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지크는 하인이 있는 곳으로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일절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에 더한 살벌한 살의.
그제야 사람들은 지크의 행동이 무언의 반항이나 어떤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닌, 말 그대로 하인을 죽이기 위한 것임을 알아챘다.
“마, 마님!”
하인의 애원에 백작 부인이 ‘핫!’ 정신을 차렸다.
“머, 멈춰라! 멈추지 못하겠느냐! 어디 부모 앞에서 피를 보려고 하는 게냐! 그런 버르장머리는 어디서 배워먹었어!”
“설마 제가 부모님 앞에서 피를 볼 리가요, 어머니. 당연히 저놈은 끌어 내 적절한 곳에서 처리할 생각입니다, 어머니. 백작 가문의 정! 통! 계승자인 저를 모욕한 건 백작가 그 자체를 모욕한 것이니, 저도 가슴이 아프지만 어쩔 수가 있겠습니까, 어머니.”
백작 부인의 노호성에도 지크는 능글맞게 대답했다.
“한스가 너를 모욕했다니! 그 아이가 그럴 리 있겠느냐!”
‘아, 어쩐지 하인 치고 굉장히 콧대가 높다고 생각했더니, 백작 부인 쪽의 사람이었나?’
아마도 저 한스란 하인은 백작 부인이 시집 올 때 데리고 온 하인의 자식인가 뭐 그럴 확률이 높았다.
“맞, 맞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런단 말씀이십니까!”
한스가 넙죽 엎드리며 말했다. 그의 등허리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원래 이럴 계획이 아니었다.
뭔가 훼까닥 했는지 자신을 때린 지크를 벌주고 겸사겸사 그의 평판을 깎아 내려 그레이그의 백작 계승에 조금 더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원래라면 지크는 고개를 숙여 변명하기 급급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크가 아무리 변명을 한다 해도 백작은 기사와 하인의 말을 증거 삼아 그를 꾸짖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지크의 정신 나간 행동에 완전히 파탄 나버렸다.
설마 백작 앞에서 칼을 들고 설칠 줄은 몰랐다. 덕분에 분위기가 이상해져 버렸다.
지크의 말처럼 하인이 지크에게 한 짓은 정말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짓이다.
지금까지야 지크의 소심함과 그의 약한 처지가 겹쳐 무례한 짓을 해도 잡음이 나오지 않았지만 만약 지크가 정말로 자신을 죽이겠다고 집착한다면?
그리고 지금의 묘한 분위기 때문에 백작 부인이 자신을 제대로 변호해주지 못한다면?
‘여기서 잘못 말했다가는 정말로 죽는다!’
드디어 하인의 마음속에 본격적인 위험 신호가 울리기 시작했다.
“저는 절대로 무례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한단 소린가?”
“그, 그건…!”
‘당연하지!’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솟아올랐다. 하지만 서늘한 지크의 눈이 그의 심부를 옥죄었다.
하인이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다른 이에게서 대답이 나왔다.
“그렇습니다! 첫째 공자님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필사적인 목소리. 사람들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특히 하인은 지옥 속에서 튀어 나온 구세주를 보는 눈빛이었다.
‘바이너란 기사 놈이군.’
목소리의 주인은 하인과 같이 지크에게 쳐맞은 바이너였다.
지크가 방 안에 들어올 때는 꽤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던 녀석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크는 녀석을 통쾌하게 바라봤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지? 감히 어설픈 수작으로 너를 엿 먹인 나를 단죄하고 싶었는데 예상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니까 미치고 팔짝 뛰겠지?’
지금이야 하인의 일만이 화제가 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지크가 단죄한다고 선언한 자에는 바이너 또한 끼어 있었다.
기사는 준귀족 취급이니 하인처럼 목이 베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직접적으로 지크에게 해를 끼치려고 했다.
물론 심하게 다룰 생각은 아니었고 그 정도는 백작과 백작 부인이 충분히 무마해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니, 예전의 지크라면 백작에게 항의를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면서 지크에게 맞은 하인이 역으로 바닥에 엎드려 부들부들 떠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만약 여기서 하인의 죄를 묻게 된다면? 거기서 바이너에게까지 죄를 묻는 분위기가 성립된다면?
