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이유 있는 원망이었지만, 그 근원에 깔린 문제를 깨달아버려 백작가에 자그마한 죄책감과 동정을 안은 지크.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저질러버린 걸 어쩔 거야? 아까 생각한 대로 나중에 도와주면 되겠지.’
쿨하게 뒤처리를 가문에 내팽개쳐버린 그는 생각해둔 예정을 실행해 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여행준비였다.
‘미리 준비했다고는 해도 역시 백작가에서 여행 준비를 완벽하게 할 수 있던 건 아니니까.’
하지만 걱정할 건 없었다.
‘모자란 거야 사면 되겠지.’
아무리 반쯤 내놓은 자식이었다 해도 지크는 스틸월 백작가의 장자. 어느 정도의 자금과 귀금속을 확보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는 가장 먼저 귀금속 상점에 들러 갖고 있던 보석 몇 개를 처분했다. 그렇게 해서 상당한 양의 자금을 손에 넣고는 바로 무구점을 찾았다.
‘역시 영지 수도의 무구점이라 그런가. 상당히 크군.’
검과 방패가 선명하게 그려진 나무 간판이 입구 위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게 어느 나라, 어느 정부건 권력자들은 평민이 무장을 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한다.
평민들의 무장이 자신들을 향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깊은 산속에 들어가도 몬스터가 돌아다니는 상황상 어쩔 수 없이 평민들도 자체적으로 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설령 그게 빈약하더라도. 아니면 전문적인 무력 집단에게 의뢰를 하거나.
때문에 무구점은 상시 수요가 넘쳐났다.
‘물론 무구점마다 양과 질, 가격의 차이는 있지만 그건 어느 물품을 취급하는 상점도 마찬가지니까.’
지크는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벽 곳곳에 여러 가지 무기들과 방어구들이 걸려 있었다. 진열장에도 무구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어서 오십쇼!”
가게 주인이 힘차게 지크와 한스를 맞았다.
무구점의 특성상 손님들은 거친 자들이 많고 그 영향을 받아 주인장들도 거친 이들이 많지만 적어도 여기는 그럭저럭 손님 대접을 해주는 곳인 모양이었다.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다가오려는 주인을 손을 들어 막은 지크는 가장 가까이 있는 검 하나를 빼들었다. 창문 너머로 비치는 햇살이 칼날을 날카롭게 쓰다듬었다.
팅!
손가락을 튕겨 검신을 때려 봤다.
‘소리는 그럭저럭.’
이번엔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후웅!
검날이 깨끗한 반월을 그렸다. 어깨를 늘어뜨린 채 해진 꾸러미처럼 가게 한 구석에 엉거주춤 서 있던 한스는 등허리가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정말 검술은 천재적인가 봐.’
바이너와 그레이그를 연거푸 꺾은 것을 봤을 때부터 지크의 검 재능이 심상치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을 훑고 지나간 검날의 살기는 어느 정도 떨어져 있던 한스에게까지 일순 죽음의 공포를 설핏 보여줄 정도였다.
‘무게 중심도 괜찮고.’
지크는 검이 썩 만족스러웠다.
당연히 그가 회귀 전 써왔던 무기와는 비교를 할 수 없다. 지금 백작가에서 그대로 들고 온 검보다도 떨어진다.
하지만 지금 지크가 찾는 무구는 어디까지나 나쁘지 않은 무구다.
‘이 정도면 만족이지.’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지 않다면 여기서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지크는 검을 원래 있던 곳에 돌려놓은 후, 한스를 끌고 숏소드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것들도 무난해.’
숏소드 중 적당한 것을 하나 집어 성능을 확인한 지크는 검집 째로 한스에게 넘겼다.
“왜 이걸….”
“이제부터 네 거다.”
“네?”
“앞으로 뭔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비무장으로 있을 순 없잖아. 기본적으로는 내가 지켜줄 거지만 최악의 상황에 대비는 해야지.”
“그, 그럼 다른 검이 낫지 않을까요?”
한스의 눈이 벽에 걸려 있는 롱스드나 그레이트 소드를 훑었다. 외관상으로 강해 보이는 그 검들이 탐이 나는 모양이었다.
지크는 피식 웃으며 한스의 뒤통수를 가볍게 때렸다.
“다룰 수나 있고? 적을 찌르기 전에 네 손가락부터 잘릴 거다. 몽둥이 쥐어주기 전에 그걸로 만족해. 아니, 역시 몽둥이가 나으려나?”
한스는 조용히 숏소드를 받아들였다. 몽둥이보다는 숏소드가 나았다.
“지크 님은 안 고르십니까?”
“나는 이게 있잖아.”
지크는 허리춤에 달려 있는 검을 툭툭 쳤다. 백작가에 납품되는 검이니만큼 다른 검보다 훨씬 좋은 품질의 것이었다.
