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트레얼은 지크가 사라진 입구를 보고 힘껏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뭐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야?’
트레얼은 지금껏 지크가 백작위의 후계자 자리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상황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지크가 후계자 자리를 가볍게 내동댕이치는 것으로 완전히 박살났다.
“대체 지크 공자님은 뭘 하고 싶으신 겁니까?”
백작을 말리던 크리스넌도 트레얼과 같은 생각인지 조용히 물어 왔다.
다행히 백작이 어느 정도 진정을 해 트레얼 옆으로 오는 게 가능했다.
“모르겠습니다. 공자님 본인에게 잔뜩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는 그걸 발로 차다니.”
크리스넌은 혀를 찼다.
“정말로 떠나실 생각일까요?”
“글쎄요.”
“뭐, 젊은 날의 치기 같은 게 아니겠습니까?”
크리스넌은 지크가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군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후계위를 포기하셨으니 이제 후계자는 그레이그 님이 되시겠습니다.”
트레얼은 실소를 흘렸다. 트레얼이 알기로 크리스넌은 그레이그를 지지하는 자였다.
당연히 지금의 상황을 반겨야 할 터.
하지만 트레얼은 크리스넌의 말투에서 진한 아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크리스넌 경만의 일이 아니지.’
아마 많은 자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솔직히 트레얼 자신조차도 못내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주저앉아 있는 그레이그를 쳐다봤다.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레이그 님을 기대할 수 밖…!’
벌떡!
“왜, 왜 그러십니까, 집사님?”
크리스넌이 깜짝 놀라 물었다. 하지만 트레얼은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부족하다? 지금 내가 그렇게 생각했지?’
백작가에서 그레이그의 이미지는 꽤 유능한 후계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크의 계략과 힘에 밀려 그레이그의 이미지는 무척이나 떨어졌다. 트레얼이 무의식적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할 만큼.
‘아마도 계속해서 비교할 거야. 지크 공자님의 뛰어난 모습을 봤으니 그레이그 공자님이 조금만 못한 모습을 보여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있겠지.’
그리고 그건 백작가에 분명한 불화를 일으킬 것이다.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커질 수도 있어.’
그나마 다행인 건 평소 그레이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
‘그래도 중립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거나, 무척이나 소수긴 해도 지크 공자님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불만을 갖겠지. 누가 봐도 능력 있는 장자를 음습한 괴롭힘으로 쫓아낸 형국이니까.’
여기까진 괜찮다. 그레이그는 확실히 평균보다 우수한 능력을 갖고 있는 후계자다.
그레이그가 평균 이상의 능력을 보여준다면 불만은 없어지진 않아도 밖으로 표출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레이그 공자님이 예전 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레이그는 여전히 지크가 사라진 곳을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저 일시적인 충격일 수도 있다. 이번 일로 한층 더 성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충격에 빠져 무너져 내린다면?’
평소 얕보던 형에게 압도당했다는 사실. 충격적인 결투의 과정. 그리고 앞으로 그에게 따라다닐 엄격한 시선까지.
그럴 가능성은 차고 넘친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지크 공자님이 후계위를 포기한 지금, 그레이그 님까지 망가진다면 백작가의 다음은 없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허리가 축축해졌다. 이해할 수 없던 지크의 사고가 어렴풋이 잡히는 것 같았다.
‘지크 공자님은 백작가의 후계위를 위해 이런 행동을 한 게 아냐. 백작가에 복수하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거야!’
만약 트레얼의 우려가 현실이 된다면, 스틸월 백작가는 흔들리는 걸 넘어 완전히 몰락할 수도 있었다.
“집사님, 왜 그러십니까?”
“진짜 떠나신 것 같습니다.”
“네?”
“지크 공자님. 진짜 떠난 것 같단 말입니다.”
그것도 백작가에 거대한 폭탄을 심어 놓고서.
당황한 크리스넌의 시선을 외면하며 트레얼은 입술을 깨물었다.
* * *
“후우! 속이 시~원~하네~!”
아직 몸에 묶여있는 붕대를 떼어내며 지크가 외쳤다. 목소리에 섞인 시원한 감정이 듣는 이의 스트레스까지 쫙 풀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크의 뒤를 졸졸 따르는 한스는 마치 교수대를 앞에 둔 사형수 같았다.
