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71)
망자의 영혼과 육체를 서로 이어 주는 것은 죽음의 에너지, 흑마력.
그렇기에, 망자가 가진 흑마력이 많을수록 영혼과 육체의 일체율 또한 높아진다.
생전에 아무리 강력한 망령이었다 하더라도, 가진 흑마력의 양이 적으면 자신의 힘을 제대로 낼 수 없는 이유.
그리고.
촤라라락!
진혁이 사용한 권능의 이름은 ‘결속’.
그의 손에서 쏟아져 나간 흑마력의 쇠사슬이 향한 곳은, 에블린이 아니었다.
철컥! 철커덕!
경쾌한 쇳소리와 함께 검은 사슬이 강철 거인의 허리춤을 감았다.
스으으!
그와 함께, 고렘의 육체를 가진 세 망자에게 전달되는 강력한 흑마력.
―이, 이건.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순도야.
―오오오…….
진혁의 검은 심장에서 조금의 손실도 없이 공급된 진한 흑마력의 고양감에, 세 망자들은 손에 쥔 무기에 힘을 주었다.
―좋아, 이 정도면 해볼 만합니다.
―주군이 오랜만에 엄청 난 걸 선물로 줬군 그래!
―으으으…….
콰아아아-!
거의 동시에, 세 고렘의 부스터가 회백색 화염을 거세게 뿜어냈다.
그와 함께 앞으로 쏘아져 나가는 성준과 자이츠, 무명.
그들의 손에 쥐어진 검과 주먹이, 칠흑처럼 검은 흑마력을 듬뿍 머금은 채 에블린을 향해 휘둘러졌다.
콰아아앙!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막이 터질 듯한 폭음.
그에 상응하는 강력한 위력이, 에블린의 몸을 단숨에 뒤로 밀어냈다.
“갑자기, 이렇게 강해졌다고? 어떻게…… 주군도 아닌데…….”
그녀를 상처입히지는 못했지만, 당황하게 만들기엔 충분한 위력.
파지지직!
그 와중에도 빈틈을 노리고 날아드는 멜리나와 민호의 강력한 마법에, 에블린은 쉽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콰과광! 콰과과광!
흐름은 한 번 더 뒤집힌 상황.
그녀는 조금 전보다 훨씬 강해진 다섯의 공격을 막아 내기에 급급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상대를 자세히 살폈다.
‘갑자기 강해진 이유가 뭔진 모르겠지만, 그 대가가 그리 가볍지는 않을걸?’
육체의 내구성, 혹은 혼의 피로.
한계 이상의 힘을 담는 데에는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니까.
지금은 생각지도 못한 일격에 흐름을 빼앗겼지만, 시간이 지나면 놈들의 한계가 드러나리라.
‘그때만 되면…… 네놈의 목을 취해 주마, 도둑놈.’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진혁과 눈이 마주친 그녀의 눈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허나.
스으으!
현실은 그녀의 바람과 반대로 돌아갔다.
‘흑마력이……!’
바다 너머에 위치한, 명계와 직접 연결된 게이트.
그곳에서 끊임없이 공급되던 무한한 흑마력이, 예고도 없이 갑자기 끊겨 버렸다.
난데없이 흑마력의 공급을 차단당한 에블린의 눈이 당황으로 떨렸다.
쾅! 콰과광!
망자를 움직이는 것은 죽은 자의 힘, 흑마력.
게이트로부터 흘러나오던 에너지의 공급이 끊긴 순간, 그녀가 끌어 낼 수 있는 힘 역시 빠르게 약해졌다.
―적이 약해졌습니다. 기회입니다!
―이 순간만 기다렸다고!
에블린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망자들의 무기가 더욱 거세게 휘둘러졌다.
쾅! 콰광!
‘빌어먹을…… 대체 어떻게…….’
힘겹게 적의 공격을 막아 내고는 있었지만, 낫을 휘두를 때마다 자신의 몸에 깃든 흑마력이 깎여 나가는 게 느껴진다.
이대로라면,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지고 있던 모든 흑마력을 소모하게 되리라.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절망으로 물들어 갔다.
결국.
콰아아앙!
아래로 내리친 성준의 검격에, 그녀의 몸이 지상으로 튕겨져 나갔다.
쾅! 쾅! 쾅!
주기장에 주차된 몇 대의 비행기를 꿰뚫고 난 후에야, 에블린의 몸은 간신히 활주로에 처박힌 채 멈출 수 있었다.
“크……윽…….”
낫을 지팡이삼아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에블린.
가지고 있던 흑마력의 대부분을 소모한 것인지, 검게 물들어있던 그녀의 낫은 원래의 은색을 되찾은 지 오래였다.
곧.
또각. 또각.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세운 그녀를 향해 누군가가 다가왔다.
“여기까진가 보군.”
서진혁.
망령의 도움을 받아 하늘에서 내려온 그의 눈에서, 영안의 시리도록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 * *
―팀장님, 게이트 파괴를 확인했습니다. 곧장 귀환해서 지원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통신구슬 너머로 들려오는 주연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진혁은 눈앞의 에블린을 바라봤다.
“크……윽…….”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강대한 흑마력은 사라진 지 오래.
다리는 힘이 풀렸는지 제멋대로 흐느적거리고, 앙다문 입 사이론 검은 액체 한 줄기가 흘러내리고 있다.
낫을 지팡이삼아 간신히 자세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누가 보더라도 전투를 지속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는 상태.
“이…… 도둑놈…….”
그럼에도, 진혁을 향한 에블린의 눈빛은 여전히 진한 독기와 분노를 품고 있었다.
