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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9화 (9/628)
  • 제9화

    그레이그는 경기장 안으로 진입했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이 묘하게 무거웠다. 찐득하게 발을 잡아당기는 것 같은 지면을 억지로 뿌리치며 지크의 앞에 섰다.

    “아, 젠장! 아파! 적당히 해!”

    “그럼 치료를 받으세요!”

    “아니, 난 치료 안 받고 싸울 거라니까!”

    “그럼 입 다물고 있으세요! 금방 끝나니까!”

    신관이 지크의 상처 부위에 붕대를 꽉꽉 감으면서 고함친다. 지크는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리면서도 붕대를 묶기 쉽게 몸을 내줬다.

    “다 됐습니다.”

    “드디어 끝났나.”

    “어쩔 수 없이 응급처치만 해 드렸지만 지금 공자님은 출혈사 직전이라는 걸 명심하세요! 이기든 지든 빨리 끝내서 정식으로 치료를…!”

    “오, 이거 완전히 언데드 같은데? 미라 말이야. 던전 같은 데서 만난다면 공격을 받아도 할 말이 없…!”

    “제 얘기를 좀 들으세요!”

    거의 울 것 같은 신관을 지크는 억지로 경기장 밖으로 밀어냈다.

    그레이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앞에 서는 지크를 바라봤다.

    지크 자신이 ‘미라’라는 비유를 든 것이 틀리지 않게 그는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물론 응급처치 이상이 아니라서 새하얀 붕대가 빠른 속도로 새빨갛게 물들어갔다.

    ‘대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거야!’

    그레이그도 자신이 참을성이 꽤 있다고 생각했지만 절대 지크 정도는 아니었다.

    지크가 검을 붕붕 휘두른다. 묶인 붕대가 움직임을 방해하는 건 아닌지 확인하려는 용도였다.

    당연히 상처가 벌어지고 피가 붕대를 물들이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그러나 지크는 붕대가 움직임을 그다지 방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 만족했다.

    지크가 준비가 됐다는 신호를 줬다. 사회석에 있는 타이너가 외쳤다.

    “발검!”

    이번엔 여타의 미사여구가 없었다.

    지크의 상처를 우려해 최대한 빨리 진행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레이그가 검을 뽑아들고 지크는 이미 빼들고 있던 검을 들어 올렸다.

    “시작!”

    지크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두 번째 결투의 막이 올랐다.

    겁을 먹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지금까지의 훈련이 무색하지 않게 그레이그의 자세는 안정적이었다.

    그에 비해 지크는 검을 어깨에 댄 채 껄렁거리고 있었다.

    “뭐야. 안 오는 거냐? 설마 부상 입은 형이 먼저 공격을 하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이거 성질 더러운 놈이네.”

    가벼운 도발. 그레이그는 검을 곧추세운 채 쉽게 덤벼들지 않았다.

    ‘침착해. 분명 내가 유리한 상황이야.’

    지크는 당장이라도 쓰러지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다. 그에 비해 그레이그 자신은 어떤 부상도 없는 쌩쌩한 상태.

    지크의 실력은 분명 예상외지만 그걸 감안해도 자신이 유리하다.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지크와는 다르게 그레이그는 여러가지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 하지만 어째서…. 검을 잡은 손이 떨리는 것일까.

    “정말로 안 오려나보네. 하여간 귀염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녀석 같으니. 그래, 알았다. 이 형님께서 가 주마.”

    후웅!

    지크가 몸을 날렸다. 순간 발디딤부터 시작해 지크의 몸이 작게 휘청였다.

    확실히 상처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날아오는 검만큼은 무척이나 깨끗했다.

    “윽!”

    그레이그가 검을 곧추세워 막았다.

    ‘예상보다 충격이 없어.’

    역시 그 부상에 전력을 낼 수는 없는지 검을 받은 충격은 무척 미미했다. 두려움과 긴장에 굳어 있던 그레이그의 마음에 잠시 훈풍이 불었다.

    ‘이길 수 있어!’

    자신감을 가지고 그레이그가 공세로 돌아서려던 순간!

    채애앵!

    “큭!”

    간신히 막았다. 바람에 날아다니는 나뭇잎처럼 팔랑거리며 지크가 다시 일격을 날린 것이다.

    허를 찔린 그레이그가 주춤거렸다. 그 위로 폭풍 같은 지크의 공격이 쏟아져 내렸다.

    ‘아, 아까랑은 검술이 달라!’

    일격 일격의 무게는 가볍지만 그 속도가 장난 아니다. 바이너와 싸웠을 때와는 스타일이 완전히 달랐다.

    “이번엔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시군요!”

    트레얼이 기껍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트레얼로서는 다음 백작위를 이을 사람이 유능하면 할수록 좋았다. 지크의 예상외의 실력은 그에게는 좋은 오산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무척이나 소수다.

    크리스넌은 백작과 백작 부인의 눈치를 조심스레 보면서 대꾸했다.

