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죠?”
늦은 시각. 살포시 내려앉으려는 어둠을 내쫓으려 몽환적으로 불타오르는 촛불의 빛이 방 안을 은은하게 비췄다.
방 한가운데에 있는, 얼룩덜룩한 얼룩과 갈라진 표면, 떨어져 나간 모퉁이로 존재한 세월을 짐작할 수 있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지크와 루벨라였다.
일단 다른 양아치들을 쫓아낸 루벨라는 피해자를 치료하고 신원을 확인한 후, 지크를 자신이 머무는 숙소까지 끌고 온 상태였다.
지크를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에 힐난이 가득했다. 하지만 지크의 얼굴은 태평하기만 했다.
“뭐가 말입니까?”
“곤란한 사람을 도우라고 했더니 양아치를 돕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루벨라를 지키기 위해 방 안에 같이 있던 몇 명의 성기사들도 황당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곤란한 사람을 도우라고 했지, 다른 조건을 걸지는 않았잖습니까? 그 녀석들, 상당히 곤란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는 상식이에요!”
“그 상식이 없어서 조언을 구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어진다. 루벨라는 머리를 짚었다. 교단 안에서 수행만 하느라 많은 경험을 가지지 못한 그녀로선 처음 겪는 일이었다.
‘아니, 이건 경험 운운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경험이 훨씬 많은 사람이라도 이런 사람을 만난 적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이것도 훌륭한 경험이겠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앞으로는 약자들을 구하도록 노력하세요.”
“은근슬쩍 조건이 바뀌었군요.”
“누구 때문인데요?”
루벨라는 지크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지크의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에 대한 생각이 뭉실뭉실 솟았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내일 그 분에게 사과부터 하죠.”
“누구한테 말입니까?”
“당신이 때린 사람한테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 루벨라 님이 시킨 대로밖에….”
루벨라가 째려보자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과하죠.”
* * *
“괜찮습니다.”
루벨라와 지크의 사과를 사내, 브리앙 수드는 흔쾌하게 받았다.
루벨라의 치료 덕에 멀쩡해진 얼굴로 수더분하게 웃는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만만…아니, 착해 보였다.
지크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루벨라를 쳐다봤다.
“괜찮답니다.”
“…제대로 사과해 주세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수드가 그렇게 말하자 지크의 턱이 더욱 올라갔다.
루벨라는 한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지크가 들어먹을 것 같지 않아 포기했다.
“죄송해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아뇨. 정말로 괜찮습니다. 게다가 루벨라 님이 사과하실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분에게 조언을 건넨 게 저예요. 책임은 저에게도 있어요.”
물론 루벨라가 잘못된 조언을 한 건 아니다. 그 누가 그 조언을 그렇게 참신하게 해석할 거라고 예상을 했겠는가.
하지만 루벨라는 그것조차 자신의 탓이라고 여겼다.
“정말 착하신 분이시군요. 역시 카르위먼의 분들이십니다.”
“아직 부족한 몸이지만요.”
하지만 카르위먼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가요? 뭐 때문에 골목에서 그렇게 맞고 있었던 거죠?”
루벨라의 시선이 지크와 수드를 오가며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를 요구했다.
먼저 대답한 건 지크였다.
“전 잘 모릅니다. 그 녀석들이 이 자한테 무언가 중요한 물건이 있다더군요. 그것만 빼앗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어떤 물건이요?”
“모릅니다.”
“뭘 빼앗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사람을 때렸다고요?”
“물건을 받아내는 게 중요했지 그게 뭔지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요.”
“당신은 정말로 깡패나 뭐 그런 사람인가요?”
“거칠게 살아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얼굴을 오리할콘으로 도배를 한 것처럼 지크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말했다. 지크를 따라온 한스마저 몰래 한숨을 내쉴 정도였다.
‘그나저나 거칠게 살아? 지크 님은 얼마 전까지 조용히 살아오지 않으셨나?’
하지만 한스는 지크의 성장 환경을 다시 떠올렸다.
‘하긴, 당시 가문과 지크 님의 상황을 생각하면 거칠게 살아왔다고 볼 수도 있지.’
새삼 자신의 예전 행동이 후회스러웠다. 만약 분수만 지키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가문 밖으로 억지로 끌려 나와 고생하고 있진 않았을 테니까.
일단 지크에게는 더 이상 의미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자 루벨라는 수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희가 사정을 알 수 있을까요? 물론 밝히는 게 어려우실 수도 있지만 사정에 따라서 저희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으니까요.”
루벨라는 조근조근 조심스럽게 설득했다.
