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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18화 (18/628)

제18화

“지, 지크 님?”

루벨라가 덜덜 떨며 말했다.

며칠만에 본 그녀의 외견은 여전히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그러나 몰골은 며칠 전과 완전히 달랐다. 탐스러운 금발은 회색빛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투명한 피부에는 말라붙은 진흙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녀의 성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올려다 주던 옷 또한 여기저기 찢어지고 더러워져 거지꼴이 다름없었다.

지금 그녀에게 카르위먼의 성녀 후보로서의 모습은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꼴이 말이 아니시군요.”

“윽!”

지크의 말에 루벨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주춤주춤 일어나 지크에게 뭔가를 겨눴다. 새하얀 몸체에 반투명한 푸른 보석을 물고 있는 지팡이. 성력을 증폭시켜 성법의 위력을 올려주는 도구일 것이다.

하지만 그 지팡이도 주인처럼 이곳저곳이 더러워져 있었다.

“반응을 보니 자기가 수배를 받고 있다는 건 알고 있는 것 같군요.”

“…절 어떻게 찾았죠?”

“감각은 자신 있어서요. 루벨라 님과 비슷한 기척이 골목 안쪽에서 떨고 있기에 확인 차 들러본 거죠.”

대단한 기척 감지였다. 한스는 물론 루벨라도 놀랐다.

특히 지크를 보는 한스의 시선은 무슨 괴물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루벨라는 빠르게 감정을 가라앉혔다.

“절 넘길 건가요?”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 하지만 아직 빛을 잃지 않은 눈빛은 절대로 순순히 끌려가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안 넘기겠다면 믿을 겁니까?”

루벨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조용한 대치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였다.

꼬르륵!

루벨라의 뱃속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주변이 워낙에 조용했던 터라 그 소리는 마치 천둥치듯 들렸다.

루벨라의 뺨이 잔뜩 달아올랐다.

“…일단 밥부터 먹죠.”

지크의 말에 루벨라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 *

일단 루벨라를 데려가기로는 했으나 그녀는 어디까지나 수배자였다. 그것도 ‘부시장 살해’와 ‘포르티의 저주’라는, 무지막지한 죄목이 걸려 있는.

지크는 한스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시켰다.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지크와 루벨라를 번갈아보던 한스가 곧 횃불을 들고 떠났다.

남은 둘은 시간이 더욱 지나길 기다렸다. 둘 사이의 침묵이 감돌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네요.”

“물을 겁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난 다음에요.”

지크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다행히 오늘도 달과 별은 짙은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움직이죠.”

“벌써요? 조금 더 기다리는 게 낫지 않나요?”

“요새는 밤중에 나다니는 사람이 없다시피 해 괜찮습니다. ‘마녀 아이네 루벨라’ 덕에 말이죠.”

루벨라가 노려보는 걸 지크는 어깨를 으쓱여 받아 넘겼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골목 밖으로 나왔다. 루벨라는 긴장한 눈초리로 인적을 확인했다.

“…아무것도 안 보여요.”

정말로 빛 하나 없는 지금의 도시는 사물을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파악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목적지까지 가기는커녕 건물이나 사물에 부딪쳐 부상만 입을 가능성이 컸다.

평소라면 시력 보조 성법을 사용했을 루벨라지만 며칠 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 제대로 자지도 못한 채 도주 생활을 계속한 터라 성법을 사용할 여력이 없었다.

덥석!

그때 루벨라의 손을 무언가가 잡았다.

거칠고 커다란, 하지만 따스한 손이었다.

“기본적으로 안내는 제가 하죠. 조심히 따라 와요.”

루벨라는 지크의 손을 조용히 바라보다 대답했다.

“네.”

지크는 마력을 눈에 집중했다. 곧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전경이 파악됐다. 지크는 루벨라를 이끌고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이라 발소리를 따로 조심할 필요는 없었지만 루벨라가 맹인이나 다를 바 없어 발걸음은 느렸다.

“눈에 마력을 보내신 건가요?”

“알고 있습니까?”

“다른 성기사 분들이 비슷한 걸 쓰시는 걸 본 적이 있어요.”

그 말을 끝으로 루벨라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마 그녀와 같이 있던 성기사들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그녀의 반응을 보면 좋은 꼴로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아마도 죽었겠지.’

지크도 입을 열지 않은 채 묵묵히 루벨라를 안내했다.

“쉿!”

지크가 숨죽여 말했다. 무의식적으로 루벨라는 입을 틀어막았다.

지크가 조심스럽게 움직여 루벨라를 이끌었다. 골목을 몇 번 돈 후, 옆 건물 벽에 등을 바짝 붙였다.