    “아마도 부상 때문일 겁니다. 검을 부딪치는 충격에도 상처가 벌어질 테니, 힘을 흘려 그걸 최대한 줄이시려는 겁니다. 동시에 충격에서 오는 반동을 이용해서 오히려 역공을 가하시려는 것이기도 하고요. 보십시오. 검이 부딪치는 반동을 계속 이용하고 계시죠?”

    “쉬운 일입니까?”

    “그럴 리가요.”

    대답하면서도 크리스넌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거 생각보다 지크 공자가 너무 뛰어나군.’

    지금까지 보여준 지크의 모습은, 적어도 개인 무력에 관해서는 정말로 하늘이 내린 재능에 가까웠다.

    마력을 터득하고 바로 고급 기술을 사용할 수 있던 것, 결투를 혈투로 몰아가 훨씬 수준 높은 바이너를 쓰러뜨린 것, 그 이후 바로 그레이그와 결투를 하면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

    ‘기본 실력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야. 바이너의 경험 부족을 예리하게 찌르고 심리적으로 흔들리게 해서 격상의 상대를 이겼어. ‘이기는 법’을 알고 계신 거야.’

    그리고 ‘이기는 법’은 언제나 외부의 침입에 시달려 온 스틸월 백작가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레이그 님 정도면 다음 백작님으로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크리스넌은 옆에 앉은 백작과 백작 부인을 힐끔 쳐다봤다.

    ‘역시 표정이 별로시군.’

    그들의 마음이야 충분히 알 수 있다. 크리스넌은 다시 결투를 내려다 봤다.

    ‘그레이그 님의 실력으로는 우수한 백작님은 될 수 있겠지. 하지만 만약 지크 님이 백작위를 잇게 된다면….’

    그리고 지크의 다른 재능들이 결투 재능의 반만 따라갈 수 있다면….

    ‘지크 공자님은 위대한 백작님이 될 수 있겠지.’

    그 실력, 그 담력, 그 배짱. 정치라고는 거의 모르는, 순수한 무인에 가까운 크리스넌에게는 너무나 기꺼운 인재였다.

    그리고 그건 백작가의 환경상 다른 사람들도 비슷할 것이다. 고작 단 두 번의 결투로 지크에게 기우는 마음을 크리스넌은 억지로 다잡았다.

    순수한 무인인 크리스넌의 생각이 그렇다면, 집사인 트레얼의 생각은 좀 더 깊었다.

    ‘심모가 깊어.’

    부상을 입은 채로도 그레이그를 압도하고 있는 지크를 그는 지긋이 바라봤다.

    ‘지크 공자님의 실력이라면 분명 차근차근 그레이그 님을 밀어낼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 기간은 상당히 길 거야. 그 사이에 다른 변수가 생길 수도 있어. 백작님이나 그레이그 님도 이런저런 수를 쓰시겠지. 그러나 이번 결투로 인해서 지크 공자님은 자신의 실력을 백작가 전체에게 내보이셨다. 흔들리는 사람이 많겠지.’

    그중 대표가 옆에 있는 크리스넌이었다. 백작과 백작부인의 눈치를 보느라 필사적으로 평범한 안색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반짝거리고 있는 눈빛을 숨길 수는 없었다.

    ‘백작님이 사건 자체를 이렇게 크게 만들 것도 대충 예상하고 있었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바로바로 사건을 몰아갈 수 있을 리 없다.

    ‘아니,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해도 상관없어. 그만큼 임기응변이 뛰어나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맞췄다는 뜻이니까.’

    어느 쪽이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머리가 있단 뜻이다. 그것도 온통 자신의 적밖에 없는 곳에서.

    ‘만약 이 결투에서 진다고 해도 그 누구도 지크 공자의 패배라고 생각하지 않겠지. 그 천재 기사라는 바이너 경마저 꺾어 버리고, 그 부상 그대로 두 번째 결투를 치르는 거니까 말이야. 아무리 이긴 사람이 백작가를 잇겠다는 비공식적인 약속을 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일.’

    지크와 그레이그의 이미지가 그대로였다면 그 비공식적인 약속은 강력한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둘의 이미지는 변했다.

    ‘게다가, 만약 저 상태에서 지크 공자가 그레이그 공자마저 꺾어버린다면 그 파장은 엄청나겠지.’

    부상을 입은 채 하는 연전에서 상대를 꺾는 일에 스틸월 백작가로서는 다른 귀족 가문보다 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

    ‘리스크는 대폭 줄이고 리턴은 대폭 늘렸어. 백작님 면전에서 하인을 죽이겠다고 칼을 들었다 들었을 때는 차별 때문에 결국 폭발해버렸다고 혀를 찼었는데, 이건 오히려 좋은 쪽으로 폭발한 것 아닌가?’

    앞으로 조금 더 살펴봐야 할 테지만 지금 이 순간, 트레얼은 지크 쪽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기사는 기사대로, 관료는 관료대로 자신들의 관점에서 경기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가장 머릿속이 복잡한 건 역시 백작이었다.