“도둑놈?”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말에, 진혁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에블린의 눈빛이 더욱 강해졌다.
“그래…… 이 도둑놈…… 감히, 주군의 것을 마음대로…….”
“주군이라, 네 주군의 이름이 뭐지?”
“명계의 신으로부터 인정받은 모든 망령의 주인, 파슬란 드 노미크롬님이시다! 너처럼 그분의 사령술을 훔쳐 쓰는 녀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존귀한 분이시지!”
‘파슬란의 기억 그대로군.’
이미 사라진 목숨조차도 바칠 수 있을 것 같은 그녀의 기세에, 진혁은 미소를 지었다.
파슬란이 가장 믿던 세 망자 중 하나, 뱀파이어 로드.
‘에블린이 이곳에 나타난 걸 조금이라도 늦게 알아차렸다면, 훨씬 힘들었겠지.’
뱀파이어 로드의 장기는 전투가 아니다.
흡혈과 전염의 권능을 이용한 권속의 무한한 증식.
뱀파이어는 몇 가지 특징을 빼면 산 자와 구별이 어려울 만큼 닮아 있었으니, 그녀의 권속이 퍼져 나갔다면 세계는 큰 혼란에 빠졌으리라.
그런 만큼.
‘내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는 전력이 되겠지.’
강력한 망자를 탐하는 사령술사의 본능이,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꿈틀댔다.
“파슬란…… 그리운 이름이군.”
“그리워? 권능을 마음대로 훔친 도둑놈이 염치는 있는 모양이지?”
짐짓 아련한 표정을 짓는 진혁에게 그녀는 독설을 내뱉었다.
“내가 왜 도둑놈이라고 생각하나.”
“네놈이 부리는 건 그분의 고유한 사령술이니까. 그분께선 제자를 둔 적이 없으니, 분명 어딘가에서 훔쳐 배운 것이겠지!”
여전히 적대적으로 대하는 에블린.
그런 그녀 앞에서, 진혁은 씨익 웃어 보였다.
“그렇게 말하면 곤란한데, 에블린.”
그의 입에서, 그녀의 진명이 튀어나온 순간.
“……너,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진혁을 노려보던 에블린은 순간 당황했다.
분명, 그녀의 입으로 이름을 말해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건만.
저 도둑놈은, 어째서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일까.
당황해 굳어 버린 그녀의 표정을 즐기며, 진혁은 말을 이었다.
“글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분명히 어디서 훔쳐 들은 거겠지. 너 같은 도둑놈이 할 짓은 뻔하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정말?”
그녀의 독설에도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는 진혁.
‘……어쩐지, 익숙한 눈빛인데…….’
그와 눈을 계속 마주치던 에블린의 마음 한구석이, 왠지 모르게 조금씩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진혁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그때였다.
“네가 망자의 육신을 얻고 다시 되살아났을 때, 내게 뭐라 말했는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진혁의 이야기를 듣던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혁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두 번째 기회를 줬으니, 영혼이 소멸할 때까지 충성하겠습니다.’라고 했던가.”
“너…… 아니, 당신. 그걸 어떻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에블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오랜만이다, 에블린.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정말…… 주군이십니까?”
“카를에게 죽었던 그 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할 셈인가.”
그녀의 놀란 표정을 바라보며, 진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얼 빠진 표정으로 얼어붙어 버린 에블린.
잠시 후.
털썩!
“주군을…… 뵙습니다…….”
활주로의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은 채 엎드린 그녀의 목소리엔, 기쁨의 울음이 섞여 있었다.
* * *
“주군이 명계로 가신 후에도, 저희는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일 텐데.”
싸움이 끝나고.
에블린의 이야기를 듣던 진혁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흑마력의 공급이 끊긴 망자는 그 육체를 유지할 수 없다.
파슬란이 죽은 순간, 흑마력의 공급이 끊긴 망자들은 당연히 육체와 분리되어 망령의 형태로 돌아갔을 터.
‘그런데, 어떻게 망자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거지?’
진혁과 파슬란이 알고 있는 사령술의 지식으로는 풀 수 없는 일이었다.
“주군께서도 생전에 그렇게 말씀하셨죠. 하지만…… 사실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에블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주군의 영혼이 명계로 돌아갔을 때, 마덴은 망자들의 육체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마덴…….”
그 말에, 진혁의 의심이 조금 풀렸다.
파슬란의 세 심복 중 하나이자, 마법의 극에 다다른 망자인 아크리치.
마법뿐만 아니라 온갖 비술에 정통한 그라면, 분명 어떠한 방법을 찾아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마덴의 의견에 따라, 저와 카게룬, 마덴은 명계로 이동했습니다.”
그들이 육체를 유지한 방법은, 진혁으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이었다.
“명계의 흑마력을 이용해 유지한 것인가.”
“네.”
“명계를 관리하는 시스템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텐데.”
“그것이 저희가 밖으로 나온 이유예요.”
의문 섞인 진혁의 눈빛에, 에블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과거 주군께서 영지를 만들었듯이…… 현계에 흑마력을 생성할 수 있는 농장을 만들면 저희가 가진 흑마력은 계속 공급될 테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다.’
아크리치인 마덴은 사령술에 대한 지식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으니 가능한 발상.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러면, 나머지 둘은 어디에 있는 거지?”
이 자리에 없는 마덴과 카게룬.
그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곧, 진혁은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이곳과 연결된 세계가 하나 있었어요. 그래서…… 그곳으로 갔죠.”
‘에피로나.’
에블린의 답을 들은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