철컥! 철컥! 철컥!

영문도 모른 채 지크가 시키는 대로 벽에 등을 붙여 그 거친 감촉을 느끼고 있던 루벨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쇠끼리 부딪치는 거슬리는 소음.

도시의 경비 병력이 틀림없었다.

골목 저 너머로 옅은 불빛이 비친다. 횃불의 빛이 마치 자신을 찾는 정탐병의 눈인 것 같아 루벨라는 한걸음, 불빛과 떨어진 곳으로 움직였다.

조금씩 강해지던 불빛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거슬리는 쇳소리도 점점 멀어져갔다.

“후우!”

불빛도 소리도 모두 없어지자 루벨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죠.”

“네.”

지크는 다시 루벨라를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지크가 도착한 곳은 그들이 사용하던 숙소였다. 안에서는 은은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1층에 주인의 기척이 느껴지니 현관을 사용할 순 없다.

지크는 건물 주변을 서성였다. 지크와 한스가 머무는 숙소는 3층에 위치해 있었다.

“저기군.”

3층에 위치한, 굳게 닫힌 나무 창문 하나를 보고 지크가 중얼거렸다.

“잠시만 기다려요.”

루벨라에게 말하고 지크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를 주워 창문을 향해 던졌다.

벌컥!

얼마 안 있어 창문이 열리고 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꽉 잡아요.”

“네?”

루벨라의 의문을 무시하고 지크는 루벨라를 안아 올렸다.

“꺅!”

작게 비명을 지르며 당황했지만 루벨라는 본능적으로 지크의 목을 감아 안았다.

그 상태로 지크는 터벅터벅 건물 벽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다리에 마력을 돌린 후 힘을 줬다.

후웅!

순식간이었다. 지크의 몸이 3층 창문까지 가볍게 뛰어 올랐다. 창문 너머 방에서 한스가 놀라는 게 보였다.

턱!

창틀을 붙잡고 지크는 루벨라와 자신의 몸을 창 안으로 집어넣었다.

“두 분 다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다.”

한스의 걱정에 지크가 대꾸했다.

“저, 저도 괜찮아요.”

이제 좀 안심됐는지 루벨라도 조금 편안하게 대꾸했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한스도 적잖이 마음을 놓았다.

“그럼 다행이네요. 일단 두 분 편히….”

한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날카롭게 빛나는 루벨라의 눈 때문이었다.

마치 일말의 광기마저 느껴지는 눈빛. 다행히 그 눈빛은 한스에게 향하는 게 아니었다.

그 눈빛은 방 한쪽에 놓여진 작은 탁자에 준비된 음식을 향하고 있었다.

“쿡! 카르위먼의 신성한 신관께서도 배가 고프시면 어쩔 수 없군.”

“네? 아, 아니 이건…!”

루벨라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변명하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몸을 이리저리 꼬았다.

자기가 한 행동이 퍽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음식을 향해 힐끔힐끔 움직이는 눈동자를 막을 순 없었다. 결정타로 다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그녀는 주저앉아 버렸다.

“먹어요. 어차피 당신을 위해서 준비시킨 거니까. 도망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을 텐데, 일단 허기부터 채워야지.”

“…감사해요.”

거절하기엔 등에 붙다시피 한 배가 고픈 걸 넘어 아렸다. 루벨라는 비틀거리며 식사가 차려져 있는 식탁으로 향했다.

“그럼 난 다시 나간다.”

“네? 어딜 가시려고요?”

다시 창문 밖으로 발을 내놓는 지크를 향해 한스가 물었다.

“혹시 모르니까 내가 입구로 들어왔다는 알리바이는 남겨야지. 주인장이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어야 내가 혼자 들어왔다고 생각할 테니까.”

두 다리를 모두 밖으로 빼내고 창틀에 걸터앉은 지크가 고개를 돌렸다.

“나 뛰어내리면 창문 닫아라.”

그 말을 남기고 지크는 다시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 * *

카운터에 앉아 있는 주인에게 눈도장을 찍고 지크는 태연스레 다시 자신의 객실까지 올라왔다.

쿵! 쿵!

“나다!”

문을 두드리며 말하자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조그맣게 열린 문 사이로 한스가 고개만 빼꼼 내밀어 지크를 확인하더니 곧 문을 활짝 열어줬다.

방 안으로 들어 온 지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역시 음식을 먹고 있는 루벨라였다.

식사는 별것 아니었다. 수프와 빵 그리고 채소 몇 개가 전부. 하지만 루벨라는 지금까지 먹었던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달그락!

마지막 남은 스프까지 싹싹 긁어먹은 루벨라가 스푼을 놨다. 작게 트림을 하다가 급히 입을 막았다.

