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66)
악령은 망령이 오랜 기간 동안 흑마력에 도출된 탓에 변질된 존재.
현계에서는 드물게 나타나야 할 존재가 진혁의 앞에 둘이나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지만.
스으으으!
문제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구구구궁!
악령들의 흑마력이 주변으로 퍼져 나감과 동시에, 진혁과 일행이 타고 있던 검독수리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왜애앵!
원인 불명의 이상으로 기체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에 유의하시어…….
사이렌 소리와 함께 기내를 울리는 조종사의 방송.
대기권과 우주의 경계를 비행하는 비행정이 요동칠 이유가 없으니, 그들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했다.
스으으으!
당황한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악령은 자신이 가진 흑마력을 힘껏 주변으로 내뻗었다.
이대로라면, 흑마력의 에너지로 가득 찬 비행정은 폭발하거나 추락하게 될지도 모른다.
서진혁이 타고 있지 않았다면.
두근! 두근!
진혁의 검은 심장이 뛰면서 고여 있던 흑마력을 혈관으로 밀어 올린다. 동맥을 타고 전해진 망자의 힘이 오른손을 검게 물들인다.
이내.
촤아악!
악령들을 향해 내뻗은 진혁의 오른손에서 흑마력으로 만들어진 검은 그물이 쏘아져 나갔다.
—……!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망자의 기운을 단숨에 흡수해 버린 그물은, 곧장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던 악령들을 꽁꽁 묶어 버렸다.
스으으!
진혁은 악령들이 채 반항을 시도하기도 전에 영혼 구슬에 봉인해 버리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악령들이 사라지기 무섭게, 시끄럽게 울리던 사이렌 소리가 꺼지면서 요동치던 기내의 진동이 잦아들었다.
“팀장님, 방금 그건……?”
“악령이다.”
옆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묻는 주연의 말에, 그는 짧게 답하며 눈을 좁혔다.
나타난 악령을 제압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까.
‘악령들이, 물리력을 행사했다.’
실체가 없는 영혼이 물리력을 행사하기 위해선 생각보다 훨씬 많은 양의 힘을 필요로 한다.
악령들이 힘을 응축하는 어떠한 조치도 없이 비행정을 뒤흔들 정도의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건, 명계와 현계 사이의 벽이 그만큼 약해졌다는 이야기.
다시 말해.
‘명계와 현계가 합쳐질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가 오기 전에,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는 온전히 죽은 자들의 영역이 되어 버릴 테니까.
잠시 후 히드로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진혁의 상념을 깬 것은, 착륙을 알리는 조종사의 안내방송이었다.
“팀장님, 이제 나갈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알았다.”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는 주연을 향해,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밖으로 보이는 런던의 모습을 바라봤다.
‘크레온이라…… 부디 가만히 있어 줬으면 좋겠군.’
감히 자신을 방해한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할 테니까.
크레온의 사장, 스미스의 얼굴을 떠올린 진혁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 * *
영국은 여전히 왕과 귀족이 존재하는 나라다.
고귀한 혈통과 함께 세습되는 정치적 자산과 경제적 자산은 마치 공고한 성채처럼 그들이 가진 지배력과 계급의 벽을 수백 년 동안 유지시켜 주었다.
괴수의 등장 이전까지는 그랬다.
게이트가 열릴 때부터 마왕과의 전쟁이 막을 내릴 때까지의 혼란기 동안, 귀족들이 가진 정치적 자산과 경제적 부는 괴수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으니까.
그렇기에.
괴수의 등장과 함께 그들이 가진 권력과 권위, 경제력은 새로이 등장한 엽사들의 손에 쥐어졌다.
영주의 가신이라는 과거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훈장처럼 주어지던 비세습작위였으나, 이제는 마력을 부리는 엽사들 중 왕가의 가신이 되기를 택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작위, ‘기사’의 이름과 함께.
“런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서진혁 님.”
히드로 공항에서 진혁을 맞이한 윈저기사단의 부단장, 스펜서 경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대충…… 삼 품 정도인가.’
스펜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강도를 살핀 진혁은 그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진혁이나 진혁의 망자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약했지만, 삼 품 정도라면 사실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수준의 경지.
영국의 왕실 휘하에 있는 기사단 중 가장 강한 기사단의 부단장 자리에 앉을 만한 실력이다.
그런 사람을 고작 파티의 환영 인사를 위해 불러낸 셈이니, 왕가가 진혁의 방문을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여왕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알았다.”
스펜서의 말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연과 함께 그를 따라가 왕실 전용 리무진에 탑승했다.
롤스로이스가 직접 제작해 왕가에 바친 리무진답게 내부는 특유의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진혁은 뒷좌석의 푹신한 좌석에 기댄 채 깍지를 끼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제국시대의 유산이 여전히 남아 있는 거리의 풍경 사이로, 완전무장을 한 채 돌아다니는 왕가의 기사들.
왕가의 문장인 장미를 갑옷의 왼쪽 가슴에 그려 넣은 기사들은 둘씩 짝지은 채 거리를 순찰하고 있었다.
