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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2화 (2/628)

제2화

‘이것 참 희한하네.’

지크는 상의를 벗고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내려다 봤다. 균형잡힌 근육이 보기 좋게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마왕이란 불린 시절, 몸을 한계까지 쥐어짜 만들었던 근육은 아니었다.

몸뚱이를 도화지 삼아 거대한 세계지도를 그린 것처럼 보일 정도로 심한 흉터도 없었다.

그는 침대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그, 재수없는 그렌 제너드와 붙었던 건 확실해. 그놈과 일행에게 진 것도 사실이고. 죽기 일보직전까지 몰린 것도 사실이야.’

아니, 죽기 일보 직전이이라는 말조차 웃기다. 몸이 거의 두 동강 나고 목이 베였으니만큼 그냥 죽었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이리라.

‘그런데 멀쩡하게 살아 있단 말이지.’

그것도 마치 시간을 거스른 듯 어려져서 말이다.

‘꿈은 아니야.’

이미 몇 번이나 확인을 해봤다. 힘껏 후려친 뺨이 아직도 얼얼했다.

그는 자기가 죽기 전 상황을 곰곰이 되새겨봤다.

‘그 재수 없는 놈과 그 일행한테 패배하고. 그 재수 없는 놈이 떠벌이는 걸 듣고.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그의 눈이 빛났다.

‘운명을 비트는 열쇠로 제너드 놈을 찔렀지. 설마 그것 때문인가?’

그저 찌른 자의 미래를 바꾼다고만 알고 있던 마도구. 이유라고는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걸 어디서 얻었지?’

지크의 표정이 굳었다.

‘기억이 나지 않아.’

어디서 얻었는지만이 아니다. 발견한 시기, 발견한 장소는 물론이고 그걸 검지에 박아 넣은 순간까지. ‘운명을 비트는 열쇠’에 관한 모든 것이 그의 뇌리 속에 없었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검지에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박혀 있다는 것만 인식하고 있었다.

‘아니. 침착하자, 지크 모어. 단순히 내가 까먹은 걸 수도 있어.’

그는 사소한 것은 잘 잊어버리곤 했다. 생각이 나지 않는 건 그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내 인식을 뒤틀어버린 거라면.’

지크는 ‘운명을 비트는 열쇠’가 박혀 있던 검지를 내려다 봤다.

‘일단 열쇠에 대해서 알아봐야겠어.’

목표 하나가 생겼다.

하지만 그의 심각한 분위기는 거기까지였다.

‘자,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살까? 마도구 하나 알아보는 걸로 평생을 보내기엔 시간이 아까운데.’

단서도 없는 흔적을 쫓는데 모든 심력을 쏟아 붓고 싶진 않았다. 다른 목표가 필요했다.

예전처럼 마왕이란 칭호를 들으며 피의 길을 가도 좋았고, 아니면 아예 색다른 인생을 사는 것도 좋았다.

아무튼 전혀 예상치 못한 두 번째 삶이 아니던가.

‘즐기지 않으면 손해지.’

그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일단 지금이 어느 시기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어디 보자. 주변 환경을 생각해보면 아마 아직 가문에서 나오지 않은 때 같은데.’

그는 놀랍게도 거친 성정과는 다르게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것도 꽤 명문가문의.

모어라는 성은 그가 붙인 것뿐, 원래의 성은 스틸월. 그 의미답게 오랜 세월동안 왕국을 철벽처럼 지켜온 변경백 가문의 성이었다.

‘일단은 내가 장남이니 가문을 잇는 것도 좋겠지.’

예전에는 스스로 가문을 나와 떠돌았다. 그리고 오로지 힘을 추구하며 ‘힘의 마왕’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하지만 이번엔 가문을 이어 귀족 놀음을 하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그런데 내가 가문을 왜 떠났었지?’

그때였다.

끼익!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생각이 방해 받자 지크는 눈살을 찌푸리며 들어온 자를 쳐다봤다.

‘귀족 가문 장남의 방을 이렇게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건가?’

가문을 나온 뒤 예의 따윈 밥 말아 먹고 세상을 휘저은 그지만 적어도 그 정도 상식은 있었다.

‘부모 형제라도 되나?’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방에 들어온 건 하인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하인 맞지?’

설마 자신이 착각한 것일까. 하지만 사내의 차림새는 분명 하인의 그것이었다.

하인이 지크를 쳐다봤다. 놀랍게도 그리고 열 받게도 하인은 그를 보고 눈을 찌푸렸다.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인이, 귀족을 보고, 눈을 찌푸린 것이다.

“아직까지 방에 있었습니까?”

‘다행히 존댓말은 하는군.’

워낙에 태도가 불손해서 대뜸 반말이라도 내뱉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걸 다행히라고 해야 하는지 의문스러웠다.

