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화 (5/628)

제5화

결투라는 폭탄을 터뜨린 다음 날. 지크는 아침부터 백작가의 뒷 정원에 나와 있었다.

조그만 숲처럼 꾸며진 그곳에는 인적이 없었다.

“후우!”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검을 부여잡는다. 아침 특유의 신선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꾸욱!

들고 있는 검의 자루를 꽉 쥔다.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몇 번 숨을 들이켠 지크는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쌔액!

날이 선 검이 공간을 베었다. 아침 이슬을 영롱하게 머금은 풀잎이 화들짝 놀라 흔들렸다.

스윽!

자연스럽게 발이 움직여 몸을 이동시켰다. 포장되지 않은 바닥이 작게 흙먼지를 내뿜었다.

콱!

이동한 발에 체중을 싣고 몸을 회전했다. 회전력은 허리와 어깨, 팔을 거쳐 검 끝까지 향했다.

쐐애액!

아름다운 반원이 섬뜩하게 그려진다.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이 날카로운 검기에 부서지며 오색찬란한 빛깔을 뿜었다.

후웅! 후웅! 후우웅!

이번의 검격은 달랐다. 아까의 검격이 모든 걸 베어버릴 듯 날카로웠다면 이번 검격은 마치 몽둥이로 후려치듯 무거웠다.

지크의 검은 계속해서 변했다. 빨랐다가 느려지고 날카로웠다가 둔중해졌다.

그렇게 얼마 쯤 검을 휘둘렀을까.

“후우!”

지크는 검을 휘두르는 걸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온몸에는 땀이 가득했다.

‘나름 괜찮군.’

주먹을 쥐었다 펴 본다. 거칠지만 새하얀 손이 보였다.

열아홉 살의 몸. 비록 검술은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있다지만 기본기는 착실히 쌓고 있던 시기였다.

물론 ‘힘의 마왕’이라 칭해졌던 때에 비하면 같잖기 그지없는 힘이다.

하지만 나이를 생각하면 충분히 잘 단련된 육체였다.

‘오히려 제대로 검술을 배우지 않은 게 더 이득이 됐어.’

비유를 하자면 지금 지크의 육체는 철저하게 순수한 육체였다. 뼈대조차 세워지지 않은, 하지만 기초 공사만큼은 누구보다 튼튼히 된 육체.

그 위에 ‘힘의 마왕’이라 불렸던 시절의 기술과 경험을 쏟아 붓는다면 누구보다 빠르게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유를 생각하면 씁쓸하지만.’

아무리 백작이 검술을 가르치길 꺼렸다고 해도 명색이 왕국을 지키는 강철 벽이라고 칭해지는 가문이다. 검술을 배울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을 리 없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가문의 고유 검술을 배우겠답시고 기초 검술을 제외한 다른 검술은 거들떠도 안 봤지.’

백작위나 가문의 검술에 목맸던 게 아니다. 그저 그것들이 아버지의 관심의 결과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이때의 나는 정말로 순진했단 말이야.’

만약 ‘힘의 마왕 지크 모어’를 알고 있는 자들이 어렸을 때의 ‘유약한 소년 지크 스틸월’을 알게 된다면 자신의 눈이나 머리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잘못됐는지 심각하게 고민할 것이다.

‘뭐, 가문 나가서 고생을 많이 했으니.’

정말로 그가 ‘힘의 마왕’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얻기까지는 엄청난 시련과 고생이 있었다. 그렇게 줄줄이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게 신기할 정도로.

‘마치 누군가 꾸며 놓은 것 같았지.’

하지만 지크는 피식 웃엇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백작가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힘도 돈도 배경도 없는 놈을 그렇게 진득하게 괴롭히는 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 재능이 아니었다면 골백번은 더 죽었어.’

쓰잘데기 없는 생각은 그만 두고 지크는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육체의 완성도는 마음에 들긴 하지만, 역시 결투를 이기는 건 힘들겠군.’

20대 초반의 천재 기사 바이너. 육체의 완성도 면에서 지크는 그를 따라갈 수 없다.

기술도 저쪽이 위. 물론 ‘지크 모어’의 기술이 딸릴 리는 없지만 기술이란 건 알고만 있는 걸로는 반 쪽 자리일 뿐이다.

‘수도 없이 연습해서 말 그대로 육체에 때려 박아야지. 그래야 반사적으로 육체가 움직일 테니까.’

그리고 현재 지크의 몸은 그 정도로 숙달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후우!”

지크는 몸에서 긴장을 풀고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거센 움직임을 대비해 근육을 이완시키려던 아까와는 목적이 다르다. 지크는 눈을 감고 자신의 내부를 관조했다.

선선히 부는 바람이 피부를 간질이고 발로부터 느껴지는 대지가 굳건하다.