부무장 및 잡일에 사용할 단검도 자신과 한스의 것 두 개를 대충 고른 지크는 이번엔 갑옷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수아비처럼 얼기설기 엮은 나뭇대 몇 개에 갑옷이 걸쳐져 있었다.
대부분이 두터운 천이나 가죽으로 만든 갑옷으로 급소 부위에 나무나 철로 보강된 것도 몇몇 보였다.
한스의 눈에 실망감이 감도는 걸 본 지크가 유쾌하게 웃었다.
“왜 플레이트 메일은 없는 거냐, 이러니까 싸구려 가게는… 같은 생각하고 있는 표정인 걸?”
“네, 넵? 그럴 리가요!”
한스가 급히 부정을 했지만 딸꾹질까지 해대는 폼이 정곡을 찌른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전문가 같은 지크의 행동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가게 한 쪽에 조용히 서 있던 주인의 얼굴이 변했다.
화를 내는 것 같진 않았다. 그저 철부지 같은 한스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정도였다.
“아무리 무장이 필수적인 세상이라지만 그런 갑옷은 무지하게 비싸. 이런 곳에서 주력으로 팔면 오히려 주인장의 머리를 의심해 봐야지.”
주인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일단 이거 입어 봐.”
지크는 한스에게 가죽 갑옷 한 벌을 던졌다. 뒤에서 끈으로 조이는 타입으로, 가슴과 관절 등에 금속을 덧대 방어력을 높인 것이었다.
일단 갑옷을 받아들긴 했지만 한스는 머뭇거렸다.
지금껏 백작가에서 허드렛일만 하던 그가 갑옷을 입는 방법을 알 리 없었다.
“제가 해드리죠.”
이때다 싶어 주인장이 나섰다.
“외워.”
지크의 명령에 한스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주인장이 하는 일을 두 눈 크게 뜨고 절절 매며 외웠다.
주인장의 능숙한 솜씨도 있어서 한스의 몸에 갑옷이 모두 장착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갑옷을 한스는 신기하게 쳐다봤다.
지크도 한스와 비슷한 가죽 갑옷을 착용했다. 한스와 달리 능숙했다.
불편함이 없는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는 지크를 한스가 신기하게 쳐다봤다.
“지크 님은 이런 걸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여기저기서.”
만족스러운 대답일 수 없지만 한스는 더 묻지 못했다.
“좋아!”
마지막으로 주먹을 꽉 쥐어 움직임에 뚜렷한 방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지크가 상쾌하게 외쳤다.
“계산!”
* * *
기본적인 무장을 구입한 지크는 다른 여행 준비도 하기 시작했다. 모포, 부싯돌 같은 야영에 필수적인 물품들과 마른 육포 같은 식량을 챙겼다.
모든 물품을 구입했을 때 지크와 한스는 어엿한 여행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둘은 스틸월 백작 영지의 수도 비올사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성벽에서 빠져 나왔다. 표정은 완전히 상반돼 있었다.
지크는 기분이 좋은지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발걸음도 무척 가벼웠다.
그에 비해 한스의 안색은 어둡기만 했다.
“혹시 당장의 목적지로 정해 놓은 곳은 있으십니까?”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지만 일단은 이 앞이 보이지 않는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라도 알고 싶었다.
“포르티.”
“포르티라면. 옆 영지의 도시 아닙니까?”
“맞아. 일단 이 영지부터 벗어날 생각이다. 가장 가까운 옆 영지의 도시가 포르티니 일단 그곳에 들렀다가 발길 닿는 대로 가 봐야지.”
여전히 무계획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 지크였지만 그래도 아주 계획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 녀석들이나 찾아볼까.’
회귀 전 그에게는 네 명의 측근이 있었다. 마왕이라 불린 그의 측근이니만큼 전부 제정신 박힌 놈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지크가 나름 동료의식을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회귀 전에는 일찌감치 그렌 제너드에게 죽었지만 회귀한 지금이라면 멀쩡히 살아 있을 터.
물론 지금의 그들은 그가 아는 부하들이 아니다.
‘그래도 얼굴 확인하는 것 정도야 상관없지.’
게다가 지크가 알기로 부하들도 과거에 나름 고충이 있었다.
‘발길 닿는 대로 여행하다가 생각나면 찾아가 보자. 그리고 곤란에 빠져 있으면 도와도 주고.’
한스는 하늘을 봤다. 그의 마음과는 다르게 하늘은 빌어먹게도 새파랬다.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무언가가 발목을 콱 틀어쥐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가야지.’
뒤쳐졌다가는 또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른다. 예상과는 다르게 지크는 자신을 상당히 좋게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스의 마음이 편해질 리 없었다.