지크가 한스를 데려온 데는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혼자 여행할 때 짐꾼정도는 있는 게 편하지. 내게 그렇게 대든 놈을 고작 노동으로 용서해주는 거야. 이 정도면 충분히 착한 거지.’
놀랍게도 지크는 회귀 전 그렌 제너드가 말한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라’라는 말을 자기 방식대로 실행하고 있는 중이었었다.
“정말로 백작가를 떠나실 겁니까?”
여지껏 말할까 말까 입만 들썩이고 있던 한스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응.”
“다, 다시 생각하시는 게 어떠실까요? 지금 돌아가신다면 백작님도 심하게 말씀하시진 않을 겁니다. 공자님 실력이면 다음 백작위를 이어받는 것도 쉽지 않겠습니까?”
“싫어.”
한스는 울상을 지었다.
“그나저나 너는 백작 부인과는 무슨 관계냐? 널 보통 아끼는 게 아닌 것 같던데.”
아무리 지크 자신이 관련된 일이라 백작 부인이 한층 더 까칠하게 반응한다지만 한스를 보호하려는 그녀의 노력도 분명 일반 하인을 대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하, 할머니가 마님의 유모셨습니다.”
“아, 과연 그랬군.”
그래서 일개 하인을 그렇게나 싸고돌았던 모양이다.
‘그 소중한 하인을 내가 빼왔으니 마음고생 좀 하겠네.’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지크와 어느 정도 대화가 되는 것 같자 한스는 조금씩 궁금한 걸 물었다.
“혹시 앞으로의 계획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당면의 목적지라거나, 이루고 싶은 일이라거나….”
“구체적으로 정한 건 없어. 그저 세상을 떠돌면서 착한 일이나 해볼까 하는 정도뿐이야.”
‘일단은 힘의 마왕이 정면승부에서 졌으니, 그렌 녀석의 말 정도는 들어 주는 것도 좋겠지.’
재수 없는 놈이었지만 자신을 쓰러뜨린 용사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라고 봐도 좋았다.
“착한 일을 하신다고요?”
“물론! 역시 사람이란 착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법 아니겠어? 백작가에서도 착한 일을 하고 오니 무척 보람이 느껴진단 말이야.”
‘진짜 미쳤나?’
한스의 눈이 어처구니없다는 표현을 격렬히 내뱉었다.
다행히 예전처럼 대놓고 내뱉진 않았지만 지크가 착한 일을 했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동의할 수 없었다.
‘그냥 백작가를 뒤집어 놨을 뿐이잖아.’
트레얼처럼 생각을 깊이 할 순 없지만 지크가 눈곱만큼도 착한 일을 한 게 아니란 건 알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크의 말은 진담이었다. 그리고 더더욱 놀라운 건 지크의 행동이 분명 선의 위에서 행해진 일이라는 것이다.
‘다음 구심점이 될 그레이그가 그 꼴이 됐으니 한동안은 혼란에 빠져 있겠지만 그레이그가 지금의 충격을 이겨내고 성장한다면 한층 더 단단한 백작가가 될 거야.’
초천재인 지크 자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레이그도 충분히 재능이 있는 녀석이었다.
물론 지크가 가만히 놔뒀더라도 그레이그는 나름 훌륭한 백작이 됐을 것이기에, 그저 지크가 자기변명을 하는 거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랐다.
‘지금 같은 상황은 안 돼. 그레이그가 원래대로 백작의 후계자로서 조심조심 컸다면 백작가의 미래도 똑같아질 거야.’
그리고 지크가 알기로 미래의 백작가는 멸망당한다. 그것도 일하던 하인의 가족까지 살아남지 못한 정도로 아주 철저하게.
원인은 모른다. 그저 변덕으로 백작가가 잘 있는지 부하에게 알아오라고 시켰을 뿐이고, 백작가가 멸망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그 후로는 일말의 관심마저 끊었다.
그 당시 지크는 스틸월 백작가를 철저히 타인으로 생각했다.
‘그레이그가 그대로 주저앉는다 해도 백작가는 멸망할 가능성이 클 테지만, 어차피 멸망할 운명인데, 뭐.’
백작가가 변화할 계기는 줬다. 그 정도면 충분히 착한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내가 백작위를 잇는다면 원인이 뭐든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내가 왜?’
이미 그곳에는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변화할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지크로서는 엄청난 선의였다.
“저기, 공자님.”
“공자가 아니야. 이제부터는 지크 님이라고 불러라.”
