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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168화 (168/174)

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68)

에피로나.

한때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으나, 괴수들에 의해 짓밟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차원.

“후우.”

야만과 살육의 대지 위를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괴수들 사이에서, 외눈박이는 거대한 나무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한쪽 팔이 잘린 데다 무기 하나 없는 무방비한 모습이었지만, 주변을 돌아다니는 괴수들 중 그를 노리는 녀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발걸음 하나, 숨소리 하나에 신경 쓰며 움직이는 괴수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에피로나에 남은 유일한 갑 급 괴수였으니까.

“이제…… 방법이 얼마 남지 않았군.”

그것이, 외눈박이가 나무 앞에서 한숨을 쉬고 있는 이유.

에피로나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갑 급 괴수가 없다는 건, 지구의 인류가 에피로나를 공격했을 때 막아 낼 방법이 없다는 말과 같으니까.

특히나.

“서진혁…….”

인간인 주제에, 신조차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낸 자.

죽어 다시 되살아난 망자의 군대를 손가락 하나로 부리는 죽은 자들의 군주.

“게다가, 이제는 게이트를 마음대로 여닫을 수 있는 능력까지 얻었지.”

에피로나 전체를 감각할 수 있는 그의 육감이, 지구로 향하는 게이트의 숫자가 크게 줄었다 이야기하고 있었다.

망자의 군주, 서진혁에 의해 지구와 에피로나 사이의 연결이 점점 끊어지고 있다는 뜻.

유일하게 남은 갑 급 괴수인 그가 한계치에 가까운 마기를 소모해 가며 게이트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나마도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데다 숫자마저 줄어들고 있다.

‘이대로 가면, 에피로나는 완벽하게 고립되겠지.’

지구라는 자원창고를 잃은 괴수들이 서로 상잔하는 순간.

에피로나의 괴수들은 멸망의 길에 들어서게 되리라.

‘아마도, 그 전에 지구에서 먼저 침공해 오겠지만.’

서진혁.

괴수도 아닌 주제에 게이트를 제멋대로 여닫는 자.

그자라면, 완벽하게 고립된 에피로나에 게이트를 열고 침공하는 것도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리라.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지겠지.’

마왕과 함께 지구를 공격한 수많은 갑 급 괴수들.

그들을 소멸한 것은, 다름 아닌 서진혁과 그의 망자들이었으니까.

수많은 갑 급 괴수들조차도 단 한 명의 인간과 그 수하들을 당해내지 못했는데, 그 혼자서 서진혁을 감당해 낼 수 있을 리 없다.

‘뭔가…… 방법이 필요해.’

질 게 뻔한 싸움.

0에 가까운 승률을 조금이라도 올리기 위해, 외눈박이의 머릿속은 오늘도 수많은 생각들로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외눈박이가 이마에 박힌 눈을 감은 채 고민에 빠져 있던 그때.

스으으!

“……이건.”

외눈박이는 심상찮은 기운을 느끼곤 하나 있는 눈을 번쩍 떴다.

그가 번개처럼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볼 수 없었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허공을 검게 물들인 차원의 틈 앞에서, 외눈박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분명, 차원을 오가는 게이트의 형태.

하지만 에피로나로부터 열린 것은 아니었다.

마기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게이트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결코 에피로나나 괴수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서진혁, 그놈이 다루는 기운이군.”

진득하면서도 차갑고 어두운, 산 자들에게 본능적인 경계와 공포를 느끼게 하는 에너지.

분명, 놈이 부리는 망자들에게서 느껴지던 기운이다.

그의 숙적이 다루는 특유의 기운을 떠올린 그는 이마의 외눈을 찌푸렸다.

그렇다는 건.

“……놈이, 벌써 공격을 시작한단 말인가.”

에피로나와 지구의 연결이 채 끊어지기도 전에 공격을 시작하다니.

그의 생각보다도 훨씬 빠른 타이밍.

하지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와라.”

스으으!

외눈박이의 몸을 중심으로, 마기의 파도가 주변을 휩쓸었다.

얇지만 넓게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마기에 담긴 것은, 자신을 향해 모이라는 갑 급 괴수의 명령.

“키이이이!”

두두두두두.

수많은 괴수들이 내달리는 소리.

동시에, 외눈박이가 디딘 땅이 가볍게 진동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주변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괴수들이 외눈박이의 명령 아래 달려오리라.

‘그리 쉽게 당해 주지는 않겠다.’

하나둘씩 몰려드는 괴수들 사이로, 외눈박이는 게이트를 노려보며 눈을 빛냈다.

그러나.

슈욱!

차원의 틈 사이로 나온 것은, 서진혁이 아니었다.

“……이건.”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붉게 칠해진 중갑옷을 뒤집어쓴 기사.

녹슨 장검을 오른손에 쥔 채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기사의 모습은, 서진혁과 여러 번 부딪친 그로서도 처음 보는 존재였으니까.

그 뒤에서 나타난 로브 차림의 깡마른 시체 역시, 지금껏 본 적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만만치 않은 상대야.’

그만큼, 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눈앞의 둘 중 하나만 상대한다 하더라도, 지금의 외눈박이로서는 버티는 것이 고작.

둘 모두를 상대로 싸우기 위해선, 다른 괴수들과 협공해야만 한다.

‘지금이 기회군.’

조심스럽게 둘을 살피는 외눈박이의 눈에서, 서서히 살의가 피어올랐다.

