀비란 것들이 그런 움직임을 보이니까. 하지만 그 좀비의 움직임은 한층 더 괴상망측했다.

    마치 온몸에 보이지 않은 갑옷이라도 입은 양 움직임이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흠.”

    지크가 좀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여느 좀비가 그러는 것처럼 그 좀비도 지크에게 손을 뻗어 그의 생명을 앗으려 했다. 자신과 똑같이 만들려 했다.

    하지만 그 행동은 굉장히 어색했고 무척이나 느렸으며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지크는 좀비의 목을 쳤다. 요리사가 죽은 생선의 머리를 치는 것처럼 단순한 작업이나 마찬가지인 행위였다.

    “약해졌군요.”

    “약해져요? 좀비가요?”

    어떻게 생각해도 나쁘게 해석되지 않는다. 루벨라는 기대감에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네. 확연히 약해졌습니다. 다행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헛되지 않은 것 같군요.”

    지크의 말은 확인사살이나 마찬가지였다. 루벨라의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의심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아, 다행이에요! 정말로 다행이에요!”

    루벨라는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카르나에게 기도했다. 이 험난한 시련을 큰 희생 없이 마칠 수 있을 것 같아 눈에 눈물마저 고였다.

    “당신에게 뭐라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벌떡 일어난 루벨라가 지크의 손을 잡고 말했다. 한순간이라도 그에게 의심을 품은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솔직히 당신을 의심했어요.”

    “어, 그건 좀 실망인데요? 이렇게 목숨 걸고 루벨라를 도와줄 수 있는 착한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다고 의심을 하나요?”

    지크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거기엔 원망의 빛은 전혀 없어서, 루벨라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크 님을 의심한 건 아니에요. 지금까지의 도움에는 백 번을 감사해도 부족하니까요. 하지만 지크 님께서 알고 계신, 의식을 방해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있었어요. 카르위먼에서도 꽤 중요한 지식까지 알 수 있는 저도 모르는 방법이었는데다가 그 방법이….”

    “그 방법이 너무나 유치찬란하고 수상쩍은, 마법진 같지도 않은 낙서들을 그려 넣는 것이라고요?”

    “…솔직히 그랬어요. 죄송해요.”

    “죄송할 필요 없어요. 이해합니다. 그리는 저도 언뜻언뜻, 이걸 생각한 인간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생각한 걸까. 천재라고 불러야 할까, 바보라고 불러야 할까 고민하니까요.”

    “그분은 천재예요.”

    “루벨라 씨는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럼 저도 그렇게 생각해야겠습니다.”

    “혹시 그 방법을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 그건 비밀입니다.”

    이미 한 번 거절당한 전적이 있기에 루벨라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그럼 나중에 그 마법진은 꼭 가르쳐 주세요.”

    “그건 걱정 마세요. 나중에 깔끔하게 가르쳐드리죠. 물론 대가는 받겠지만요.”

    “상관없어요. 우리 카르위먼에게는 가치를 따지기조차 힘든 마법진이거든요. 교단에서 웬만한 조건은 모두 들어줄 거예요.”

    자신들의 행위에 효과가 나왔다는 증거를 봤기 때문일까.

    아직 쫓기는 몸이고 흑막인 부시장도 멀쩡히 살아 있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이제 조각상 몇 개에만 더 처치를 하면 될 겁니다. 그럼 부시장의 힘도 걷잡을 수 없이 줄어들 테니 그때 다시 시장 저택으로 쳐들어가죠. 단, 조각상의 숫자가 줄어드는 만큼 녀석들도 병력을 집중할 테니 더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알겠어요. 그런데 이 정도로 많은 조각상을 뒀는데 어떻게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제물로서 실종됐을 텐데요.”

    “최대한 권력으로 틀어막고 있었을 겁니다. 핑계야 많죠. ‘사람들이 혼란에 빠질 수 있으니 당분간은 조용히 사건을 조사하자’ 뭐, 이렇게요. 경기에 민감한 상업 도시라서 아마 더 잘 통했을 겁니다.”

    시 중추가 흑막, 정확히 말해 밸리드에게 장악당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알 수 없는 얘기다.

    실제로 지크도 민심이 흉흉하지 않다는 근거를 들어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추측했었다.

    “물론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나머지 밸르의 조각상에도 처치를 해서 이 도시를 완전히 구해내도록 하죠.”

    “네!”

    희망적인 얘기를 나누며 둘은 다시 도시의 어둠으로 사라졌다.

    * * *

    둘은 그 이후로 조각상 몇 개를 더 찾아냈다. 지크가 그린 마법진에 루벨라의 성력을 듬뿍 들이 부었다.

    효과는 가시적으로 나타났다. 결국 지크와 루벨라가 밤에 아무리 도시를 뒤져도 단 한 체의 언데드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그게 언데드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이 찾지 못한 언데드가 도시의 어느 뒷골목을 배회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체감상 언데드의 출현은 분명 줄어 있었다.

    “그럼, 이제 시장 저택의 주조각상을 찾아가 파괴하도록 하죠. 그게 여전히 존재하면 우리가 한 일이 모두 헛수고가 돼버립니다. 의식을 늦출 수 있을 뿐,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부시장은 어디 있을까요?”

    “저도 잘은 모릅니다만, 그 놈도 시장 저택에 있을 겁니다. 저택이 이번 의식의 중심이 분명하니, 아무리 녀석이 몰렸다고 해도 거기서 벗어날 수는 없겠죠.”

    “그럼 저택으로 가죠. 언제 갈 건가요?”

    “시간을 오래 끌 이유가 있던가요?”

    지크는 시장의 저택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오늘 밤 당장 가죠.”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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