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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3화 (3/628)

제3화

지크는 두터운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걷고 있었다.

양 옆에는 귀족 가문답게 고급스러운 장식들이 늘어 서 있었다. 하지만 변경백이라는 지위를 생각해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가치를 지닌 것들이었다.

말 그대로 변경백으로서 최저의 품위만을 위해 배치해 놓은 장식품들. 성의 주인의 품성을 짐작하게 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지크는 주변 장식품들엔 전혀 관심 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버지인가.’

가문에서 나온 후 말 그대로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존재. 그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용건이야 하인 놈과 기사 놈을 후려 패 버린 일 때문이겠지.’

전후사정을 따져 보면 지크에게 죄는 없다.

그가 조금 과하게 손을 쓰긴 했지만, 하인과 기사가 그에게 행한 무례를 생각한다면 절대 과하지 않았다.

특히 하인은 목을 쳐 날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

‘정상적이라면 그렇겠지.’

아쉽게도 지금 가문은 지크 자신에게만큼은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지크가 가문의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가문을 나온 이유였다.

척!

지크는 날카로운 이미지의 늑대 얼굴이 새겨져 있는 문 앞에서 멈췄다. 문 양 옆에는 병사들이 검을 찬 채 호위를 하고 있었다.

지크가 고개를 까딱였다.

쿵! 쿵! 쿵!

병사 한 명이 문을 두드렸다.

“백작님. 지크 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라.”

안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시죠.”

병사가 원위치로 돌아갔다. 지크는 문을 잠시 물끄러미 쳐다봤다.

‘예전에는 이 문을 들어가기가 무척 어려웠던 것 같은데.’

이제는 잘 생각조차 나지 않는 과거의 기억.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다르다. 그는 단 1g의 두려움이나 거리낌 없이 문을 열어 젖혔다.

가장 먼저 지크의 눈에 들어온 건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는, 철사 같은 수염을 기른 장년인이었다. 형형한 눈과 고집스런 입술이 인상 깊다.

그가 바로 이 변경백의 주인이자 지크의 아버지인 보르도 스틸월 백작이었다.

하지만 주변엔 그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 비싼 포션으로 치료를 받았는지 아니면 귀한 신관을 불렀는지 멀쩡해 보이는, 자신에게 죽도록 얻어맞았던 기사 바이너와 하인이 백작의 곁에 서 있었다.

‘그리고….’

백작을 중심으로, 기사와 하인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이 갔다.

‘어머니, 그리고 동생이로군.’

눈가와 입가에 미세한 주름을 달고 있지만 아직 충분한 미색을 뿜어내고 있는 자가 어머니인 플로렐 스틸월.

그리고 그녀의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적갈색 머리의 매끈한 얼굴을 한 녀석이 동생인 그레이그 스틸월.

지크의 입장이 하인조차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안 좋아진 이유다.

‘하긴, 굳이 저 둘에게만 책임을 미룰 순 없겠지.’

지크의 시선이 다시 백작에게 고정됐다.

‘이 인간이 동의하지 않았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가문은 가문의 주인인 변경백의 의지대로 돌아간다. 그 말은 곧, 지크에 대한 불손한 대접은 백작의 뜻이라는 것과 같다.

백작의 형형한 눈이 지크를 바라봤다. 원래의 지크라면 눈을 내리깔고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지크는 달랐다. 빳빳하게 목을 세우고 계속 백작과 눈을 마주쳤다.

꿈틀!

백작의 눈썹이 움직였다.

“…이제는 인사하는 방법마저 까먹은 게냐?”

나지막하지만 분명 분노에 찬 음성이다.

예전 마왕이라 불리던 지크라면 백작의 분노에 콧방귀를 끼며 오히려 백작의 머리를 강제로 아래로 쳐박았겠지만, 웬일인지 지크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고개를 까닥인 수준이었다.

백작의 눈썹 움직임이 더 심해졌다.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군.’

하지만 지크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회귀하기 전 그의 성격대로 일단 뒤집어 놓고 생각할까 싶었지만 곧 그만뒀다.

일단 회귀한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스틸월 백작가는 수백 년간 외적의 공세를 막아 온 명망 있는 가문이다. 그 무력은 왕국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다.

게다가 새로 얻은 이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아직 정하지도 않지 않았는가.

첫 단추부터 회귀 전처럼 깽판으로 장식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지크가 생각하는 깽판의 개념과 일반적인 깽판의 개념은 좀 달랐지만.

“거 보세요, 백작님. 이 애가 이렇답니다. 제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기본적인 예의조차 제대로 안 차린다고요. 제 동생과 어미조차 무시하던 아이가 이제는 아비마저 무시하네요! 부모 마음에 못을 박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얼씨구. 놀고 있네.’

가증스럽게 거짓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 아니 새어머니를 보며 지크는 속으로 콧방귀를 끼었다.

“아버님, 어머님. 형님께서 잠시 피곤하셔서 그런 모양입니다. 고의가 아니실 겁니다.”

‘아주 끼리끼리.’

동생, 그것도 이복동생의 가식적인 옹호에는 웃음보가 터질 것 같았다.

지크의 가족사는 간단하면 간단하고 복잡하다면 복잡했다.

원 백작 부인이자 장자의 어머니가 죽은 후 그 자리를 꿰찬 후처. 그리고 그 후처의 배에서 태어난 이복동생.

변경백의 자리를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 후처가 먼저 태어난 장자를 배제하려고 한다.

‘시중에 나도는 싸구려 삼류 소설의 스토리도 이렇게까지 진부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싸구려 삼류 스토리가 아직까지 멀쩡한 현역이었다.

