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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6화 (6/628)

제6화

결투의 날이 밝았다. 백작가는 아침부터 기묘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백작의 눈 밖에 난 장남 지크와 젊은 천재 기사 바이너의 결투는 이미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게다가 이 이후,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백작위 계승을 걸고 지크와 그레이그의 결투까지 잡혀 있다 보니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크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없었고 원하는 사람도 없었다. 정말로 지크는 가문 내에서 철저히 외면받고 있었다.

‘아주 작정하고 벌였군.’

원형의 경기장. 세련됐다는 표현보다는 투박하다라는 말이 어울린다. 하지만 규모가 상당해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무를 중시하는 변경백의 가문답게 그들은 종종 검투 시합 같은 걸 열고는 했다. 원형 경기장은 그때 사용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지금. 지크와 바이너와의 결투에 백작이 마련한 장소이기도 했다.

‘고작해야 결투 한 번에 원형 경기장까지 준비하다니.’

아무리 지크가 백작가의 장자라고 하지만 규모가 너무 크다.

‘내 패배를 더 널리 알리고 그만큼 평판을 깎기 위해서겠지.’

의도가 훤히 보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그리고 나도 원하던 바기도 하고.’

지크는 주변을 둘러봤다. 계단식의 관중석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가문의 기사들은 물론이고 영지의 관료와 가신들도 섞여 있었다. 시간 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온 것 같았다.

관중석을 훑던 지크의 시선이 멈췄다. 가장 상석의 자리에 백작 가족이 앉아 있었다.

여전히 근엄한지 뚱한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백작. 그 옆에서 백작에게 뭐라뭐라 말을 하고 있는 백작 부인. 그리고 오연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레이그.

‘아주 잘 어울리는 가족이군.’

이미 저곳에 자신의 자리는 없었다.

‘어렸을 때의 나는 그걸 몰랐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아까운 시간이다.

‘돌아가신 내 어머니가 불쌍하군.’

지크는 재수없는 가족의 모습에서 눈을 뗐다.

쓸데없는 걸 계속 봐서 눈을 버릴 필요는 없다. 그것보다 지금은 눈앞의 상대를 신경 써야 했다.

‘이를 바득바득 갈았겠지.’

지크의 앞에 서 있는 바이너의 표정은 누가 봐도 복수전을 잔뜩 벼른 사람의 그것이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당장이라도 검을 뽑고 싶은 것처럼 손을 움찔거린다.

“이 순간을 많이 기다렸나 보지?”

“…….”

바이너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핏발 선 눈이 오로지 지크를 노려보고 있었다.

“열심히 노력하라고. 네 추태를 가리려면 지금 이 순간이 최적의 상황이니까.”

바이너가 지크에게 당했다는 건 소수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만이 적을 뿐, 소문은 알게 모르게 백작령에 퍼져 있었다.

그 소문을 소문으로 남기려면, 바이너는 여기서 반드시 지크를 이겨야 했다.

바이너가 짓씹듯 말했다.

“걱정 마시오. 공자님에게 받은 교훈은 뼈에 깊게 새겼으니까 말이오. 이제는 오히려 제가 교훈을 드릴 차례가 아닌가 싶소. 남의 방심을 이용해 승리를 얻는 데는 한계가 있고, 결국 남는 건 실력이란 걸 말이오.”

그의 말대로 바이너가 흘리는 기세와 자세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전장의 앞에 선, 말 그대로 기사의 그것이었다.

“자세는 칭찬할 만하군. 하지만 그것도 알고 있지? 여기서 진다면 역효과라는 걸 말이야.”

“마력을 다루기 시작하셨다 들었는데.”

“그레이그 녀석에게서 들었나보지?”

“제가 아는 것에 대해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 것 같소.”

“생각이 있으면 알 수밖에 없지. 그레이그 녀석이 내게 불리해질 소문을 내지 않을 리가 없잖아.”

“설마 마력을 다루기 시작한 걸 믿고 자신감을 가지신 거요?”

“많은 이유 중 하나일 뿐이야.”

그제야 바이너가 미소를 지었다.

긍정이라곤 한 톨도 느껴지지 않은 미소에 지크는 오히려 내심 감탄을 터뜨렸다.

‘좋은 미소야. 사람 엿 먹이고 짓는다면 몇 배로 속을 긁어댈 수 있겠는 걸? 나중에 연습해 봐야겠어.’

역시 세상에는 배울 게 많았다.

“그렇다면 내가 그 착각을 철저하게 깨뜨려 드리지.”