    “…….”

    고집스러운 눈매가 한층 더 뻣뻣해졌다.

    “백작님.”

    불안한 목소리. 백작 부인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백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그레이그가 지진 않겠죠?”

    “…….”

    백작은 대꾸하지 않았다. 묵묵히 경기장만을 노려봤다.

    ‘만약 여기서 지크가 이긴다면….’

    백작으로서의 입장을 생각하자면 지크의 변화를 무척이나 기꺼워해야 한다. 하지만 백작은 지금 상황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백작은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셈법을 복잡하게 생각했다.

    * * *

    채앵!

    다시 한번 지크의 공격이 막힌다. 지크는 그 반동을 이용해 다시 그레이그를 공격했다.

    ‘장난 아니게 아프네!’

    겉으로는 태연하게 그레이그를 공격하는 지크였지만 몸은 엉망진창이었다. 전장에서 온갖 부상을 입어 본 숙련된 전사라도 침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올 정도.

    ‘슬슬 진짜로 위험하려나.’

    조금만 있으면 출혈과다로 인한 어지럼증 때문에 몸을 가눌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레이그 녀석도 충분히 겁을 집어먹은 것 같으니, 슬슬 다시 ‘혈투’를 시작해 볼까?’

    지크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그레이그가 움찔했다.

    타앗!

    지금까지 충격을 최대한 줄이려던 지크가 힘을 가득 주고 땅을 박찼다. 상처에서 피가 ‘푸슉’ 튀었다.

    그레이그가 당황해 검을 내질렀다. 지크는 오른발을 디뎌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완전히 회피할 수 없어 그레이그의 검은 지크의 팔뚝을 스쳤다.

    그러나 지크는 멈추지 않았다.

    ‘이건!’

    그레이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 지크가 뭘 하려는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혈투!’

    그의 생각대로 지크는 상처는 아랑곳없이 그레이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크윽!”

    그레이그가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의 가슴에 붉은 사선이 길게 생겼다.

    깊은 상처는 아니다. 피부가 얇게 베인 정도. 하지만 그레이그의 심장은 사정없이 뛰었다.

    “자, 동생아! 그럼 본격적으로 형제의 우애를 나눠보자꾸나!”

    그레이그의 심정은 아랑곳없이 지크는 웃으며 검을 휘둘러댔다.

    심적으로 몰린 그레이그의 검이 어지러워졌다. 그리고 그만큼 몸에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부상 따위는 상관도 하지 않고 피를 흘리면서도 미친 듯 웃으며 검을 휘두르는 지크의 모습이 그레이그는 마치 악마처럼 보였다.

    채앵!

    검이 부딪치며 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안색은 확연하게 달랐다.

    “동생아, 동생아, 내 동생아. 왜 그렇게 얼굴이 굳은 거냐?”

    “뭔 상관이야!”

    그레이그가 나름 거칠게 답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겁먹은 개가 짖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겁먹었냐? 뭐에 겁을 먹은 거냐? 갑자기 이 위대한 형이 무섭게 보이던?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진 후의 파장이 신경이 쓰이던?”

    “…….”

    그레이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나, 지크도 그레이그의 대답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아하하하! 걱정 마라! 설마 이 형이 정말 너를 박살내려고 이런 쇼를 벌이고 있을까. 이건 다 너를 위한 거야. 지금 네가 느끼고 있는 분노, 공포, 열등감을 뛰어 넘으면 넌 분명 한 꺼풀 더 벗어던지고 위를 향할 거다!”

    놀랍게도 지크는 빈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역시 지크는 지크.

    “뭐, 뛰어 넘지 못하면 그대로 주저앉겠지만.”

    짐승 같은 지크의 눈이 그레이그를 노려봤다.

    “개인적으로는 네가 제발 후자의 상황에 빠지길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빈다!”

    눈앞에 있는 두 개의 칼날의 예기조차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운 말이 그레이그의 심부를 후볐다.

    결투는 점점 거칠어졌다. 지크의 몸에 두른 붕대는 이미 제몫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레이그의 몸도 점점 상처가 많아졌다.

    아무리 무가라 해도 아직 전장에조차 서 보지 않은 그레이그는 압박감에 숨이 턱턱 막혔다.

    평소 그렇게 다짐하던 용감함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얕보고 깔봤던 형이 너무 무섭게 보였다.

    “하…!”

    결국 그는 압박감에 졌다.

    “항복! 항복한다!”

    우뚝!

    미친 듯이 춤추던 지크의 검이 멈췄다.

    털썩!

    그레이그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그의 앞에 피 묻은 지크의 검이 흔들흔들 거렸다.

    지크가 검을 거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타이너를 올려다봤다.

    타이너는 묵묵히 손을 올려 소리쳤다.

    “승리! 지크 스틸월 공자님!”

    그건 백작가에 거대한 혼란을 낳는 신호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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