한스가 뭔가 꿈이 부서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지크는 무시하고 루벨라에게 다가갔다.

“그럼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도 될까요?”

“그 전에, 혹시 지금 시중에 제 얘기가 어떻게 났는지 물어도 될까요?”

“어렵지 않죠. 지금 루벨라 님은 부시장을 살해하고 포르티를 저주한 희대의 마녀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잘 그려진 수배서와 함께 말이죠. 보시렵니까?”

지크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건 루벨라의 수배서였다. 지크에게서 받은 그걸 루벨라는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저건 어디서 챙기셨습니까?”

“혹시 자기가 어떻게 그려졌는지 호기심이 생겼을까 봐 하나 가져 왔지.”

도저히 이 사람의 사고방식은 이해할 수 없다. 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루벨라의 수배지를 쥔 두 손에 힘이 들어가며 수배지의 테두리부분이 꾸깃 구겨졌다.

“아니에요.”

루벨라가 조용히 뇌까렸다.

“저는 마녀가 아니에요.”

“일단 사정부터 들어보죠.”

지크는 루벨라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턱을 까딱였다. 루벨라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예전 상점에서의 일을 듣고 우리는 바로 시장에게 갔어요.”

시장은 아무나 만나 볼 수 없는 인물이지만 천하의 카르위먼 성녀 후보는 ‘아무나’가 아니다. 당연히 일사천리로 시장을 만나볼 수 있었다.

만나 본 시장은 소문과 같이 척 봐도 욕심이 많아 보였다. 두툼하게 접힌 살 때문에 턱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작은 눈은 어디 돈 나올 기미라도 찾으려는 듯 쉬지 않고 움직여댔다.

오히려 그를 보좌하는 부시장이라는 자가 시장 자리에 더 어울려 보였다.

반백의 머리를 멋있게 뒤로 넘겼고 다부진 체격은 자기 관리에 엄격하단 걸 느끼게 했다. 억센 눈썹 아래의 눈빛은 모든 걸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우리는 수드 님이 말한 걸 토대 삼아 시장에게 말했어요. 이 도시에서 불법적으로 그리고 비도덕적으로 이권 강탈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이죠. 거기에 시장의 측근 가족이 그런 일에 손을 대고 있다고도 시장 본인도 뇌물을 받은 의혹이 있다고도 말했어요.”

당시 시장은 당황했다고 루벨라는 회상했다. 그리고 부시장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시장을 조금 한심하게 바라본 것 같았다.

다행히 아무리 욕심 많은 시장이라도 카르위먼의 사람이 한 경고는 무시하지 못한 것일까.

시장은 빨리 알아보고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다만, 자신이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은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당연히 믿음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시장이 조치를 취한다고 한 이상 루벨라도 더 이상 따지고 들 수 없었다.

일단 돌아가 사태를 두고 보려고 한 루벨라와 일행을 시장이 붙잡았다. 도시에 있을 때는 자신의 저택에 묵지 않겠냐며 정중히 초대했다.

“그저 카르위먼에 잘 보이고 싶어 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잠시 고민에 빠진 루벨라는 시장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녀가 하는 여행의 이유는 사람들의 세상살이를 보고 이야기를 듣는 것. 지금까지는 빈민이나 서민 등 하급 계층의 이야기를 주로 들으며 보냈지만 이번엔 상급 계층의 이야기도 들어보기로 했다.

가까이서 시장이 하는 일을 감시할 목적도 있었다.

“그렇게 시장의 저택에 묵게 되고 이틀을 보냈어요. 그때까진 아무 일도 없었죠. 하지만 그 즈음,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도시에 언데드가 나타나고 있다고요.”

언데드. 신성신 카르나를 믿는 자로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존재.

그 얘길 듣자마자 그녀는 시장에게 향했다.

시장이 마뜩찮은 건 여전했지만 지금은 개개인의 호불호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자신들도 도시를 순찰하면서 시민을 보호하고 언데드를 퇴치하는데 한몫 거들 생각이었다.

“시장은 저희의 요구를 들어줬어요. 오히려 환영했죠. 우리가 순찰을 돌 구역을 알려줄 테니 해가 질 즈음 자기 방으로 오라고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시장의 행동이 수상했다. 그때 눈치를 채야 했다.

“당시 우리는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어요. 그래도 시장의 저택에 묵고 있는데 완전무장을 하고 있을 순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함정이었어요.”

그들이 갔을 때 본 것은 쓰러져 있는 부시장과 이상한 책 한 권을 들고 앉아 있는 시장.

그리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들을 포위하기 시작한 언데드들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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