“그래. 열심히 노력해라. 걸린 건 네 명예뿐만이 아니니까.”

지크는 엄지손가락으로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경기장이 워낙에 커 띄엄띄엄 들어 차 있는 관중석의 상황 덕에 지크가 가리킨 대상은 어렵지 않게 특정할 수 있었다.

괜히 지크에게 까불었다가 두들겨 맞은 한스라는 하인이 경기장과 관중석을 가르는 벽에 매달리듯 달라붙어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만약 바이너가 여기서 진다면 한스의 인생은 끝이었다. 바이너는 명예가 실추되고 벌을 받게 되겠지만, 한스는 물리적으로 목이 달아날 수 있는 것이다.

“걱정 마시오. 내가 질 리는 없소.”

그래서 자신의 실추된 명예를 되살리고 지크에게 쓴 맛도 보여줄 것이다.

“지금부터 결투를 시작한다!”

상석에서 백작의 옆에 대기하던 기사가 상석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사회석으로 이동하며 외쳤다.

목소리에 마력을 실었는지 목소리가 경기장 구석구석 퍼졌다.

‘정말로 작정하고 나왔군.’

지금 목소리를 내지른 자는 평범한 자가 아니다.

왕국의 강철벽이라는 스틸월 백작가. 그중에서도 언제나 전장의 선두에 서는 최정예 ‘강철검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스틸월 백작가의 최고, 최강의 기사라 칭해지는 ‘미헨 타이너’가 바로 그였다.

중년을 넘어 슬슬 노년으로 접어들 나이를 증명하듯 머리와 수염의 반은 이미 흰색으로 뒤덮여 있다.

하지만 언뜻 보이는 부푼 근육과 튀어나온 힘줄은 절대로 막을 수 없다는 세월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는 것 같았다.

‘타이너 기사단장이 결투의 사회라니. 이 얼마나 호화스러운 결투냐.’

물론 전혀 고맙지는 않았다.

“이번 결투는 위대한 스틸월 백작가의 장자이신 지크 스틸월 공자님과 ‘강철창 기사단’의 ‘할튼 바이너’의 결투로, 누군가 의식을 잃거나 패배를 인정할 때까지 진행한다! 살인은 인정하지 않는다!”

관중석이 술렁거렸다.

살인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 놀란 게 아니다. 아무리 배척받더라도 백작가의 장자가 결투에 참가하는데 살인을 인정할 리 있는가.

관중들이 놀란 건 오히려 다른 조건 쪽이었다.

“의식을 잃거나 패배를 인정할 때까지라니. 그건 상처를 얼마나 입어도 말리러 들어가지 않는다는 거 아냐?”

“치명상을 입어도 계속 진행한다는 소린데. 이거 정말 괜찮은 건가?”

이 결투 방식은 생사투를 제외하면 가장 격렬하고 위험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건 바이너도 같은 생각이었다.

“정말로 괜찮겠소? 저런 조건을 걸어도.”

“왜 겁나나?”

“만용의 대가는 비싸오.”

“저번처럼 네 뒤통수를 까면 그만인 일이잖아.”

결투 조건을 제안한 지크는 다른 사람들의 걱정과 생각은 아랑곳없이 태연하기만 했다. 하지만 치욕스러운 순간을 다시 언급당한 바이너의 심사는 꼬였다.

“…알겠소.”

죽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생각보다 더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 바이너의 마음이 독해졌다.

“비록 둘의 의견이 달라 검을 들게 됐으나, 그 의도는 순수할지니! 그대들의 검으로 그 순수한 의지를 증명하길 바란다!”

“순수하긴 순수하지. 자기 잘못을 덮으려고 거짓말에 결투까지 받아들일 정도로.”

심부를 후벼파는 빈정거림. 바이너는 지그시 이를 물었다.

“발검!”

챙!

챙!

지크와 바이너가 검을 뽑아들었다.

웅성거리던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짙은 긴장감이 경기장을 휘감았다.

“시작!”

두 개의 검이 동시에 움직였다.

채앵!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충격에 검들이 튕겨나왔다. 지크와 바이너는 부드럽게 검을 수습했다. 약간의 거리가 생겼다.

탓!

먼저 달려든 건 바이너였다. 그는 이 결투를 오래 끌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짧고 압도적으로. 그래야 그 치욕스러운 패배를 덮을 수 있다.

‘부상을 좀 심하게 입혀도 상관없어! 힘 조절은 둘째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포션과 신관도 준비되어 있다.

불끈!

마력이 흐르며 그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인간의 근육만으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초인적인 힘이 그의 몸 안에 휘몰아쳤다.

