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지크는 무의식적으로 검자루로 향하려던 손을 멈췄다.
‘진정하자. 일단 지금은 적대자가 아니니까.’
그녀와 싸운 건 어디까지나 회귀 전. 지금 지크와 그녀는 어떤 접점도 없는 사이다.
하지만 회귀 전에 고생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 터라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루벨라 님. 굳이 직접 나서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그녀와 가장 가까이 있던 성기사가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하지만 그녀, 아이네 루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저희가 부탁을 드려야 하는 입장이잖아요. 그렇다면 이 일행의 대표인 제가 나서는 게 맞아요.”
“하지만 신분도 모르는 자들입니다.”
“카르나 님의 자애는 신분을 따지지 않고 미칩니다.”
가르침을 주듯 엄숙하게 말한 루벨라가 다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들이 지켜주실 거잖아요?”
성기사들의 얼굴에 짙은 감동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그러나 그런 그녀이기에 성기사들은 더욱 그녀의 안전을 보호하려 들었다.
“그만두게. 자네들이 졌어.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게나.”
마차에서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성녀의 뒤를 이어 또 한 사람이 마차에서 내렸다.
‘저 작자는!’
루벨라와 성기사들의 대화에서 적대의사가 없다는 걸 느끼고 경계도를 내리고 있던 지크가 순식간에 경계도를 최상급으로 끌어 올렸다.
이번에 마차에서 내린 자도 지크가 알고 있는 자였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은빛의 머리와 수염을 가진, 세월을 곱게 넘긴 것 같은 인자하게 생긴 노인.
하지만 그는 절대로 외견처럼 허허거리는 옆집 할아버지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말하기를 카르나의 검, 모든 카르위먼 성기사들의 우상, 신성의 수호자 등 그를 찬란하게 수식하는 별명들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지크에게 익숙한 별명은 그런 착실한 것이 아니었다.
‘타스니아의 킬링 머신!’
일찍이 지크가 마왕이라고 불리기 전, 세상에는 많은 수의 ‘마인’이라고 불린 자들이 있었다.
나라나 영지, 법률이나 규칙 등에 얽매이지 않고 세계를 자기 멋대로 휘저으며 남에게 온갖 피해를 끼친 자들.
마왕이라 불리기 전, 지크도 이 마인이라 불린 자들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마인들은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다른 세력에 제거당하기도 하며 점차 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차근차근 힘을 키우며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소수의 마인은 사람들에게 새로 마왕이란 칭호를 얻고 용사 파티에게 퇴치되기 전까지 공포로 군림했다.
그 혼란의 세월 속에서 많은 마인들을 말 그대로 갈아버렸던 자가 바로 눈앞에서 ‘허허!’ 거리고 있는 노인이었다.
많은 악인들과 마인들이 그의 손에 죽었지만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은 바로 그에게 ‘타스니아의 킬링 머신’이라는 칭호를 준 사건이었다.
‘타스니아 평원에서 마인 여섯과 그 수족들을 단신으로 몰살시켰었지.’
마인들이 활약하던, 소위 ‘마인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
물론 ‘타스티아 평원 사건’은 마인 시대 초창기에 일어났던 일이라 당시의 마인들은 상대적으로 약한 자들이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인이라 불린 자들이다. 그런 자들을 단신으로 여섯이나, 그것도 마인들의 수족까지 합쳐서 몰살시킨 것은 충분히 경악스러운 사건이었다.
‘킬링 머신이라. 누가 붙였는지 이름 참 잘 지었어.’
신을 섬기는 자에게 붙기에는 섬뜩한 별명이지만 당시 카르위먼과 적대한 세력들은 그에게 그보다 잘 어울리는 별명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로는 상처 하나 못 내겠지.’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고 있는 지크지만 아무래도 회귀한 후의 시간이 너무 짧았다.
자기들끼리의 얘기가 끝났는지 성녀와 킬링 머신이 지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박력 한 번 죽이네!’
한 명은 지금 자신의 이빨이 박히지도 않을 킬링 머신. 또 한 명은 설혹 이빨이 박히더라도 그 흔적조차 없애버릴 좀비 메이커.
물론 지크가 지금 약하듯 루벨라도 회귀 전처럼 무지막지한 기적을 사용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크의 심장을 벌렁거리게 하기엔 충분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십니까.”
그러나 역시 지금까지 온갖 난장판을 헤쳐 온 지크였다. 당황한 것도 잠깐.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고 성녀의 인사를 부드럽게 받았다.
“늦은 밤에 실례드려요. 저는 카르나 님을 믿고 있는 종, 아이네 루벨라예요.”
‘아직 성녀는 아닌가?’
그가 알기로 성녀에게는 ‘프리멜’이라는 미들 네임이 붙는다. 지크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아니, 처음 싸웠을 때 그녀의 이름은 ‘아이네 프리멜 루벨라’였다.
‘그럼 아직 성녀 후보겠군.’
카르위먼은 몇 명의 성녀 후보를 선출해 그중 한 명에게 성녀의 칭호를 수여한다고 알고 있다. 프리멜이란 이름을 대지 않은 것을 보면 그녀는 아직 성녀가 아니었다.
루벨라가 자기소개를 끝내자 이번엔 킬링 머신이 앞으로 나섰다. 인자한 미소가 마치 맹수가 초식 동물의 가죽을 쓰고 위선적으로 그릉 대는 것 같았다.
“저는 카르나 님의 미천한 종이자 검인 벨리 와이그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기 있는 자들은 저와 같은, 카르나 님을 섬기는 검들입니다.”
성기사들이 지크 쪽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전 지크라고 합니다.”
스틸월이란 성은 버렸고 마왕이었을 때 쓰던 모어라는 성을 쓰기도 내키지 않았다.
