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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172화 (172/174)

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72)

죽음은 탐욕스럽다.

산 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음은 모든 종류의 삶을 집어삼키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모든 생명을 손에 넣어, 세계에 죽음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사령술사이자 망령군주 파슬란 드 노미크롬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진혁은, 죽음의 탐욕스러운 속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망자가 산 자의 영역을 탐낸다. 그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알고 있을 텐데.”

망령군주 파슬란의 망자들, 그중에서도 파슬란을 가장 충실하게 섬긴 세 망자.

그들이라면, 명계의 존재가 통제 없이 현계에 강림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를 리 없다.

진혁은 약간의 분노가 섞인 눈빛으로 에블린을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에겐 꼭 이뤄야 할 목표가 있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여 사죄하면서도 대꾸를 멈추지는 않았다.

“무슨 목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현계의 멸망과 비교할만한 가치라고는 할 수 없다.”

“아뇨, 저희에겐 충분한 가치가 있었어요.”

꾸짖는 진혁을 향해 에블린은 고개를 젓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진혁을 바라봤다.

“주군을, 다시 되살리고 싶었으니까요.”

*    *    *

지구와 에피로나를 잇는 게이트의 연결이 하나둘 끊어졌을 때.

사람들의 마음속엔 작은 희망 하나가 싹트기 시작했다.

괴수의 시대가 막을 내릴 것이라는 희망.

괴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던 백 년 전의 과거, 그 좋은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괴수의 부산물에 의해 유지되던 현대문명이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눈앞에서 이빨과 발톱을 번뜩이는 괴수의 위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게이트의 연결을 끊어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준 서진혁에 대한 반응은 너무나 뜨거웠다.

덕분에.

―할 말이 있다.

진혁은 고작 다섯 글자의 메시지만으로 각국의 국가원수와 유명한 엽사들, 종교계의 거물들을 한 자리에 불러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초대장을 받은 인원들 모두가 참석했습니다. 미국 대통령과 영국의 여왕, 무명교의 성녀와 용들의 대표…….”

“그런 것 같군. 다들 아는 얼굴들이야.”

주변을 둘러보던 진혁은 주연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막 위에 세워진 진혁의 영지에 모인 사람들의 숫자는 적게 잡아도 백여 명.

하지만, 그중 절반 가까이는 그가 이미 자신의 편으로 만든 사람들이었다.

오대 엽사가문의 가주들과 대한엽사회의 인물들.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수장들에 심지어는 용이나 요정, 난쟁이의 대표까지.

한 사람의 부름에 의해 모였다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인물들이었지만, 그 사람이 서진혁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진혁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무 말도 없이 진혁의 등장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 진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 말은 많지만, 시간이 없군.”

“그대가 무슨 말을 할지는 이미 알고 있다네.”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끊자, 진혁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용의 대표로 이 자리에 참석한 고룡, 말리아.

“분명, 에피로나 침공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나?”

신선처럼 길게 자라난 흰색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

“그렇다면 불필요한 이야기라네. 여기 모인 자들은 모두가 에피로나로 갈 각오를 하고 모인 것일 테니.”

그의 말대로였다.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이미 진혁이 에피로나 공략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황.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간에, 다들 에피로나로 갈 각오는 해 둔 상황이었으니까.

“저희 교단에서는 이미 성전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저를 포함한 성기사단과 사제단 대부분이 출격할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요, 미스터 서. 미국에선 가용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 그대의 계획을 지원할 생각이요.”

“우리도…….”

그에 호응하듯, 성녀 클레어를 시작으로 각 대표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진혁의 뜻에 따르겠다 나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말리아가 진혁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보다시피, 우리는 준비가 끝났다네. 그러니 지금 필요한 건 본격적인 침공 시기가 언제인가지.”

“그것이, 내가 할 이야기 중 하나다.”

설명을 요구하는 말리아를 향해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말을 이어 나갔다.

“공략 예정일은 다음 주. 앞으로 일주일 뒤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다음……주?”

“원래는 일 년 뒤라고 하지 않았어?”

“다음 주라니, 이게 대체…….”

진혁의 말을 들은 대표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웅성댔다.

“다음 주라니, 그게 정말인가?”

그것은, 조금 전 까지만 하더라도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던 말리아 역시 마찬가지.

“그렇다.”

다른 이들처럼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고룡을 향해,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본래는 충분한 준비를 거쳐 침공할 생각이었지만…… 계획이 바뀌었다. 하루라도 빨리 에피로나를 공격해야 해.”

“갑자기 상황이 바뀐 이유가 뭔가?”

“망자들이 관여하고 있다.”

“망자라고 했느냐?”

진혁의 말에 대답한 것은 요정의 장로, 에플리오네였다.

다른 이들과 달리 사령술의 일부를 전수받은 그녀는, 진혁의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대강이나마 알고 있었다.

진혁은 경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요정을 향해 고개를 작게 끄덕인 다음, 주변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통제받지 않는 망자가 현계에 개입하는 건 그 자체만으로 세계를 붕괴시킨다. 내버려 둔다면 에피로나는 죽음의 땅이 되겠지.”

