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아아, 빌어먹을.’
어렸을 적 읽었던 동화책에 위대한 영웅이 죽어갈 때를 표현한 구절이 있었다.
하늘도 죽어 가는 영웅에 대해 애통해 하며 눈물 대신 비를 주륵주륵 흘렸다는 글귀.
왜인지는 모르지만 몇십 년을 지난 지금마저 그 글은 그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역시 나는 하늘에 사랑받지 않은 모양이야.’
사랑받기는커녕 쨍쨍한 태양에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를 보아하니 무척이나 미움받은 게 틀림없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한가.’
죽인 사람이 얼마고 눈물 흘리게 한 사람이 얼만가. 이 세상에 혼돈과 절망을 흩뿌리며 마왕이라고까지 불렸던 그다.
딱히 피나 살육을 좋아한 건 아니지만 꺼리지도 않았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삶.
하늘이 그를 사랑했다면 오히려 정신 차리라고 하늘의 뺨을 올려붙여야 할 것이다.
“끝난 건가.”
목소리가 들린다. 무척이나 정의롭고 고결해서 무지막지하게 재수없는 목소리가.
그는 하늘을 쳐다보던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반짝반짝 빛나는 갑옷을 입고 오연하게 그를 내려다보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세간에서는 영웅 중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자.
일명 ‘태양의 용사’라는, 오글거리다 못해 역겹기까지 한 칭호를 가진, 그렌 제너드라는 인간이었다.
‘겁나 잘 생겼네.’
저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봤으면.
‘어떻게, 시도해 봐?’
각도, 남아 있는 힘, 녀석의 회피력 등등. 몽롱한 머릿속에서도 이상하게 그런 계산은 잘 돌아갔다.
‘관두자.’
마지막 가는 길. 괜히 모양 빠지게 그딴 짓을 하긴 싫었다. 이래봬도 세상 사람들에게 마왕이라고까지 불린 프라이드가 있는 것이다.
‘아, 그런데 나 그딴 프라이드 없잖아.’
진지하게 녀석의 얼굴, 정확하게는 저 칼날처럼 오뚝 선 콧잔등에 침을 뱉으려 요모조모 각을 잴 때였다.
“너의 악행도 여기까지다! 마왕 지크 모어!”
‘식상한 단어 내뱉기는.’
재미없다. 정말로 재미없다. 누가 그림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놈 아니랄까 봐 녀석은 곰팡내 나는 3류 영웅 소설의 등장인물이나 할 법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동화책은 어릴 적에 놓았어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말을 할 힘은 없었다. 그저 눈을 껌뻑이며 눈앞의 영웅 나리를 쳐다볼 뿐이었다.
“빨리 처리해! 상대는 ‘힘의 마왕’이야. 언제 여력이 다시 돌아올지 몰라!”
“그래요!”
‘아니. 나 힘 없어. 몸 아파. 움직이기 싫어.’
뒤에서 얼른 자신을 처리하라며 보채는 용사의 동료들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열기도 귀찮았다. 게다가 왜 자신이 그런 친절한 설명을 해줘야 한단 말인가.
‘자기들 마음대로 경계하라지.’
다 죽어가는 자신을 보며 꺅꺅거리는 모습이 좀 웃겼다.
동시에 조금 뿌듯하기도 했다. 자신이 그만큼 위협적인 존재라는 뜻 아닌가.
“아니, 이 자는 더 이상 우리를 어찌할 힘이 없어.”
그렌의 단언에 지크는 김이 팍 샜다.
‘역시 이 자식은 재미가 없어.’
재미도 없고 재수도 없다.
‘다른 쓸데없는 짓 할 생각 말고 이 녀석이나 조져 놓을걸.’
이 마당에 ‘이 녀석만 해치워 놨으면 나는…!’ 같은 소리를 할 생각은 없다.
그저 순수하게, 이 재수없는 자식의 면상을 한 대 후려갈겼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척!
녀석이 검을 들이 밀었다.
날카로운 기세를 전혀 숨기지 않는, 영혼마저 베어버릴 것 같은 시린 날이 인상적인 성검.
“들어라, 지크 모어! 죽기 전에 네 녀석이 행한 악행을 낱낱이 읊어주마!”
‘이건 또 뭔 개소리야.’