‘나도 벌을 피해갈 수 없다.’
바이너의 마음에도 불안이 솟구쳤다. 그건 그가 경험이 별로 없는 젊은 기사였기에 더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바이너 경. 그게 사실인가요?”
백작 부인이 반색하며 물었다.
아무래도 하인의 발언보다는 기사의 발언이 더 무게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
“네, 부인! 하인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지크 님에게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했습니다.”
“기사란 작자가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했다는 낯부끄러운 소리를 잘도 하네. 스틸월 백작가의 기사 수준도 옛날 같지 않나?”
지크가 빈정대자 바이너의 얼굴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백작도 똥 씹은 표정으로 끙끙댔다.
“그, 그건 첫째 공자님이 비겁하게….”
“푸하하하하! 스틸월 백작가의 기사가 비겁이라니! 전쟁터에서도 비겁 운운 할 건가? 설마 대 스틸월가에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중앙 약골들과 똑같은 생각을 가진 머저리가 있을 줄이야!”
지크는 과장되게 소리내어 웃었다. 바이너의 얼굴이 더욱 부풀었다.
특히 중앙의 기사들과 비교를 할 때는 수치심에 몸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스틸월 백작가의 기사들은 전쟁을 모르는 중앙의 기사들과는 다르다는 자부심을 은연 중 갖고 있었다. 지크는 지금 그걸 정통으로 후벼 판 것이다.
“어떻게 말해도 사실은 다르지 않습니다!”
바이너는 이제 거의 악을 쓰듯 말했다.
“저렇게 말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거짓말일 게 뻔하지 않습니까, 아버지. 죄를 묻는 게 두려워 수치도 없이 변명을 해대고 있을 뿐입니다.”
“아닙니다! 거짓말은 공자께서 하고 계십니다!”
두 주장이 팽팽히 맞선다. 바이너의 말 속에는 수치와 창피함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그의 거짓말은 효과가 있었다.
“아무래도 바이너 경의 말이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정식 기사 분인데 아버님 앞에서 거짓을 말할 리가요.”
묵묵히 사태를 관망하던 그레이그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래, 네가 안 끼어들면 이상하지.’
언제나 지크가 곤란에 처했을 때 옆에서 툭툭 끼어들어 지크를 더욱 곤란으로 밀어 넣는 존재. 그게 지크가 기억하는 동생의 모습이었다.
“그, 그렇습니다!”
그레이그가 자신의 편을 들자 바이너의 표정이 밝아졌다.
지크와 그레이그의 눈이 마주쳤다.
씨익!
그레이그가 웃었다.
무척이나 얄미운 웃음. 하지만 지금의 지크에게는 가소롭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지크는 마주 웃어줬다. 그레이그의 표정이 굳었다. 자신이 곤경에 밀어 넣으면 언제나 난처한 표정을 짓던 형의 반응이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지크는 더 이상 그레이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뭐, 여기까진가.’
애초에 주변에 지크의 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저 지크의 예전 같지 않은 행동에 잠시 휩쓸렸을 뿐.
슬슬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는 걸 느낀 지크는, 제3자가 본다면 헛웃음을 짓거나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이 촌극을 끝내기로 했다.
‘애초에 진짜 하인 놈의 목을 베거나 기사 놈을 엿 먹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여기서는 말이다.
지크는 바이너에게로 움직였다. 순간 방 안에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지크도 그렇고 바이너도 그렇고 지금 검을 빼들고 있는 상황. 언쟁마저 격해져 있으니 칼부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게야!”
당연히 백작이 노호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지크는 듣는 둥 마는 둥 바이너의 앞에 섰다. 바이너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하나 당황하며 지크에게 검을 겨눴다.
“어이.”
“뭐, 뭡니까.”
지크가 검을 들어 올릴 낌새가 없자 조금 마음을 놓으면서 바이너가 대답했다.
“너, 네 죄 인정할 생각 없지?”
“누누이 말하지만 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겠지. 양심을 팔아 치운 기사 새끼가 옳은 말을 할 리 없으니까.”