우우우웅!

근육을 강화한 마력이 이제는 검에까지 흘러들어간다. 검이 깊게 울기 시작했다. 피를 보려 아우성치는 살인귀의 비명소리 같았다.

‘끝이군.’

사회로서 경기를 주의 깊게 보고 있던 타이너는 짐작했다. 그가 아는 지크의 실력으로는 지금의 일격을 막을 수 없었다.

‘마력을 다루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초보자가 막을 수 있는 일격이 아냐.’

그는 바로 움직일 수 있게 근육을 긴장시켰다.

아무리 가문에서 반쯤 내놓은 자라지만 그래도 백작가의 장자다.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버리게 할 수는 없다.

‘바이너도 너무 흥분했어. 역시 저 녀석은 심상 훈련 같은 걸 더 시켜야….’

채애애애앵!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그의 상념을 뒤흔들었다.

무척이나 높고 짜릿한, 비슷한 기세의 검이 맞부딪쳤을 때 나는 그 소리.

타이너는 흘러 다니던 상념을 단숨에 짓부쉈다.

‘저건….’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바이너와 팽팽하게 겨루고 있는 지크의 모습. 타이너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 * *

검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크게 휘둘러지다가도 순식간에 거두어지고, 또다시 날카롭게 찔러 들어간다.

관중석은 기이한 열기와 흥분 그리고 당혹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부상은 기본,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결투의 분위기 때문에 고양된 것이 열기와 흥분이라면, 당혹감은 상상 이상으로 잘 싸우고 있는 지크의 분전 때문이었다.

카앙! 카앙!

벌써 몇십 번째인지 모를 검격이 교차된다.

바이너의 검이 휘둘러졌다. 살기가 번들거렸다. 과연 정식 기사 작위를 딴 것은 폼이 아니었는지 나름 세련된 기술이 강맹한 힘을 더해 휘둘러졌다.

카아앙!

하지만 이번에도 바이너의 검은 지크의 검에 막혔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빌어먹을!’

바이너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속으로 이미 몇천 번이나 욕설을 내뱉었다.

최대한 빨리 지크를 쓰러뜨려 실추된 명예를 만회하겠다는 계획은 이미 한참 일그러져 있었다. 관중석에 퍼져 있는 분위기가 경기장 안까지 느껴졌다.

‘검술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인간 따위에게!’

이대로 있다가는 오히려 명예가 떨어지게 생겼다.

분명 우세를 점하고 있는 건 바이너였다. 하지만 고작 우세를 점하는 정도로는 안 됐다.

탓!

바이너는 뒤로 멀리 물러났다.

‘승부를 건다!’

검을 눕혀 얼굴 옆에 갖다 댄다. 검 끝은 정확하게 지크의 목을 향했다.

‘큰 게 온다.’

지크도 자세를 잡았다. 두 다리를 태산처럼 디디고 팔을 내밀어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바이너의 검이 미친 듯 울며 몸에 마력이 광폭하게 흐른다.

노도 같은 마력의 흐름은 몸을 한 바퀴 돌고 검신에 타고 흘러들어갔다가 다시 몸으로 흡수됐다. 거대한 순환이 검과 몸을 이었다.

그 순간, 바이너의 감각은 몸을 넘어 검까지 이어졌다.

‘저건!’

타이너가 눈을 크게 떴다. 바이너의 상태를 알 수 있던 사람들도 상당히 놀랐다.

백작도 엉거주춤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만큼 바이너가 사용한 기술은 상당한 고급 기술이었다.

백작가의 대다수 기사들도 사용 가능한 기술이긴 하지만 적어도 바이너 나이대의 사람이 사용할 만한 기술은 아니다.

슈욱!

빛살처럼 바이너의 몸이 늘어진다.

하지만 그건 눈의 착각. 어느 순간 바이너의 검 끝이 지크의 목 앞까지 드리워졌다.

‘잡았다!’

바이너가 눈을 빛낸 순간.

콰앙!

검에 충격을 느낀 바이너가 급히 몸을 세우고 흔들리는 검을 부여잡았다.

끼기기긱!

바이너의 검이 지크의 검신을 훑으며 흘러내린다.

턱!

지크의 가드에 바이너의 검신이 걸리며 검의 움직임이 멈췄다.

지크는 자신의 얼굴 옆으로 드리워진 바이너의 검신을 한 번 흘끗 보고 씨익 웃었다.

“내가 뭐랬냐.”

회심의 일격이 막혀 경악한 바이너의 귀로 지크의 음성이 들렸다.

“너 만만하다고 했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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