아주 구구절절 헛소리가 일품이다. 지크는 녀석의 동료들을 쳐다봤다.
‘이런 녀석이랑 같이 다녔다니. 저 녀석들도 참 대단한 녀석들이군.’
자신을 향해 쏟아졌던 극대의 화염보다,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던 단단한 방패보다, 자신의 빈틈을 노리던 은밀한 화살보다, 일행의 능력치를 극도로 높이고 중상도 순식간에 치료하던 기적보다, 저 녀석과 같이 파티를 짜고 다닌 것이 더 대단해 보였다.
‘뭐, 어쩔 수 없나. 이 정도는 들어 줘야지.’
아무리 상대가 파티를 짜서 덤볐다지만, 자그마치 ‘힘의 마왕’이라 불린 자신이 정면대결에서 패배했다는 건 변명할 여지가 없다.
‘패자가 할 말이 뭐 있나. 승자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둬야지.’
그는 힘겹게 눈을 뜨고 제 멋대로 지껄이는 녀석을 쳐다봤다. 녀석은 자신의 역할에 취한 듯 자신을 보지도 않고 빠르게 말을 내뱉고 있었다.
‘혹시 외워 온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그 쓸데없는 노력에 찬사를 보내줘야 한다.
‘아니, 생각해보면 은근히 자존심 상할 일 아닌가? 나를 이길 생각 만만이었다는 거잖아.’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치솟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감정을 억눌렀다.
‘됐어. 내가 패배한 건 사실이니까.’
자기가 이겼으면 모르되, 패배한 상태에서 그런 것에 화를 내봤자 구질구질해 보일 뿐이다.
패자면 패자답게. 지크는 온 몸에 힘을 빼고 ‘악행’이란 걸 들었다.
‘아, 저런 일도 있었지. 그랬던 적도 있었고. 이야, 추억 돋는데? 제법 잘 조사해 온 모양이야.’
과거의 추억에 잠긴 노인처럼 지크는 자신이 걸어 온 행적을 귀담아 들었다. 정말로 ‘마왕’이란 별명이 잘 어울리게 피로 점철된 길이었다.
“…이 모든 죄로 말미암아, 마왕 지크 모어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리노라!”
‘응? 끝났나?’
지크는 자신이 걸어 온 길을 들으며 잠겼던 추억과 향수에서 깨어났다.
북돋는 아쉬움에 그는 입맛을 다셨다.
‘뭐, 마지막 가는 길에 좋은 선물 하나 받았네.’
이젠 정말로 마지막일 것이다. 지크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자들을 다시 한번 찬찬히 훑었다.
혐오 어린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마도사. 혹시나 하는 상황에 바로 용사를 보호할 채비를 하고 있는 전사. 냉막한 얼굴 위로 흐린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는 궁수.
새빨간 타인이자 적인 지크의 최후에도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있는 성녀. 그리고 기세등등하게 검을 겨누고 있는 용사.
그의 검이 천천히 위로 올라간다. 저 검이 떨어지는 순간 자신은 죽을 것이다.
최후를 피할 수 없다는 걸 지크는 잘 알고 있었다. 살려고 발버둥 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지크는 남은 힘을 조용히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일단은 마왕이라고 불린 몸이니, 그냥 죽어줄 순 없지.’
이야기 속의 마왕처럼 용사에게 저주를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휘젓고 다닐 때 전리품 삼아 모아 온 마도구 중에는 충분히 그 비슷한 효과를 주는 것이 있었다.
‘분명 ‘운명을 비트는 열쇠’라고 했지.’
그가 검지 안에 박아 넣은 작은 칼날의 이름이었다. 일상생활에 불편하지 않게 박아 넣느라 상당히 고생했다.
하지만 그 덕에 저 재수 없는 녀석에게 한 방 먹일 기회가 생겼으니,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생명을 끊지는 못할 테지.’
이 녀석은 그런 녀석이 아니다. 하지만 상대를 엿 먹이는 걸 무지하게 좋아하는 지크의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 녀석이기도 하다.
‘운명을 비틀어 당한 자의 미래를 바꾸는 칼날. 저 녀석의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는 나도 모르지만.’
상관없지 않은가.
이미 다른 마왕들도 죽은 상황. 최후로 남은 마왕인 자신을 죽인 그렌 제너드의 미래가 영광스러울 것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녀석의 미래가 좋게 바뀐다고 해 봐야 영광의 미래가 조금 더 빛나게 될 뿐이다.
