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62)
독일의 서부.
벨기에와 네덜란드, 두 나라와 국경을 마주한 아헨(Aachen)인근.
부우웅!
자정을 훌쩍넘긴 새벽, 검은 스포츠카 한 대가 어두운 도로를 갈랐다.
전조등도 켜지 않고 빠른 속도로 좁은 길을 달리는 차의 모습은 무언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 급해 보였다.
하지만 질주는 오래지 않아 멈췄다.
부아아앙!
반대편에서 나타나 스포츠카의 앞길을 가로막은 다섯 대의 흰색 밴.
밴의 옆구리엔 무명교를 상징하는 회색의 성표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앞길이 틀어막힌 스포츠카는 그대로 방향을 틀었다.
끼기기긱!
고무 타는 냄새와 함께 날카로운 소리가 조용한 밤을 깨웠다.
허나, 반대편 역시 무명교의 차량이 길을 막은 것은 마찬가지.
결국 스포츠카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서자 차량을 포위한 밴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하나같이 참마검, 클레이모어를 등에 멘 무명교의 성기사들.
수십의 성기사가 원형으로 스포츠카를 둘러싼 채 천천히 다가갔다.
딸깍!
차에 탄 사람이 내린 것은 그때였다.
“저 하나 때문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모일 줄은 몰랐는데요.”
회색 사제복을 차려입은 금발의 소녀.
차에서 내린 클레어는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둘러싼 성기사들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성기사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성녀님, 이만 돌아가시죠.”
“아직도, 당신들에게 제가 성녀인가요?”
그 말에 클레어는 조소했다.
정말로 자신을 성녀라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으니까.
“……혐의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어떠한 위해도 없을 겁니다.”
클레어의 물음에 성기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그것뿐이었다.
“모셔라. 상처 하나도 입혀서는 안 된다.”
그의 명령과 함께, 성기사들이 천천히 한 발자국씩 앞으로 다가갔다.
클레어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빨리 잡힐 줄이야…….’
급히 몸만 빠져나가야 했던 그녀에게 다른 탈출 루트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벨기에나 네덜란드로 건너가 한국으로 향하려 했던 그녀에게는 아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진혁 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성기사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서진혁의 얼굴을 떠올렸다.
“키이이이이!”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클레어의 시선이 저절로 위를 향했다.
“아……!”
곧, 달빛 아래로 날아드는 무언가를 발견한 그녀의 눈이 커졌다.
천둥비룡의 머리를 단 용.
언뜻 기괴하게 생긴 용의 배에 달린 바구니에서 무언가가 쏟아져 내렸다.
“뭐, 뭐야?”
“용?”
“전투 준비!”
늦게나마 하늘에 나타난 불청객을 파악한 성기사들이 등에 멘 클레이모어를 뽑아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채 검을 휘두르기도 전.
쿠웅!
비처럼 쏟아져 내린 자들이 지면을 밟았다.
인간이었다.
아니, 인간이 아니었다.
그 육체는 인간이되, 칙칙한 회색으로 물든 피부와 초점 없는 동공은 살아 있는 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는 모습.
“서, 서진혁이다! 서진혁의 괴물들이야!”
정체를 눈치챈 성기사 중 하나가 비명을 지르듯 외치며 기다란 참마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까가각!
그의 검은 회색 피부의 인간에게 너무나 쉽게 잡혀 버렸다.
“아, 아니!”
검을 붙잡힌 성기사가 있는 힘껏 힘을 줘 봤지만, 검은 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쨍!
“……말도 안 돼.”
부러져 손잡이만 남은 검을 내려다보는 성기사의 눈이 부르르 떨렸다.
아무리 무명교의 성기사가 강력한 힘을 지녔다지만, 살아 있을 적 S급에 랭크되었던 미국헌터협회의 센티넬을 당해 낼 방법은 없었다.
그것은, 다른 성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퍽! 퍼퍽!
무기 하나 쥐지 않고 수십의 성기사를 때려눕힌 망자들의 시선이, 홀로 남은 클레어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뻤다.
“진혁 님께서 보낸 건가요?”
“키이이이이!”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뒤이어 착륙한 용, 멜리나였다.
대답하듯 울부짖은 그녀는 이곳에 타라는 듯, 배에 매달고 있는 곤돌라를 짧은 앞발로 가리켰다.
“……알겠어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클레어가 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렌을 구해야 해.’
한국에 도착한 그녀가 해야 할 일을 떠올리며.
* * *
대서양과 태평양을 횡단하는 비행 끝에, 성녀는 한국의 강화도에 위치한 진혁의 영지에 도착했다.
영지를 이루고 있던 사령수는 모조리 뽑혀 미국으로 옮겨간 지 오래였지만, 그녀가 한때 살았던 건물만은 여전히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서진혁 역시 아시아의 게이트를 닫기 위해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왔군.”
“오랜……만이네요.”
기다리고 있던 진혁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클레어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 왔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교단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다.”
“……주교회의가 저와 진혁 님을 이단으로 규정했어요.”
“그렇군. 그래서 거리낌 없이 공격한 건가.”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고작 한마디였지만, 진혁이 상황을 이해하기엔 충분했다.