허나.

“……분명, 기억에 있는 땅이다.”

“그래, 주군께서 살고 있던 곳이군.”

“이젠…… 괴수들에게 점령당한 모양이지만 말이지.”

그가 살기를 뿜어내건 말건, 둘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기 바빴다.

그것이, 외눈박이의 성질을 자극했다.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단 말이냐.’

스으으!

외눈박이가 다시 한 번 주변으로 마기를 내뿜었다.

조금 전, 자신을 향해 모이라는 명령을 섞어 넣은 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이었다.

“키이이이이!”

“크아아아!”

마기 속에 담긴 명령을 전해 들은 괴수들이 일제히 앞으로 달려나갔다.

제각기 다른 생김새를 지닌 괴수들의 날카로운 손발톱과 큼직한 이빨은, 머릿속에 입력된 살육 명령을 실행시키기에 충분히 강력했다.

“괴수들이 오는군.”

“흐음…… 쓸모없는 녀석들이야. 망자로 만들기에도 부족하군.”

“그래도, 저 외팔이 거인은 조금 다르지 않나?”

“저 정도라면…… 임시로 써먹을 수준은 될지도.”

기사와 마법사의 대화 속에선 조금의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놈을 사냥해 오지.”

말을 마친 기사가 오른손의 검을 들어 올렸다.

스으으!

검붉게 녹슨 검신을 감싼 흑색 기운이, 흑요석처럼 단단하고 날카로운 칼날로 변했다.

본래의 두 배 남짓한 크기로 길어진 검을, 기사는 가로로 휘둘렀다.

이윽고.

피잉!

한 줄기의 직선이, 기사와 괴수 사이의 공간을 반으로 쪼갰다.

그리고, 채 일 초도 지나지 않아.

서걱!

기사를 향해 달려들던 괴수들의 몸이, 한 줌의 핏물로 변해 바닥에 쏟아졌다.

“……대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움직이는 존재였던, 이제는 핏물로 변해 대지를 붉게 물들이는 괴수들의 모습에 외눈박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놀란 외눈박이의 모습 앞에서, 기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려워할 필요 없다. 네녀석은 이렇게 되지 않을 테니.”

“그래, 내가 네놈을 두 동강 내 버리면 될 일이니까.”

스릉!

덩치에 어울리는 거검을 뽑아 든 외눈박이.

남은 팔로 검을 들어 올린 채 상대를 경계하는 거인을 바라보며.

“곧, 너도 우리와 함께 주군을 따를 것이다.”

쐐애애액!

데스나이트, 카게룬은 검을 휘둘렀다.

*    *    *

그 시간.

“흠.”

호텔로 돌아온 진혁은 소파에 기댄 채 손에 쥔 검은 구슬을 노려봤다.

“명계의 조각…….”

명계의, 정확히는 명계의 신이 가진 권능의 일부가 떨어져나온 흑마력의 결정체.

명계의 신과 가장 가까웠던 인간, 망령군주 파슬란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진혁에겐 익숙한 물건이었다.

파슬란이 명계의 신에게 받은 임무를 해결할 때마다 받았던 것이, 다름 아닌 이 명계의 조각이었으니까.

‘문제는, 이게 명계의 신에게서 나온 게 아니란 것이지만.’

이 구슬이 나타난 곳은 무명교 대성당의 지하.

마인에 의해 게이트를 여는 데 이용되었다곤 하지만, 그들은 사령술사가 아니니 명계의 신으로부터 얻었을 리도 없다.

그렇다면, 진혁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

‘명계의 에너지가…… 어딘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이야기지.’

그 말인 즉, 명계와 현계가 서서히 하나가 되어 간다는 뜻.

‘죽은 자들의 땅이라…… 과거의 파슬란이 추구했던 목표군.’

그렇기에, 파슬란은 거리낌 없이 명계의 조각을 취하고 아스칸에 심었다.

어느 정도 현계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면서 영지를 확장한 지금의 진혁과는 확연히 다른 행보.

‘파슬란은 산 자를 좋아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지.’

아니, 진혁에겐 산 자들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에피로나의 괴수들을 전부 상대하기 위해선, 그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니까.

그가 아니라 파슬란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도, 수십억에 가까운 망자를 일으켜 세울 수는 없으리라.

그렇기에, 진혁은 생각했다.

‘일단은, 현계와 명계가 합쳐지는 것을 막아야 해.’

진혁이 에피로나와 연결된 게이트를 끊는 데 집중하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게이트의 경유지인 명계의 영향을 줄이는 것이, 명계와 현계의 융합속도를 늦추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한 달 내로, 지구와 에피로나 사이에 연결된 모든 게이트를 끊는다.’

분명 일자리를 잃은 엽사들의 반발이 있겠지만, 지구가 죽은 자들의 땅이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설사,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주먹을 움켜쥔 진혁의 눈이, 결의로 번뜩였다.

허나, 그의 결의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스으으!

“……이건.”

그의 감각에 잡힌 거대한 기운에, 진혁은 표정을 굳히고는 시선을 기운의 방향으로 돌렸다.

“서쪽…… 아일랜드인가.”

괴수들에게 점령된 거대한 섬.

그리고, 지금은 거대기업 크레온의 괴수농장이 된 대지.

하지만, 진혁이 놀란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흑마력.”

너무나도 익숙한.

그러나 이제까지 느껴 보지 못한 거대한 기운 앞에서, 진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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