다시 한번 바이너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반응을 보니 그렇게까지 쓰레기는 아닌가 보네.’
지크 자신이라면 저 정도 거짓말에 저렇게 보기 쉬운 반응을 보이진 않을 것이다.
‘순진한 녀석.’
그렇게 생각하면 언뜻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그것, 이건 이것이다.
‘거짓말을 해서 나를 엿 먹이려고 한 건 변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건 성질 더러운 그에게는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여기서 이렇게 ‘네가 옳네! 내가 옳네!’ 말로만 싸우지 말자고. 우리한테는 좋은 게 있잖아?”
지크가 검을 들어 올려 바이너의 검을 툭툭 건드렸다.
“…결투를 하자는 겁니까?”
“그래. 바로 그거야.”
“제정신입니까?”
바이너는 기사단에서 가장 어리다. 하지만 그 나이에 정식 기사 작위를 받은 천재이기도 했다. 그 실력은 확실하다.
무엇보다 백작 부인의 견제에 지크는 검술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지크가 바이너에게 결투를 신청하다니.
“제정신이냐니. 너야말로 얼마 전에 나한테 뒤통수 맞고 기절한 자식이 무슨 놈의 자신감으로 그딴 소리를 지껄이냐?”
바이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일로 동료들에게 얼마나 비웃음 당했던가.
“좋습니다! 결투, 하죠!”
지크가 어깨를 으쓱이며 백작을 바라봤다.
“그렇게 됐습니다, 아버지. 시기나 장소는 아버지가 적당히 잡아 주세요.”
“진심이냐?”
“이 자식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고 왜 이렇게 나를 얕잡아 보는지, 원. 충분히 승산이 있어서 골랐습니다. 나한테 뒤통수 쳐 맞고 뻗은 만만한 놈이니까요.”
“…그래. 그렇다면 그러도록 해라.”
백작은 크게 말리지 않았다.
‘녀석이 바이너를 너무 얕보는군.’
얘기는 들었다. 방심한 바이너를 지크가 어떻게 때려눕혔는지.
천박한 전투 방법이었지만 얘기를 들었을 때 백작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을 지키는 강철의 벽, 스틸월 백작가.
그 가문을 이끌고 오랜 세월을 외적과 맞서 싸워 온 백작에게 더러운 전투란 없었다. 그렇기에 지크의 승리만큼은 순수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야.’
방심하지 않은 기사와 같은 조건에서 싸우는 결투로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백작은 지크가 자만에 빠졌다고 느꼈다.
‘한번 크게 당해보는 것도 좋겠지.’
평소 못마땅하던 아들이다. 한번 쓴 맛을 보여주는 것에 백작은 별 감흥이 없었다.
거기에 그레이그에게 백작위를 넘겨주기 위한 명분으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기 잘못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려 무리하게 결투를 신청하다 당했다. 그러면 녀석의 평가를 깎을 수 있어.’
하인과 바이너를 때린 것에 대해 크게 꾸짖으려 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지크가 결투에서 지면 바이너의 의견이 옳은 것이 되니, 꾸중은 그때 하면 그만이었다.
“시간과 장소는 내가 적당히 알리 마.”
“그럼 그런 걸로 알겠습니다.”
지크는 검을 원래의 자리에 갖다 놓았다. 그 걸음걸이에는 얼마 전까지 보였던 소심함과 공손함은 사라져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를 쫓았다.
“…변했구나.”
백작이 나직이 물었다. 입구를 향하던 지크가 고개를 돌렸다.
“예전처럼 있어 봤자 제가 원하는 건 얻을 수 없단 걸 알았을 뿐입니다. 괜히 힘 빼며 광대짓을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어? 백작위 말이냐?”
아까의 대화가 생각 나 백작이 불쾌하게 물었다.
지크는 실소를 흘렸다.
“강철의 명장이라 불리는 분도 가족의 일에는 편견에 눈이 흐려지시는군요.”
“뭐?”
“지금의 아버지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닿지 않겠죠. 부디 편하게, 원하는 대로 생각하시길.”
그리고 지크는 과장되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