한스는 메고 있는 가방을 한 번 고쳐 메고 지크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나마 다음 목적지가 도시인 게 어디야.’
포르티는 백작가에만 처박혀 있던 한스도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유명하고 번화한 도시다.
일단 당면의 목적지를 알게 됐고, 그곳이 유명한 도시인 이상 다른 이상한 곳으로 가는 곳보다는 편할 거라고 한스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무른 생각이었다는 걸, 한스는 비올사를 떠난 지 반나절만에 깨닫게 됐다.
“지, 지크 님? 지금 길에서 벗어나셨는데요?”
지금까지 조용히 길을 따라 걷다가 갑자기 길 바깥으로 나온 지크를 향해 한스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알아.”
하지만 지크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거긴 길이 아닌데요?”
“알고 있다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 한스는 제발 지크가 소변 등의 이유로 일시적으로 길을 벗어난 것이길 바랐다.
하지만 보통 불안감 속에 피어나는 희미한 기대는 헛된 기대일 경우가 대다수다.
“굳이 길 따라 빙빙 돌아갈 필요 있어? 직선으로 가면 거리를 반 이상 줄일 수 있는데.”
말만 들으면 옳은 말 같다. 하지만 한스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새파란 수해를 보면서도 지크의 말에 공감할 순 없었다.
“아, 아무리 거리는 더 멀다지만 길을 따라가는 게 더 빨리 갈 수….”
“뭐 해? 안 따라오고.”
그 말이 끝이었다. 지크가 자신의 말을 들어먹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게 된 한스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그의 뒤를 어기적어기적 따라갔다.
* * *
사람들이 길을 따라 다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안전이다.
길이 아닌 곳은 일반인의 숨통을 손쉽게 끊을 수 있는 맹수부터 시작해 온갖 것들이 안전을 위협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존재가 뭐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백이면 백 몬스터라고 답할 것이다.
몬스터. 강력한 육체 능력 혹은 마법 능력, 그것도 아니라면 특수 능력을 보유하며 현재 인간의 생존을 가장 위협하고 있는 존재.
그나마 인간의 생활권 가까이에는 인간들이 사력을 다해 퇴치를 해놨기 때문에 출현률이 낮다. 때문에 한스도 몬스터를 직접 볼 기회는 얼마 없었다.
그저 몬스터 토벌을 나갔던 기사들이 끌고 왔던 몬스터의 시체를 멀찌감치 몇 번 볼 기회가 있었을 뿐.
하지만 인간의 생활권에서 조금만 더 나가면 아직도 세상은 몬스터들의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길을 벗어난 지크와 한스도 몬스터를 맞닥뜨렸다.
“지, 지크 님! 저, 저, 저거…!”
“시끄러워. 몬스터 처음 보냐?”
놀라 다리를 부들부들 떠는 한스와 평온한 지크의 태도가 상반된다.
크륵!
샛노란, 마치 병자 같은 눈의 못생긴 생물이 둘을 보고 위협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저건 뭡니까?”
“고블린이다.”
“저, 저게 말입니까?”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업이랄까. 한스는 공포심에 빠진 와중에도 호기심을 보였다.
1미터를 간신히 넘는 작달막한 체구. 방어구는커녕 헐벗고 있으며 무기랍시고 들고 있는 것도 굵은 나뭇가지를 꺾어 만든 조잡한 몽둥이다.
딱 까놓고 말해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벼, 별것 아닌가?’
한스가 보아 온 영웅 소설에서도 고블린은 강한 몬스터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강대한 악마들이 부리는 조잡하고 약한 병졸들로 나올 뿐. 그랬기에 한스는 조금 자신감을 가졌다.
‘저 정도면 나도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한스는 허리춤에 매둔 숏소드의 손잡이를 슬그머니 잡았다.
“왜. 이길 수 있을 것 같냐?”
“네? 아, 아니요. 그건 아니고요.”
지크를 대하면 주눅부터 드는 한스이니 일단 부정부터 하고 봤다. 주제를 모른다고 한소리 들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크는 전혀 예상외의 말을 건네왔다.
“한 번 상대해볼 테냐?”
“제가 말입니까?”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는데?”
막상 지크가 그렇게 말을 하자 긴장감과 공포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목숨을 건 실전인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아까 생긴 자신감이 등을 떠밀었다.
‘고작해야 고블린이고. 지크 님도 있는데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앞으로 여행을 다닐 거면 전투는 경험해보는 편이 좋잖아.’
그리고 누가 알겠는가. 여기서부터 ‘위대한 영웅 한스’의 일대기가 시작될지.
어리고 순진한 생각이었지만 이제 갓 집안을 떠난 젊은 그가 원숙한 생각을 가지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한스가 검을 뽑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