수드는 머뭇거렸다. 말을 할지 말지 상당히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루벨라는 조용히 기다렸다.
“…일단 저분이 말한 물건 같은 건 없습니다.”
수드가 지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물건이 없다고요?”
“네. 그저 절 괴롭히기 위한 구실로서 있지도 않은 걸 막무가내로 내놓으라고 하는 거죠.”
“그냥 괴롭히기 위해서요?”
“물론 목적은 있습니다.”
수드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시선을 따라 다른 사람들도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상점이었다. 옷감을 팔고 있는지 선반에는 여러 가지 옷감들이 돌돌 말려 진열되어 있었다. 벽에도 많은 옷감들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상점이 좋아 보이냐고 묻는다면, 백이면 백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무로 만든 건물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삐걱였고 모서리에는 음울한 거미줄이 걸려 있었다.
진열대에는 아무리 벅벅 닦아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얼룩들이 즐비했고 빛바랜 바닥은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허름한 가게죠?”
수드가 겸연쩍게 말했다. 루벨라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훌륭한 가게예요.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공간을 겉모습만으로 재단할 수는 없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루벨라 님의 말씀대로 여기는 제게 무척이나 소중한 공간입니다. 자그마치 할아버지 때부터 저희 집안을 먹여살린 가게니까요. 하지만 저와 루벨라 님이 이 가게를 어떻게 생각하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찾고 싶은 외견은 아닐 겁니다.”
조금 자조적인 어투로 수드가 말했다.
“어째 한탄처럼 돼버렸군요. 어쨌든 이 가게는 제겐 소중한 가게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가치 있는 가게가 아니죠. 아니,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뭔가 다른가요?”
“많이 다르죠. 오면서 상점 주변을 보셨죠?”
“네. 대부분 공사를 하고 있더군요.”
“이번에 이 근처가 새로운 상업 지구로 지정되었거든요. 그리고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제 상점도 상업지구에 포함되게 됐죠.”
포르티는 거대한 상업도시였다. 지리적인 이점을 바탕으로 중계무역으로 부를 쌓은 이 도시는 그 막대한 부를 이용해 영주에게 일정 부분 자치권까지 얻어 낸 상태였다. 당연히 포르티에서는 상업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새로운 상업지구를 지정한 것도 그때문이었다.
“이권 때문인가요?”
루벨라의 질문에 수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부터 이 자리를 넘기라고 요구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물론 전 할아버지, 아버지의 추억이 깃든 이 자리를 넘길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만….”
“그 후로 괴롭힘이 시작됐다는 거로군요.”
수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긍정을 뜻한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누구죠?”
“시에렌 상회입니다. 지금 옆에 새로운 상점을 만들고 있는 상회죠. 그리고 제가 알기로, 짓고 있는 상점의 규모는 굉장히 커다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 상점을 포함할 정도로요.”
“이미 이 상점을 빼앗는 건 정해진 일이라는 건가요.”
루벨라의 목소리에 불쾌감이 섞였다.
“치안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나요?”
“소용없습니다. 한통속이니까요. 시에렌 상회의 대표는 시장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치고 있습니다. 거기에 시장의 측근 중 한 명의 동생이기도 하죠.”
“실제로 이 도시의 시장에게 좋은 소문은 없습니다.”
성기사 한 명이 루벨라에게 부연설명을 해줬다. 루벨라의 불쾌감은 점점 하늘을 찔렀다.
“…내일 제가 시장님을 만나 보죠.”
“네?”
“그래도 다행이네요. 그나마 제가 속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서요.”
얼떨떨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수드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것처럼 루벨라는 웃어보였다.
“루벨라 님. 노파심에 말씀드리면….”
“알아요. 아무리 우리가 카르위먼의 사람이라고 해도 정치에는 함부로 간섭할 수 없다는 걸요.”
성기사의 조심스러운 말에 루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위먼은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종교였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녀를 보고 카르나의 축복을 바라며 환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여타의 왕족, 귀족들도 그녀가 하는 일이 자신의 이권을 침범하려는 일이라면 언제 웃음 지었냐는 듯 번들번들한 살기를 내뿜으며 그녀와 적대할 것이다.
‘직접적인 해를 입히진 못하더라도 견제는 하겠지.’
그리고 그건 자칫하면 카르위먼 전체에 대한 견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타협하다가는 우리는 카르위먼이란 이름을 사용할 자격을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 그리고 견제가 되면 어떤가요? 우리가 신앙을 잃지 않고 지금까지처럼 약자들을 돕는다면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할 거예요.”