“평소에는 새벽부터 나가시더니 이젠 그것도 포기하신 겁니까? 게으름 부릴 처지가 아니실 텐데요.”

‘…저거 빈정거리는 거 맞지? 뭔가 내가 모르는 속뜻이 있는 건 아니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건 아니었다.

“하!”

헛웃음이 터졌다. 그는 손짓을 해서 하인을 불렀다.

하인은 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지크는 미소까지 지어가며 계속 손짓을 했다.

하인이 건들건들한 걸음새로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뭡니까?”

마치 안 와도 되는데 불쌍해서 와줬단 식의 태도.

지크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마치 태산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지크의 체구는 무척이나 컸다. 하인보다 머리 한개 반은 더 높았다.

압도적인 체격 차에 겁을 먹을 만도 하건만, 하인은 삐딱한 눈초리를 숨기지 않고 그를 올려다봤다.

지크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고 하인을 가만히 내려다 봤다.

“사람을 불렀으면 말을….”

하인이 불평을 내뱉을 때였다.

퍼어억!

지크의 주먹이 날아갔다. 호쾌한 타격음이 하인의 뺨에서 울렸다.

“커억!”

우당탕!

바람에 날리는 종이 인형처럼 하인의 몸이 날아가 고급스러운 작은 서랍에 부딪쳤다.

서랍이 넘어지며 큰 소리를 냈고 하인은 그 위로 쓰레기 포대처럼 엎어졌다.

“아아아악!”

고통에 하인이 몸부림쳤다. 입가에서 피가 줄줄 새며 새하얀 치아 몇 개가 같이 흘렀다. 뺨이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뮤, 뮤흔 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하인이 지크를 노려봤다.

‘무슨 짓’이냐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발음이 새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저벅!

지크는 쓰러져 있는 하인에게 다가갔다. 분노 어린 눈으로 지크를 노려보던 하인이 흠칫했다.

지크의 얼굴에 떠 있던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겨울 북풍보다 냉막한 살의였다.

지크가 발을 들었다.

“먀, 먀님히 갸먄 있…!”

콰직!

“끄에에에엑!”

지크는 무심히 하인을 짓밟기 시작했다.

뭔가 ‘마님이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같은 소리를 지껄인 것 같았지만 알 게 뭔가.

지크는 정말로 사정없이 하인을 짓밟았다.

대체 뭘 믿고 있는 건지 초반엔 밟히면서도 계속 뭐라고 떠들어대던 하인도, 표정 변화 없이 기계처럼 자신을 밟는데만 집중하는 지크에게 질려버렸다.

‘설마 죽이겠어?’라던 생각도 ‘이러다간 정말 죽는다!’로 변했다.

“쟈, 쟈알 못…!”

하인이 퉁퉁 부은 입술로 용서를 빌었다.

뚝!

지크의 발길질이 멈췄다.

마치 세계가 멸망하는 날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본 사람처럼 하인이 허겁지겁 엎드렸다.

어찌나 거센 기세로 엎드렸는지 땅에 들러붙는 것 같았다.

“쟈, 쟈못 했슙니댜! 쟈못 했슙니댜!”

눈물 콧물 핏물 범벅인 얼굴로 계속 용서를 빈다. 지크는 들고 있던 발을 내려 놓았다.

“주제 파악은 좀 했냐?”

하인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다시 젊었을 적으로 돌아온 좋은 날이니 이 정도만 할까.’

지크는 이만 하인을 용서할까 생각했다.

벌컥!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자만 아니었다면.

제복을 입고 허리에 칼을 찬 자였다.

‘기사로군.’

아마 가문의 호위기사 쯤 되는 인물일 것이다.

상당히 젊게 생긴 걸 보니 천재 소리 좀 들어 본 인물이 아닌가 싶었다.

‘비명소리를 듣고 왔나.’

기사가 눈동자를 굴려 지크와 하인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인상을 썼다.

“뱌, 뱌이녀 기샤님!”

하인이 구원자를 만난 듯 지크의 발에서 떨어져 기사, 바이너에게 기어갔다.

지크는 하인을 쫓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바이너가 자신의 다리에 들러붙는 하인에게 물었다.

“져, 져 쟈가…!”

‘저 자?’

지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벌레처럼 살려달라 빌 때는 언제고 비빌 언덕이 나타나니 다시 반골심이 고개를 든 모양이었다.

지크가 다시 하인을 향해 다가갔다.

“히익!”

하인이 허겁지겁 기사의 뒤로 숨었다.

척!

지크의 앞을 바이너의 손이 막아섰다.

“무슨 짓이오.”

‘얼씨구? 이 새끼도 말이 짧네?’

분명 가문 소속의 기사가 분명한데도 그에게는 가문의 장자에 대한 예의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가벼운 경멸의 빛까지 비쳤다.