앞으로 자신은 착하게 살 생각이었으니까. 때문에 성을 붙이지 않았다.
루벨라와 와이그도 그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그 정도까지 지크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설마 이런 식으로 인사를 나누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회귀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랄까.
앞으로의 미래에는 어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지크는 두 사람과의 관계를 회귀 전과는 전혀 다른 인연으로 시작하게 됐다.
‘착하게 살기로 했으니 이것도 좋겠지.’
“어이, 너도 인사….’
한스에게 말을 걸던 지크가 멈칫했다.
‘가관이군.’
한스의 눈은 루벨라를 향해 있었다.
그 얼굴은 무척이나 우스웠다. 눈꺼풀은 깜빡이지 않고 눈동자는 미동도 없다. 입이 벌어져 당장이라도 침이 떨어질 것 같았다.
‘하긴, 충분히 그럴 만도 한가?’
성녀는 예뻤다. 그것도 비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렌 제너드 그놈을 포함해서 용사 파티의 인간들은 전부 미남, 미녀만 있었어. 마치 미남, 미녀만 콕 골라서 동료로 모은 것 같았지.’
하지만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렌 제너드의 동료들은 분명 그에 걸맞는 실력을 갖고 있었다.
‘무슨 인형 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지크는 내심 고개를 젓고는 다시 한스에게 관심을 돌렸다.
‘일단 이 녀석부터 처리하자.’
한스는 여전히 루벨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난감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와이그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이해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그만큼 익숙하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둘 수는 없었다. 이해를 하고 있을 뿐, 기분 좋게 생각하고 있단 뜻은 아니니까. 실제로 성기사 몇 명은 슬슬 불쾌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정신 차려!”
빡!
“악!”
뒤통수를 맞은 한스가 머리를 감싸고 쭈그려 앉았다.
“이 녀석은 한스라고 합니다. 제 하인이죠.”
“그, 그렇군요.”
루벨라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끙끙대는 한스를 쳐다봤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오늘 저희도 이곳에서 야영을 하려고 해서요. 양해를 좀 구하려고요.”
지크와 한스가 야영을 하고 있던 곳은 길 옆에 난 공터였다.
나무로 빽빽이 들어찬 다른 곳과는 달리 짧은 잡초만이 조금 나 있는 곳. 야영하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곳인 듯 지크와 한스가 오기 전에도 이미 꺼진 화톳불이나 쓰레기 등 야영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말을 하려고 일부러 직접 나온 건가? 성녀 후보씩이나 되는 사람이?’
지크는 감탄했다. 아니, 감탄을 넘어 이해를 하지 못했다. 자기와 같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닌 것 같았다.
‘이게 진짜로 착한 사람이라는 건가?’
지크 자신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
“물론입니다.”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카르위먼 일행의 야영 준비는 순식간에 이뤄졌다. 루벨라가 묵을 마차를 중심으로 커다란 텐트들이 세워졌다.
“뭘 그렇게 쳐다봐?”
“네, 넵?”
보물을 훔치다 걸린 도둑처럼 한스가 화들짝 놀랐다. 한스의 시선은 아까부터 마차에서 떨어지질 않고 있었다.
“정신 차려, 인마!”
“넵!”
‘대답은 잘 한다.’
하지만 대답만큼 행동이 따라주진 못했다. 다시 슬금슬금 움직이는 눈동자를 보고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쓸데없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피곤하게 끌고 다니면 정신 차리겠지.’
그리고 한스를 피곤하게 만드는 건 무척 쉽다.
지크는 한스를 보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스는 그런 지크의 행동을 보지 못했고 다음날부터 시작될 지옥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인연인데. 그거나 물어볼까?’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지크가 벌떡 일어나 카르위먼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스가 따라오려 하자 손을 들어 막았다.
한스는 풀이 죽어 다시 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보초를 서던 성기사가 지크의 앞을 막아섰다.
“성…, 아니. 루벨라 님과 얘기를 좀 할 수 있겠습니까?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기사의 표정이 찌푸려지는 게 허락해줄 분위기는 아니었다.
‘밑져야 본전이었을 뿐이니까.’
지크도 거부하면 계속 들이 댈 생각은 없었다.
“미안하지만 안….”
“괜찮아요.”
거절하려던 성기사도 돌아가려던 지크도 놀랐다. 루벨라가 마차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친절한 미소를 짓고 손짓마저 한다. 성기사는 대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벨라 님!”
“저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의무가 있습니다. 애초에 지금 제가 여행을 하는 것도 많은 것을 보고 듣기 위함이 아니었나요?”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와이그 님이 계시잖아요. 그리고 여러분도 있고요. 그 정도면 제 안전은 충분해요.”
‘그렇지. 타스니아의 킬링 머신 하나만으로도 호위로는 차고 넘치지.’
성기사는 루벨라의 강경한 의지에 곤란한 듯, 마차 밖에서 야영지를 관리하고 있던 와이그를 쳐다봤다.
“괜찮네. 루벨라 님의 옆에는 내가 붙어 있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성기사가 지크에게 길을 내줬다.
하지만 지크를 보는 그의 시선엔 못마땅함이 잔뜩 실려 있었다.
지크가 쓸데없는 짓을 해서 괜한 일이 일어났다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지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루벨라는 지크를 마차 안으로 안내했다.
마차 안은 정갈했다. 종교적인 장식이 있긴 했지만 과하진 않았다.
지크는 루벨라의 맞은편에 앉았다. 뒤따라 들어 온 와이그는 루벨라의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지크를 향했다.
“물어볼 게 있으시다고요?”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루벨라 님만큼 잘 아실 분도 없을 것 같아서요.”
“그게 뭔가요?”
“착하게 살려면 뭘 해야 할까요?”
“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