백작가에서 나왔으니 공자라고 불릴 이유가 없다.
“지크 님. 갈 땐 가더라도 뭔가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로 아무것도 없이 나왔지 않습니까.”
지크가 가지고 있는 건 피 묻은 대련용 칼과 고급스러운 천을 사용하긴 했지만 두 차례의 혈투로 인해 갈가리 찢긴 옷뿐이었다.
한스가 가진 것도 달랑 입고 있는 옷 한 벌뿐.
둘 다 정말로 땡전 한 푼 없는 처지였다.
“걱정 마. 준비해둔 게 있으니까.”
“그, 그렇군요.”
애써 대답했지만 한스의 절망은 한층 더 깊어졌다.
‘준비까지 해 놨을 정도면 아주 작정을 했다는 거잖아!’
점점 백작가로 돌아갈 희망이 사라지고 있었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도망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너도 아까 봤다시피 스틸월 백작가는 무가다. 내가 결투 승리 대가로 널 데려온 만큼 도망쳐 돌아간다고 해도 백작이 허락하지 않을 거야. 다른 곳으로 도망갈 수도 있겠지만, 지금껏 백작가에서만 살아 온 네가 다른 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한스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그는 완전히 지크에게 코가 뀄다는 것을.
둘은 도시를 걸었다. 혼란에 빠진 경기장과는 달리 밖은 평화로웠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피가 잔뜩 묻고 갈기갈기 찢긴 지크의 몰골은 사람들의 경계를 받기 충분했다. 하지만 지크는 주변 시선 따위는 아랑곳없이 계속 걸었다.
‘이곳은!’
안개 낀 앞으로의 삶에 전전긍긍하던 한스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둘이 도착한 곳은 도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신전이었다. 하지만 그냥 신전이 아니다.
‘이곳은 선대 백작님들과 그 가족분들이 쉬고 계신 곳인데?’
한스의 생각처럼 그곳은 백작가의 거대한 공동묘지를 겸하는 곳이었다.
“여, 여긴 어째서 오셨습니까?”
“가기 전에 어머니라도 만나 뵈러.”
지금껏 활기차게 말해온 지크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지크 님의 어머님이라면, 전 백작 부인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크는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시지요, 공자님.”
신전을 관리하는 신관이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지크의 몰골을 보고 잠시 멈칫거렸지만 이내 신색을 회복했다.
“제가 맡긴 것을 다시 받으러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신관은 주변의 하위 신관을 불러 명령을 했다. 잠시 후, 하위 신관이 커다란 가방 두 개를 가져 왔다.
“여기 있습니다.”
지크는 작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고 커다란 가방을 한스 앞에 내려 놨다.
“메.”
“…네.”
한스에게 거부권은 없다. 한스는 조용히 가방을 둘러멨다. 상당히 무거웠다.
“잠시 어머니를 뵙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를 따라 오시지요.”
지크는 신관을 따라갔다. 도중, 잠시 양해를 구하고 가방에서 깨끗한 옷을 꺼내 갈아입기도 했다.
신관은 지크를 신전의 옆으로 안내했다. 넓게 드리워진 평평한 땅 위로 묘비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신관은 그중 하나의 묘비 앞으로 둘을 안내했다. 많은 묘비들 중에서도 가장 새 것으로 보이는 묘비였다.
[사라 스틸월]
묘비에 적혀 있는 글자가 무덤의 주인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플로렐 스틸월이 차지하고 있는 백작 부인 자리의 원래 주인. 지크의 친모가 바로 이 무덤의 주인이었다.
지크는 가볍게 감상에 잠겼다.
‘날 낳아준 어머니라.’
회귀 후 당장의 상황파악과 백작가의 홀대, 그리고 그 백작가를 엿 먹이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뒤로 미뤄두고 있었다.
지크는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조금 더 노력을 해보자 어머니와의 추억이 조금씩 떠올랐다.
후처에게 밀리고 아들을 걱정하는, 하지만 세상에 당당한 아름다운 어머니의 기억이….
【너는 아직 그거 하나 못 하느냐!】
지크는 순간 추억에서 빠져나왔다. 아니, 그건 추억이 아니었다.
‘뭐지?’
열지 말아야 할 기억의 상자를 억지로 비틀어 부순 것 같다. 두 번의 결투 때에도 흘리지 않은 식은땀이 등을 옅게 젖혔다.