“너는 할 말이 없느냐?”

잘난 이복동생의 위선이 통한 것일까. 백작의 음성이 한껏 거칠어졌다.

그리고 지크는 아버지의 거칠어진 마음을 보듬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뭘 말입니까?”

대놓고 불량스러운 말투. 백작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 또한 적잖게 놀랐다.

지크 스틸월이란 인간은 기본적으로 조용하고 사람들에게, 특히 백작에게 항상 공손했다.

그건 고립된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아버지의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아이의 몸부림이었다.

‘근데 그건 이제 나랑 상관없거든.’

쾅!

백작이 옆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백작이 분노하는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지크만은 태연했다.

“그나마 예절 하나만은 봐줄 만하다고 여겼는데 이젠 그것마저 내팽개치는 게냐! 그런 썩어빠진 정신머리로 훗날에 어찌 백작위를 이어 받는단 말이냐!”

“줄 생각은 있으십니까?”

“뭣!”

설마 이런 대답이 날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터라 백작은 말이 막혔다.

주변에서는 둘의 언쟁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당연하지! 장자는 너다! 너에게 백작위를 이어 받을 수 없을 정도의 하자가 없다면 당연히 너에게 물려줘야지!”

하지만 지크는 백작의 말에서 내용과는 달리 탐탁지 않아 하는 어조를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말만 본다면 지크를 편드는 것 같지만, ‘하자가 없다면’이란 조건을 넣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하자를 정하는 건 댁이겠지.’

지크는 무척이나 과장되게 허리를 숙였다.

“위대한 아버지께서 그런 공평한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니. 이 모자란 아들은 기뻐서 하늘이라도 나는 것 같군요.”

극도의 존칭은 빈정거림이나 마찬가지다.

백작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먼저 불호령을 내린 것은 백작이 아니었다.

“네 어찌 아버지께 그런 오만불손한 언동을 취한단 말이더냐! 당장 사과드리지 못하느냐!”

백작 부인이 노호성을 내질렀다.

“제가 어찌 존경하는 아버지께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인단 말입니까. 오해십니다.”

그러며 지크는 단어 하나를 덧붙였다.

“어머니.”

한마디를 더 하려던 백작 부인이 입을 닫았다. 동그란 눈이 당황에 이리저리 움직였다.

“어머니? 지금 그렇게 불렀더냐?”

“네, 아버지. 지금까지는 백작 부인이라고 불렀지만, 아무래도 모자간에 그런 호칭은 너무 딱딱해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어머니?”

백작 부인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크는 상관하지 않았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어머니. 혹시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어머니? 의사를 부르는 게 어떨까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소리를 들을 때마다 백작 부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떫은 과일을 씹은 것처럼 볼이 씰룩였다. 그게 재밌어 지크는 말 마디마디마다 어머니 소리를 붙였다.

백작 부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하진 못했다.

아무리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아니더라도 자식이 아니던가. 자식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걸 막을 순 없었다.

“괘, 괜찮다. 어디 아픈 건 아니구나.”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어머니.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의사에게 검진을 받아보시지요, 어머니. 그래야 저도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

“크흠!”

이제는 숫제 그녀의 얼굴에 목이 졸려 죽기 직전의 사람처럼 보랏빛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백작이 헛기침으로 지크의 어머니 연타를 끊었다.

“…오늘 왜 널 불렀는지 아느냐?”

백작이 탐색하는 눈빛으로 지크를 살폈다. 오늘의 지크는 평소와 너무나 달랐다.

“아마도 저 둘의 이야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크가 하인과 기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렇다. 내, 네 녀석이 한 일에 대해…!”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버지.”

지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방금까지의 껄렁한 태도와는 정반대되는 아주 공손한 사과에 백작의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뒤이은 지크의 행보에 경악해야 했다.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괜히 아버지를 번거롭게 해버렸군요. 이후부터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지크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당황한 시선들이 그의 등을 쫓았다.

지크가 향한 곳은 방 한쪽 벽에 X자로 교차되어 걸려 있는 장식용 검이었다.

스릉!

과연 무가인 것일까. 장식용 검조차 섬뜩하게 날이 서 있었다.

지크는 검을 들고 뒤돌아섰다.

챙! 챙!

바이너와 그레이그가 검을 빼들어 백작과 백작 부인의 앞을 막아섰다.

“네놈! 뭐 하는 짓이냐!”

토마토처럼 시뻘겋게 얼굴을 물들인 백작이 노호성을 내질렀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뒤처리를 하려 한다고요.”

“뭔 놈의 뒤처리!”

검을 가볍게 늘어뜨린 지크는 당황해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하인을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가리켰다.

“당연히 귀족을 모욕한 저놈의 목을 쳐야죠.”

“뭐!”

백작의 눈에 핏발이 섰다. 하지만 지크는 뻔뻔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그 때문에 절 부른 게 아니셨습니까? 감히 대스틸월 백작가의, 아버님께서 인정하신 정! 통! 계승자인 저에게 막말을 한 저놈, 아니 저놈들의 처리를 위해서 말이죠.”

지크는 하인에 더해 자신을 황당한 눈으로 보고 있는 바이너까지 포함시켰다.

“저야 개인적 체벌을 했으니 더 이상 화제를 만들지 않으려고 했으나, 아버지께서 만족하지 못하시겠다면 어쩔 수 없죠. 생각해보니 제가 너무 안일했습니다. 감히 대 스틸월 백작 가문의 정! 통! 계승자인 저를 모욕한 놈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는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깔끔하게 목을 베서 성문 앞에 걸어 놓겠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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