“비켜.”

“무슨 짓이냐고 물었소.”

“무슨 짓? 방금 저 새끼가 한 ‘저 자’라는 말 못 들었어? 하인 나부랭이 따위가 귀족, 그것도 자기가 섬기는 가문의 장자에게 하는 말본새라기엔 너무 시건방지지 않아?”

분명 지크에게는 명분이 있었다. 성격 나쁜 귀족이라면 하인의 혀를 뽑아버렸을 것이다.

바이너도 그 정도는 알 터. 하지만 기사는 여전히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내가 처리하겠소.”

“필요 없어. 교육은 내가 직접 시킬 거야.”

“내가 처리한다고 했소.”

지크는 기사를 빤히 쳐다봤다. 기사의 뒤로 엉거주춤 일어선 하인이 보인다.

고통 속에서도 녀석은 웃고 있었다. 마치 ‘이젠 어쩔 테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너도 말이 짧다?”

바이너가 피식 웃었다.

“그럼 어쩔 것이오? 나도 두들겨 팰 생각이오?”

“못 할 것도 없지. 주인도 못 알아보는 개새끼는 패야 꼬리를 내리거든.”

바이너가 지크를 경멸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그래도 자기 주제를 알고 조용히 지내는 걸 좋게 봐줬거늘. 이젠 그냥 막 나가기로 작정한 건가. 시정잡배 같은 말투는 또 어디서 배워먹었는지. 역시 이 자는 다음 대 후계자로 어울리지 않아.’

“그럼 해보시오.”

마치 쳐보라는 듯 바이너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후웅!

지크의 주먹이 움직였다.

바이너가 흠칫했다. 설마 정말로 주먹을 휘두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도 도박으로 기사 작위를 딴 게 아니었다.

허리를 꺾어 지크의 주먹을 피했다.

‘제법이군.’

지크가 꾸준히 수련을 하고 있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한다 하더라도 지크의 주먹질은 매서웠다.

‘하지만 그래도 미숙해.’

기사인 자신을 쓰러뜨릴 수준은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주제파악을 시켜주는 것도 괜찮겠지.’

주먹을 뻗은 후의 빈틈 사이로 바이너가 지크의 복부를 노렸다. 하지만 지크는 발목을 비틀어 쓰러지듯 몸을 피했다.

턱!

한 바퀴 구른 지크가 침대 옆에서 몸을 일으켰다.

거리가 벌어졌지만 바이너는 이 작은 전투를 쉽게 끝낼 생각이 없었다.

일어서려는 지크에게 달려가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가볍게 얼굴을 한 방 후려갈기고 끝낼 생각이었다.

펄럭!

그의 눈앞이 흰색으로 물들었다.

‘뭐야!’

그건 이불이었다. 바이너는 급히 손을 움직여 덮쳐오는 이불을 걷어 냈다.

시야가 다시 확보됐을 때, 눈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뱌이너 님, 뒤…!”

하인의 다급한 목소리에 바이너가 급히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와장창!

“끄억!”

뒤통수에 큰 충격이 덮쳤다.

털썩!

바이너가 허무하게 바닥에 쓰러졌다. 피가 흐르는 그의 머리 주변으로 탐스러운 꽃과 물, 그리고 깨진 화분 조각이 널부러졌다.

“실력이 다가 아냐, 이 새꺄.”

성공적으로 바이너의 머리에 화분을 꽂아 넣은 지크가 만족스럽게 욕설을 내뱉었다.

역시 상대는 파릇파릇한 나이인 만큼 변칙 공격에 약했다.

‘병신. 내가 미쳤다고 너랑 정정당당하게 싸우냐?’

아무리 ‘힘의 마왕’이라 불린 시절의 기술이 있다고 해도 이 덜 여문 몸으로 기사와 싸운다는 건 무리였다. 아직 어려진 몸에 익숙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왕이라 불렸던 지크다.

수많은 사투를 헤쳐 나온 경험을 통해 검도 뽑지 않은 젊은 기사 한 놈 정도는 쉽게 때려눕힐 수 있었다.

‘이 녀석은 정신을 잃었으니 나중에 밟고.’

지크의 시선이 하인에게 향했다.

퉁퉁 부은 하인의 얼굴이 공포로 질렸다.

“보호자가 나타났을 때는 기분 좋았지? 근데 보호자가 저 꼴이 났네? 이제 어떻게 할래?”

“샤, 샤려…!”

“걱정 마. 안 죽여.”

지크는 발을 들어 올렸다.

그때 문득 자신이 돌아오기 전, 그렌 제너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음에 태어난다면 부디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라!』

‘응, 내일부터 할게.’

그리고 지크의 방 주변에는 다른 기사가 소란을 듣고 달려 올 때까지 한참을 하인의 비명이 가득 채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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