그 숱한 견제와 위협 속에서도 꾸준히 이어온 행보가 바로 지금의 사랑받는 카르위먼을 만들어 냈다.
성기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이 사건을 덮고 넘어가자 말을 한 게 아니다. 그저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기에, 루벨라를 모시는 자들로서 충언을 한 것뿐이었다.
수드가 곤란한 표정으로 그들을 말렸다.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이건 수드 님만의 일이 아니에요. 눈앞에 보이는 불의를 보고 그냥 넘어가는 건 카르위먼의 사람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걱정 마세요. 수드 님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게요.”
“…정말로 선량하고 고귀한 분이시군요. 당신의 앞길에 영원한 축복이 깃들기를 빌겠습니다.”
수드는 깊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수드의 인사를 마주 고개를 숙여 받아들인 루벨라가 지크를 바라봤다.
지크의 얼굴은 여전히 뻔뻔했다. 이곳의 대화가 지루한지 하품마저 하고 있었다.
“뭡니까?”
“…하아! 당신에게 조언을 잘못 해준 제 잘못도 있고, 수드 님도 용서한다고 하셨으니 이 일은 여기서 끝낼 게요. 당신의 ‘착하게 살고 싶다’라는 말도 거짓말이 아닌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앞으로 폭력을 쓸 일이 있으면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주세요. 그게 정말로 착하게 사는 일인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시 드린 조언도 잊지 마시고요.”
“‘약자를 도와라’ 말입니까? 음, 그리 마음에 드는 조언은 아닙니다만.”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루벨라 님이 한 말이니, 알겠습니다.”
“감사드려요.”
지크와의 얘기를 끝낸 그녀는 다시 한번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상점을 떠났다.
“음, 미안했어.”
약자를 도우라는 루벨라의 말 때문일까. 루벨라 일행이 떠난 상황에서 지크가 어색하게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저는 다 잊었습니다. 만약 그래도 죄책감을 가지신다면, 루벨라 님의 말씀처럼 저 같은 약자를 잘 지켜주십시오.”
“아, 그래. 노력해 볼게.”
지크도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상점을 나갔다.
* * *
시간은 어느새 한밤중이 되어 있었다. 탁한 구름이 달도 별도 가려 한치 앞도 보기 힘들다.
횃불을 들고 앞서 걸어가던 한스가 뒤를 돌아봤다.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까부터 지크는 입을 꾹 다물고 걷기만 하고 있었다.
뭔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했다. 긁어 부스럼 만들기는 싫지만, 입을 다문 채 뒤에서 귀신처럼 따라오기만 하는 지크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결국 한스는 각오를 하고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아까 루벨라가 한 말 말이야. 진짜일까?”
루벨라에 ‘님’자가 빠져 있었지만 한스는 그러려니 했다. 솔직히 지금의 지크가 누군가를 ‘님’이라는 칭호까지 붙여 호칭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무슨 말 말입니까?”
“약자를 도우라는 말.”
“그게 뭐 잘못됐습니까?”
“뭔가 찝찝해서 말이야. 정말 그렇게 해도 되나? 그 여자가 뭔가 착각한 거 아닐까?”
‘착각은 댁이 했겠죠.’
솔직히 곤란한 자를 돕겠답시고 양아치를 도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한스조차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가 착각인 것 같은데요?”
“약자를 도우라는 말은 이해가 가. 하지만 그 여자의 어조를 보면 꼭 수드 같은 놈을 도우라는 것 같아서 말이야.”
“같아서가 아니라 그게 맞을 걸요?”
“그래?”
지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 다른 수도 없으니 일단 그대로 따라볼까? 아무래도 방향이 잘못된 것 같지만 루벨라가 한 말이….”
멈칫!
지크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고개를 돌려 지크와 얘기를 하고 있던 한스의 발걸음도 자연스레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저길 봐.”
지크가 그들의 앞쪽을 가리켰다.
어느새 그들은 인적이 드문 곳으로 나와 있었다. 왼쪽으로는 개천이 졸졸 흘렀고 오른쪽으로는 허름한 집들이 듬성듬성 늘어서 있었다. 빈 집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잠이 들었는지 흘러나오는 불빛은 없었다.
한스는 지크가 가리킨 것을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사람…인가요?”
한스가 말을 흐렸다.
어슴푸레하게 비치는 형태가 사람 같긴 했다. 하지만 그게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는 게, 그림자의 행동이 무척 이상했다.
“사람은 아니야.”
“네? 그럼 뭡니까?”
한스가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림자가 횃불이 비치는 곳으로 들어 왔다. 동시에 역한 악취가 훅 풍겼다.
“좀비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