왕국의 수도라 해서 괴수가 피해 간다는 보장은 없으니 당연한 일.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지리라.
‘그럼…… 미리 손을 써 볼까.’
스으으!
흑마력을 끌어 올리며 씨익 웃은 진혁의 눈에서, 영안의 푸른 빛이 번뜩였다.
* * *
공항에서 출발한 리무진이 파티 장소인 버킹엄 궁에 도착하는 데에는 삼십 분 정도가 걸렸다.
“진혁 님, 이쪽입니다.”
그와 주연을 안내한 스펜서는 차에서 내리는 진혁을 향해 밝은 미소로 고개를 숙이고는 두 사람을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세한그룹의 서진혁 님과 신주연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연회장의 입구를 지키던 직원의 외침과 동시에, 이미 자리를 채우고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일부는 예전부터 영국의 상류층을 형성해왔던 왕족들과 귀족들이었지만, 대부분은 새롭게 기사 작위를 받은 엽사들.
호기심과 질시, 경계 어린 눈빛 아래에서 연회장에 발을 들인 진혁은 곧장 연회장의 상석으로 향했다.
곧, 상석에서 일어난 상대가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아, 오셨습니까.”
머리의 티아라를 제외하면 수수하고 단출한 차림의 나이든 여인.
그러나, 겉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그녀의 눈빛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수많은 죽음을 만들고 지켜 봐 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살기.
‘역시, 늙었다지만 힘은 여전하군…….’
노인의 인자한 눈 아래에 숨어 있는 살기를 느낀 진혁은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서진혁이다. 만나서 반갑군.”
“저야말로. 게이트 클로저와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되다니, 너무 기쁘네요.”
서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왕.
진혁은 씨익 웃으며 그녀와 손을 마주 잡았다.
“무엄합니다!”
“여왕님의 신체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
옆에서 둘의 악수를 지켜보던 기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 외쳤다.
그중에는 분노해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가져다 대는 사람도 있을 정도.
분노한 엽사들의 시선이 진혁에게로 쏟아지는 그때.
“지금, 손님 앞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거죠?”
휘이잉!
날카로운 기파가 연회장 안을 휘몰아쳤다.
기파에 섞인 범접할 수 없는 기세에, 연회장에서 언성을 높이던 기사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곧, 기파의 주인공이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분은 영국을, 영연방을 괴수로부터 구원할 분입니다. 지금 이후로 이분께 무례를 끼치는 분은 용서치 않겠어요.”
겁에 질려 한쪽 무릎을 꿇는 기사와 귀족들을, 늙은 여왕의 싸늘한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혁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일 품의 엽사가 작정하고 내뿜는 기운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지.’
게이트와 함께 자연적으로 각성한 여왕의 힘은, 괴수의 침략 앞에서 붕괴하는 대영제국을 임시로나마 지켜 낼 만큼 강력했으니까.
세월의 흐름에 따라 육체는 노쇠했지만, 그녀가 가진 마력은 노쇠하기는커녕 예전보다 더욱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만하지, 오늘은 기쁜 날일 텐데.”
진혁이 던진 말에, 여왕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손님을 모셔 놓고 이러고 있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죠. 모두 일어나세요.”
슈우우!
그 말과 함께, 연회장 전체를 짓누르던 압력이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게 지워졌다.
“여왕이여, 장수하소서.”
영국을 지켜 온 여왕의 건강을 비는 외침 사이에서, 그녀는 진혁을 향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파티가 끝나면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손님께서 시간이 될지 모르겠군요.”
“무슨 일이지?”
“이곳에서 이야기할 수는 없는 이야기랍니다.”
의뭉스러운 웃음을 짓는 여왕.
하지만, 진혁은 그녀의 눈빛 한구석에서 간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진혁의 결정은 빨랐다.
“그러지.”
곧, 여왕의 표정이 한껏 밝아졌다.
* * *
파티는 저녁 식사가 끝날 때쯤 막을 내렸다.
이제는 노쇠한 여왕의 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 이유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래,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보도록 하지.”
여왕이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질 때 주로 사용하는 침실 옆의 응접실.
그곳의 탁자에 앉은 진혁은 손깍지를 낀 채 맞은편의 여왕을 바라봤다.
잠시 입을 다문 채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 그녀.
진혁은 굳이 여왕의 말을 듣지 않아도 그녀가 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크레온 때문이겠지. 안 그런가?”
“역시, 손님께선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진혁의 말을 들은 여왕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체념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그 반역자들이…….”
“반역자?”
“MI6로부터 직접 전해 들었습니다. 놈들이 왕가를 폐하고…… 이 나라를 삼켜 버리겠다더군요.”
그 말을 전하는 여왕의 표정에선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 것이 영국의 군주라지만, 그 말이 군림을 위협하는 자에게까지 허용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뭘 원하는지는 알겠군. 크레온의 쿠데타를 막아 달라는 건가.”
“정확합니다.”
“그러면, 내가 받을 수 있는 건?”
여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혁은 짧게 물었다.
곧,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영국과 영연방 전체가, 당신의 뒤를 지킬 것입니다.”
제안을 들은 진혁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