그 말에, 에피로나에서 온 이종족들과 무명교의 사람들이 움찔했다.

백여 년 전, 괴수를 피해 지구로 도주해 온 이후에도 고향을 잊지 못한 자들.

정확한 의미까지는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자신들의 고향이 죽음의 땅이 되어 버린다는 데 아무런 감흥도 없을 리가 없다.

진혁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에피로나가 죽음의 땅이 되고 나면 그 다음 차례는 지구가 될 거다. 지난 백 년간 에피로나와 가장 가까웠던 차원이었으니까.”

“이런…….”

“하…… 저 말이 사실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태로군.”

일견 엉터리처럼 보이는 이야기였지만, 진혁의 말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이미 마음만 먹으면 세계를 쥐고 흔들 힘을 가진 그가, 굳이 거짓말을 해 가면서까지 자신들을 설득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우리 용들은 참전하겠소.”

“무명교도 마찬가지예요.”

“영국과 영연방도 참전하겠어요.”

“우리도…….”

말리아를 시작으로, 자리에 모인 대표들이 하나 둘 진혁의 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곧, 모든 대표들이 진혁과 함께 에피로나를 치기로 선언했을 때.

“시간은 일주일 뒤, 장소는 이 곳에서 다시 모이기로 하지. 그리고, 미리 말해 둘 게 있다.”

진혁은 향해 고개를 끄덕인 다음,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에피로나 공략은 결코 쉽지 않을거다. 그러니, 미리 양해를 구하도록 하지.”

“무슨 양해를, 말하는 건가?”

의아해하는 말리아를 향해, 진혁은 짧게 말했다.

“난, 죽음을 허용하지 않을 생각이다.”

“……끔찍하군. 그 만큼 상황이 급하다는 말인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챈 말리아는 경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허나, 다른 이들은 이해하지 못한 듯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진혁을 바라봤다.

“……진혁 님, 그게 무슨 말이죠?”

“간단하다.”

클레어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요정의 장로, 에플리오네였다.

“우리가 전투중에 죽으면, 망자가 되어 다시 싸우게 될 거란 말이니라.”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답한 순간.

진혁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사람들의 등골이, 싸늘하게 시려 왔다.

*    *    *

일주일이 쏜살처럼 흘러갔다.

그 짧은 시간 사이, 진혁의 영지엔 오천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다.

선발대이긴 하나, 오천이란 숫자는 무한정에 가까운 에피로나의 괴수에 비하면 티끌과도 같은 규모.

그러나.

그 구성원들 모두가 이 품, A급 이상의 강자라면 이야기는 달랐다.

무명교의 정예인 성기사단과 사제단, 한국의 오대 엽사가문을 포함한 각국의 강력한 엽사들에, 세계의 수호자라 불리는 용을 비롯한 이종족들까지.

“출정 준비를 하라고 전해라. 곧 게이트를 열 테니까.”

그 힘만큼은 족히 수백만의 괴수를 상대할 수 있는 자들 앞에서 진혁은 자신을 따르는 용, 청명에게 말했다.

“알았다. 장로께 전하고 오지.”

진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순간이동 마법을 발동하며 모습을 감췄다.

그는 청명이 사라진 자리에서 눈을 떼고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모래만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허허벌판.

그러나, 조금 뒤엔 완전히 다른 풍경이 보이게 되리라.

‘시작해 볼까.’

두근! 두근!

진혁의 의지에 감응한 검은 심장 속의 흑마력이 사지로 뿜어져 나갔다.

스으으!

이내, 양손에 가득 모인 흑마력을 움켜쥔 진혁의 의식이 명계로 향했다.

목표는, 그가 지난번 끊어 버렸던 에피로나와 이어진 차원의 통로.

‘……통로의 색이 변했군.’

에피로나로 향하는 통로의 색이 검게 변한 것을 확인한 진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만큼 에피로나에 흑마력이 가득 차 있다는 의미.

이제 더 이상의 시간 낭비는 허용되지 않는다.

‘연결한다.’

스으으!

그의 의지에 따라, 왼손에서 던져진 흑마력의 검은 실타래가 지구와 에피로나 사이를 이었다.

남은 것은, 공간을 갈라 틈을 만들어내는 것뿐.

스윽!

지구로 의식을 돌려보낸 진혁은, 오른손에 쥐어진 흑마력의 칼날로 허공을 크게 베었다.

그러자.

우우우웅!

허공을 가르는 한 줄기의 틈이, 빠른 속도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전차 서너 대 정도는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거대한 게이트.

“저게…… 게이트라고?”

“말도 안 돼…….”

진혁이 연 게이트의 모습에 모여있던 선발대는 놀랐지만.

“……이미 늦었나.”

게이트 너머를 바라보는 진혁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팔 하나가 잘린 채, 다른 팔에 검을 쥐고 있는 검은 거인.

외눈박이.

“……망자라.”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죽음의 힘, 흑마력을 느낀 진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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