그것들을 무시하고 더욱 안으로 들어갔다. 두근거리는 맥박이 진동하고 온몸을 타고 도는 혈액의 흐름이 느껴졌다.

더욱더 안으로 침잠했다.

순간 무언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기끼리 얼기설기 엮여 꿈쩍도 하지 않는 거대한 존재감.

무차별적으로 주변에 방출할 시 웬만한 대도시 하나 정도는 순식간에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막강한 힘이 거기 있었다.

지크는 그 존재를 슬슬 매만졌다.

바깥에는 관심조차 없는지 그것은 그저 존재하기만 할 뿐, 지크의 자극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지크의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고도로 집중하여 그 존재를 계속해서 자극했다.

꿈틀!

그 존재가 반응했다. 순간 지크의 집중력이 깨졌다.

휘청!

지크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털썩!

한쪽 무릎을 꿇었다가 아예 바닥에 엉덩이를 대버렸다.

“크윽, 젠장! 여전히 까다롭기 그지없는 녀석!”

지크는 자신의 심장 어림에 손을 가져다 댔다.

지크의 안에 존재하는, 거대하고 파괴적인 존재. 그건 지크의 안에 똬리를 튼 거대한 마력이었다.

‘그렇게 집중했는데도 고작 일부만 깨어났냐.’

허탈함도 잠시. 지크는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

‘어쩔 수 없나. 난 마력 하나만은 타고 났으니까.’

마력은 선천적으로 한계가 정해져 있다. 그리고 지크는 그 마력이 평범한 사람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강했다.

‘여행 때 만났던 엘프가 예전에 사라진 드래곤에 비교할 정도였으니.’

지크를 ‘힘의 마왕’으로 만들어 준 요소 중 하나가 이 고대의 드래곤에 비교될 정도의 마력이었다.

하지만 지금 시기 지크의 마력은 없느니만 못한 상태였다. 이 압도적인 질과 양의 마력을 이 시기의 지크는 제대로 다룰 수 없었다.

‘많아도 좀 많아야지.’

지크가 자신의 마력을 완전히 다룰 수 있게 된 건 가문을 나선 후에도 한참이나 뒤였다.

때문에 지크 스틸월에게는 마력이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가문 내에 만연해 있었다. 지크의 백작위 계승을 멀어지게 만든 또 하나의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 지크의 내용물은 ‘마왕 지크 모어’. 물론 당장 굳어 있는 마력을 완전히 풀어낼 수는 없었지만 그 첫 걸음은 뗄 수 있었다.

그 증거로 지금 지크의 손에는 미약한 마력이 살랑거리고 있었다.

‘이걸로 승산이 더 높아졌군.’

하지만 그래봤자다.

아무리 지크가 마왕 시절의 방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도, 이제 어느 정도 마력을 사용할 수 있어도 기사의 강력한 능력을 당해내기에는 부족했다.

‘기본 능력 자체가 다르니까.’

하지만 상관없다. 애초에 그것들 전부 감안하고 결투를 신청한 것이다.

‘져도 잃을 것도 없고.’

이미 지크는 백작가를 나서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새로운 삶도 좋지만 백작위를 잇는 건 아냐. 이으려다가는 내 속이 터질지도 몰라.’

동생과 경쟁하며 자기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인간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하나하나 돌려야 하다니.

‘성질나서 제명에 못 죽을 게 확실해. 물려받기 전에 백작가를 완전히 뒤집어 놓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럴 확률이 더 높았다. 아니, 확실했다.

그럴 바에는 그냥 마음 편하게 백작가를 떠나는 게 나았다.

“이제야 마력을 각성했나 봐?”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지크는 인상을 찡그린 채 시선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뭐냐? 훔쳐보고 있었으면 그냥 가라. 귀찮게 하지 말고.”

“알고 있었어?”

“그렇게 티 나게 움직였으면서 뭔 개소리냐? 오거가 움직이는 줄 알았다.”

지크에게 말을 건 사내, 그레이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름 조심히 움직였는데.’

무슨 암살을 하는 처럼 아예 기척을 없앤 건 아니다. 하지만 대놓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적어도 그가 아는 지크는 그 정도로 기척 탐색에 뛰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말투나 행동도 여전히 이상하고.’

백작이나 백작 부인은 지크의 변화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정도로 두 부부에게 있어 지크는 내놓은 자식이었다.

하지만 그레이그는 지크의 변화가 영 마음에 걸렸다.

그레이그가 말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자 지크의 인상이 더 찌푸려졌다.

“뭐야. 용건이 있으면 말을 하고 없으면 꺼져.”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뭐가? 제발 말은 좀 똑바로 하자.”

“바이너 경과의 결투. 그리고 백작위 계승.”

그레이그의 말투가 조금 거칠어졌다.