하지만 녀석의 미래가 혹 나쁘게 변한다면.
‘자, 시험을 해 보자고, 용사 나리. 이걸 맞고도 영광의 길을 걷는다면 끝까지 너의 승리야. 하지만 지금부터 맞이할 운명이 어둡기 그지없다면 오히려 다른 자들보다도 더 비참하겠지.’
그리고 지크는 정말로 그렌이 후자의 운명을 맞길 원했다.
아쉬운 건, 앞으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다음에 태어난다면 부디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라!”
심판을 내리는 심판관처럼 그렌이 엄숙하게 외치며 칼을 내리쳤다.
순간 축 늘어져 있던 지크가 벌떡 일어났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꼭 그렇게 할게!”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푸우욱!
그렌의 칼이 지크의 왼쪽 어깻죽지부터 몸을 갈랐다.
몸이 두 조각이 나는 와중에도 지크는 오로지 자신의 검지에만 집중했다. 그의 검지에는 어느새 뾰족한 금속조각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렌이 깜짝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동료들이 서둘러 움직이는 것도 보였다.
‘하지만 내가 빨라!’
푹!
치명적인 일격은 아니다. 그러기엔 지크의 몸이 너무 안 좋았고 그렌의 마력 방벽과 방어구는 강대했다.
하지만 그가 남은 힘을 쥐어짜 마력을 담은 칼날은, 그렌의 방심에 힘입어 그의 방어를 아주 미세하게 뚫고 작은 상처를 낼 수 있었다.
“이 자식이이이!”
그렌의 조각 같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하하하하!’
그렌과는 대조적으로 지크는 내심 폭소했다. 하지만 이미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아 아쉽게 얼굴에 드러낼 수는 없었다.
서걱!
그렌의 검이 다시 한번 움직여 지크의 목을 베었다. 지크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하지만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기 전, 그는 무언가 빛나는 것을 목격한 것 같았다.
“무슨! 말…안…겨우 여기…이번…완벽…!”
그렌이 경악에 차 뭔가를 중얼거렸지만 지크의 의식은 빠르게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 * *
짹! 짹! 짹!
“으음!”
바깥의 소리가 시끄럽다. 지크는 인상을 찡그리며 뒤척였다.
‘아, 젠장! 시끄러워 잠을…!’
짜증을 부리던 그의 몸이 멈칫했다.
벌떡!
그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멍청한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보는 그 모습엔 ‘힘의 마왕’이라 두려움 받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얼뜨기 같았다.
그가 더듬더듬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몸체가 거의 두 동강 날 정도의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흔적은커녕 전투와 고생으로 거칠어진 피부는 어디 가고 매끈거리는 살결이 만져졌다.
이번엔 목을 만져봤다. 분명 몸체와 완전히 떨어져, 신이 아닌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몸에 착 붙어 있었다.
‘대체 이게!’
마왕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세상을 누비며 온갖 경험을 한 그이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쌓아온 경험치가 어디로 간 건 아닌지 그는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고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일단 난 살아 있다.’
아직 실감이 나진 않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다. 닫혀버렸던 미래란 가능성이 다시 생겨났다.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되찾은 삶이 기분이 좋지 않을 리 없었다. 삶을 의식하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펄럭!
몸을 덮고 있던 것을 들춰냈다.
‘이불이군.’
그것도 보드랍고 푹신한 것이 상당히 고가의 이불이다.
그는 주변을 살폈다.
그가 누워 있던 곳은 어느 방의 침대 위였다.
상당히 널찍한 방에는 척 봐도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즐비했다. 적어도 일반적인 가정의 방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뭔가 묘하게 익숙한 방인데.’
지크는 침대에서 내려 와 방 안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방 한켠에 걸려 있는 거울을 스쳤다.
“어?”
지크는 성큼성큼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이건!’
분명 지크 자신의 얼굴이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이 아니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뺨을 쓸어 내렸다. 아직 자신의 시대임을 소리 높여 주장하고 있는 여드름 하나가 거칠게 손바닥을 긁었다.
“어려졌어?”
지크의 경악성과 똑같은 입모양을 보이며 놀라는 거울 속의 얼굴은, 분명 지크가 어렸을 적의 모습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