지크는 조심스레 다시 한번 어머니를 떠올렸다.
【백작가를 이어야 할 아이가 그렇게 유약해서 어디다 쓰겠느냐!】
생각나는 건 잔소리와 모멸의 폭풍. 여기까지는 그나마 아이에게 엄한 -아무리 생각해도 정도를 훨씬 넘어섰긴 하지만- 어머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떠오른 기억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게 대체 뭐냐! 내가 백작가의 저택은 항상 청결을 유지하도록 하라 하지 않았느냐! 내 명령을 무시하는 게냐!】
창문에 살짝 남은 먼지를 트집 잡아서 하녀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도 모자라 손찌검까지 하는 모습.
【경들은 조금이라도 예절이란 걸 배울 수 없습니까!】
왕국 최전선이기에 거칠 수밖에 없는 기사들을 상대로 예의 없다고 들들 볶는 모습.
【백작 부인인 내가 고작 이 정도의 돈으로 생활을 하라는 겁니까!】
백작가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집사에게 핏대를 세우는 모습.
【미색만으로 백작님을 홀린 천한 것이 어딜 나와 맞먹으려고 드는 게야!】
당시 후처였던 그레이그의 어머니, 플로렐 스틸월을 음험하게 괴롭히는 모습.
【천한 것의 핏줄을 타고 난 것은 어쩔 수 없구나!】
당시 어린 아이였던 그레이그에게 독설을 날리는 모습.
【백작님이 그렇게 저를 무시하시니까 다른 사람들마저 저를 얕보는 게 아닙니까!】
심지어 백작가의 주인인 백작에게마저 안하무인으로 덤벼드는 모습까지!
‘…음.’
천하의 지크도 이 기억엔 당황했다. 손을 머리에 얹고 기억을 정리했다.
‘맞아. 원래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었어.’
지크가 백작을 포함한 백작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경원시된 것도 대부분이 지크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것들은 지크의 어머니, 사라 스틸월이 저지른 짓이지만 사람이란 게 어디 논리대로 살 수 있는 생물이던가.
게다가 사라 스틸월에 비하면 후처인 플로렐 스틸월은 천사나 다름없는 인물.
지크를 모질게 대하는 그녀였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지크가 사라의 자식이자 그레이그의 라이벌이라서 그럴 뿐, 다른 자에게는 상당히 자상했다.
백작가 사람들의 마음이 플로라와 그레이그에게 기울 수밖에 없던 이유다.
‘어머니가 빨리 죽은 것에 대해서 안도한 사람이 한둘이 아닐 거야.’
그 더러운 성질머리 때문일까. 사라는 상당히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리고 백작 부인의 자리는 후처인 플로렐 스틸월이 차지했고 지크는 백작가의 거슬리는 이물질이 돼,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졌다.
“어이, 한스.”
“넵!”
“우리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하냐?”
“마, 마님이요? 당연히 아주 좋은 분이시죠!”
한스가 비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흔들리는 눈빛은 그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려줬다.
‘가만, 그러고 보니 어린 하인 중에 어머니가 특히나 더 괴롭히던 녀석이 있었지 않나?’
분명 현 백작 부인을 돌봐준 유모의 손자던가 하던 녀석이었다.
‘이 녀석이었군.’
한스를 보는 지크의 시선이 변했다.
짐꾼으로 쓰면서도 종종 괴롭히며 감히 자신을 능멸한 것을 계속 후회하게 만들려던 지크의 마음이 흔들렸다.
“어이.”
“넵!”
“가방 내놔.”
한스가 메고 있던 가방을 빼앗듯 넘겨받은 지크는 가방에서 물건 몇 개를 꺼냈다.
한스를 엿 먹이려고 잔뜩 넣어둔 무거운 물건들. 그중 몇 개를 자신의 가방에 옮겨 놓은 후 다시 돌려줬다.
눈을 끔벅거리는 한스에게 시선을 떼고 지크는 어느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백작가의 성이 있는 곳이었다.
지크가 백작가에 미안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얼마나 심했는지 떠올려보면 동정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었다.
‘어….’
머리를 벅벅 긁은 지크는 백작가에 있는 사람들은 듣지 못할 마음 속 한 마디를 던졌다.
‘다음에 뭔가 있으면 도와줄게.’
그래도 자신이 속했던 가문이니 한 번 쯤 도움의 손길을 내뻗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