“무슨 생각으로 행동을 바꿨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소용없다는 건 알잖아? 적당히 눈치 보면서 살다가 물러나. 나중에 섭섭지 않게 챙겨줄 테니까.”

‘하! 이놈 봐라?’

백작 자리에 미련은 없지만 이렇게 말을 하니 또 열 받는다.

지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레이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지크가 다가옴에도 그레이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렵냐? 백작위를 내게 뺏길까 봐?”

“두려울 게 뭐 있겠어. 고작 지크 스틸월 하나 밀어내지 못하면 백작위는 포기해야지.”

도발적인 미소. 정말로 지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감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당연히 지크의 감정이 좋을 리 만무할 노릇. 하지만 지크는 화를 내지 않았다. 역으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 동생이 그렇다면 그래줘야지. 형제 좋다는 게 뭐겠냐.”

지크는 그레이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레이그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 표정을 감상하며 지크가 다시 말했다.

“그렇지만 나도 장자로서의 자존심이 있지 않겠냐. 그러니 우리 이렇게 하자.”

“어떻게?”

“우리는 무가다. 당연히 다른 가문보다 개인 무력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지.”

“설마 결투로 승부를 내자는 거야? 계승권을 걸고?”

“왜 아니겠냐.”

그레이그가 지크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바이너 경과의 일도 그렇고. 나랑도 결투를 하겠다고? 제 정신이야?”

“무섭냐?”

그레이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입을 앙 다물고 지크를 노려봤다.

“…좋아. 못 할 것 없지.”

‘그렇게 나오겠지.’

이 당시 그레이그는 상당한 성취를 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검술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마력도 이제 갓 다루는 자신의 도발을 받아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결투는 허락해도 그걸 백작위 계승과 연관 지을 수는 없어.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개인 무력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게 전부인 것도 아니다.

게다가 아무리 백작가의 모든 인간들이 지크를 몰아내려 똘똘 뭉쳐있다고 해도 고작 결투 하나로 백작위 계승자를 가릴 수도 없다. 정통성은 지크에게 있는 것이다.

“그건 당연하지, 멍청아. 다만 아버지가 소문을 낼 거야. 내가 계승권을 걸고 결투로 도전을 했다고. 그때 내가 지면 어떻게 되겠냐. 비공식적이라도 나는 계승권을 두고 다투다 진 패배자가 돼서 계승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지게 되겠지. 아무리 모든 걸 힘으로만 해결할 것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아버지라도 귀족이다. 그걸로 수작질 한두 개 정도는 뚝딱 만들어낼 걸.”

그레이그는 턱을 쓰다듬었다. 지크의 말을 들어보면 결투에서 그가 얻는 게 적진 않았다.

“그럼 내가 백작위를 잇는데 방해되는 게 상당히 사라지는군.”

“맞아. 단, 네가 이긴다면 가능한 이야기지만. 네가 진다면 여파는 더 클 거다. 검술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마력도 잘 못 다루는 나에게 진다는 거니까. 아무리 아버지가 밀어주려고 해도 반발이 튀어나오겠지. 귀족이지만, 우리는 무가니까.”

그레이그의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내가 형한테 진다고?”

“자신 있냐?”

“나는 아직도 형이 제정신인지 의문일 뿐이야.”

“내가 미치면 너한테는 더 좋지 않겠냐. 아무리 장자라도 미친놈한테 작위를 물려줄 순 없으니까.”

“그것도 그렇군. 좋아. 당장 아버지에게 얘기하겠어.”

“잠깐.”

떠나려는 그레이그를 지크가 만류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나한테 유리한 점을 좀 줄 순 있지?”

“…무슨 꿍꿍이야?”

그레이그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의심은. 그저 결투 시점은 내가 정한다는 거다.”

그레이그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든, 그 정도 이득을 준다고 해도 자신의 승리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좋아. 단, 나도 요구 조건이 있어. 적어도 반 년 안에는 해.”

괜히 결투를 질질 끌면서 흐지부지되는 걸 그레이그는 원치 않았다.

“좋아.”

“잊지 마. 반년이야. 바이너 경과의 결투 때문에 부상을 입었느니 어쩌니 하는 변명도 안 통해.”

짧은 시간에 거기까지 머리를 굴린 모양이다.

“걱정 마라. 오래 끌 생각은 없으니까.”

지크의 확답에 그레이그는 만족한 듯 뒤돌아섰다.

떠나는 동생의 등 뒤로 지크는 다시 한번 검을 쥐었다.

‘저렇게 날 얕보는데, 떠나기 전에 커다란 선물 하나는 주고 가야지.’

후웅!

마치 그를 향한 적의를 토막 내듯, 그의 검이 날카롭게 공간을 갈랐다.

그리고 며칠 뒤, 지크와 바이너의 결투 시간이 다가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