“네? 공격이라뇨?”
“어제 일본에서 습격을 받았다. 확인해 보니 무명교의 신도들이더군.”
“그런…….”
“네가 습격당할 거란 정보도 갖고 있었다. 덕분에 멜리나를 보낼 수 있었지.”
“……고마워요. 진심으로.”
진혁의 설명을 들은 클레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을 구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부탁이 하나, 더 있어요.”
“뭐지?”
“렌을 구해 주세요.”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진혁의 눈빛에, 그녀는 뒷말을 덧붙였다.
“저를 본단에서 탈출시키려고 성기사들을 막아섰어요. 아무리 렌이 강해도 교단 전체를 이길 수는 없으니까, 지금쯤이면 교단의 성기사들에게 잡혔을 거예요.”
진혁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은 곤란하다.”
사실상의 거절.
“……어째서요?”
그녀는 무의식중에 소리칠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 내고는 물었다.
곧, 그가 대답했다.
“내가 움직이는 순간, 무명교는 멸교를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걸 원하는 것이냐?”
“그건…….”
대답을 들은 클레어의 눈이 커졌다.
“문제는 주교회의와 그들을 따르는 자들이에요. 교단 전체를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다고요!”
“그걸, 내가 무슨 수로 구분할 수 있지?”
“아…….”
“이 상태에서 내가 움직인다면, 주교회의를 따르지 않던 교단의 인물들도 돌아서겠지. 그러면 결과는 마찬가지일 거다.”
진혁의 차가운 답에, 그녀는 할 말을 잃고 몸을 떨었다.
멸교.
이름 없는 신의 종인 그녀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무거운 단어.
호위기사 한 명의 목숨과 교단 전체를 바꾸는 선택은 아무리 그녀라 해도 할 수 없는,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이었다.
“……맞는 말이에요.”
고개를 숙인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뺨을 타고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눈물이 클레어의 발 앞에 고였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진혁은 제안 하나를 던졌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네?”
“네가 날 돕는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테지.”
“돕는다니…… 어떻게요?”
진혁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자, 흐르는 눈물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혁은 그녀를 향해 짧게 설명했다.
“내일, 나와 갈 곳이 있다.”
말을 마친 진혁의 눈이 번쩍, 하고 빛났다.
* * *
홍콩.
중원의 아홉 나라 중 가장 번창한 나라의 수도.
등록된 인구만 천만, 그렇지 않은 사람까지 더하면 이천 만에 달하는 인구가 살아가는 거대도시.
“그게 정말이야?”
“자넨 뉴스도 안 봤어? 오늘이 그날이라니깐.”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오늘, 홍콩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달아올라 있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서진혁, 그분이 이곳에 방문한다고?”
“그래, 중원에 열리는 게이트를 봉쇄하러 직접 온다는 거잖아.”
“그러면, 이제 방공호에 들어갈 일은 없겠네?”
서진혁이 온다.
그 말인즉, 중원의 게이트는 오늘 이후로 모두 사라지게 된다는 뜻.
많은 인구만큼이나 쏟아져나오는 괴수들에 지쳐 있던 팔국의 사람들에겐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만나러 온 것은 서진혁뿐만이 아니었다.
진혁의 옆에 선 금발 머리의 소녀.
사제복을 입은 소녀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니…… 저 사람은.”
“성녀?”
“성녀가 어째서 이곳에…….”
성녀가 이단으로 낙인찍혔다는 사실은 아직 전해지지 않은 상황.
예고도 없이 등장한 성녀의 모습에, 게이트가 영원히 봉쇄되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할 수밖에 없었다.
“성녀가 함께 왔다니…… 무명교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뭔진 모르겠지만 특종이야. 빨리 카메라 잡아!”
전 세계에서 모인 방송사들의 카메라가 그녀와 서진혁에게로 초점을 맞췄다.
모두의 궁금증 속에서, 진혁과 함께 단상에 오른 그녀는 마이크 앞에서 입을 열었다.
“……저는 이름 없는 신의 부름을 받은 성녀이자, 주교회의가 규정한 이단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성녀가…… 이단이라고?”
클레어의 폭탄선언에 놀란 사람들이 웅성댔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어제, 주교회의는 저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종교재판소의 법정에 세우려 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름 없는 신이 직접 선택한 성녀를 어떻게…….”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다행히도 서진혁 님의 도움을 받아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다면 지금쯤 이곳이 아니라 종교재판소의 법정에 서 있었겠죠.”
그 말과 함께, 클레어는 숨을 잠시 고르고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부터, 이 방송을 보고 있을 교단의 신자들에게 선언합니다. 현재 교단을 통제하고 있는 주교회의는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이단자이며, 이들의 말을 따르는 자들 역시 이단으로 선언될 것입니다.”
충격적인 발언의 연속.
웅성거림조차 없이 조용해진 행사장을 둘러보던 서진혁이 마이크를 잡은 것은 그때였다.
“나, 교단의 수호자인 서진혁은 성녀를 지지할 것이다. 그러니.”
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변했다.
“지금부터, 나와 내 망자들은 교단으로 진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