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54)
에피로나와 지구가 연결되고 이능이 지구에 뿌리를 내렸을 때.
각국의 헌터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의 권력을 손쉽게 잡을 수 있었다.
괴수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능을 다룰 수 있는 헌터들 뿐이었으니, 안전을 보장받고 싶은 국민들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
수많은 정부가 세워졌다 무너졌다를 반복했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혼란에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았다.
“대통령 각하, 상대인 미스터 서는 저희만으로 상대할 수 없습니다.”
에이미.
미국헌터협회의 협회장이자, 미국의 헌터들의 정점에 선 여자.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도, 홀로그램으로 띄워진 백발 노인에겐 예의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협회장, 미국의 헌터들 전부가 가도 불가능하단 말입니까?
“상대는 죽은 괴수들 수만을 군대처럼 부리고 있습니다. 저희 헌터들이 괴수들을 상대하는 데 특화되어 있긴 합니다만, 군대처럼 움직이는 수만의 괴수를 상대하는 건 무리가 있습니다.”
―천하의 협회장이 이렇게 약한 소리를 할 줄이야. 죽기 전에 좋은 모습을 보는군.
‘이 영감이…….’
대통령의 농담에 에이미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법적으로 연방정부와 협회는 일종의 동맹 관계였지만, 실제로는 무력을 쥐고 있는 헌터들이 더욱 우위에 있었으니까.
아쉬운 상황만 아니었다면 뭐라 쏘아붙이기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안 돼.’
상대는 미합중국의 대통령.
이능을 다루는 자들을 제외하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괴수를 상대할 수 있는 군대를 보유한 존재.
‘군대엔 군대로 맞서야 해.’
괴수 군단에 비해 힘은 몰라도 숫자와 조직력에서 불리한 헌터들에게, 군대의 조력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
“미국의 안보를 위해서입니다. 도와주십시오.”
―협회장의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줘야지. 걱정 마시오, 이미 그들을 유타주로 보냈으니까.
에이미의 말에 대통령은 걱정하지 말하는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부족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들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은 미군 중에서도 최정예로만 구성된 요원들이오. 아무리 괴수의 숫자가 많다지만…….
“그 괴수들 중엔 용도 존재합니다.”
―용?
에이미가 용을 언급한 순간, 대통령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스스로를 세계의 수호자라 자청하는 외계인.
지구의 경찰이 되어 세계를 주무르길 원했던 미국에겐 눈엣가시처럼 거슬리는 존재였지만, 그들이 가진 힘은 초강대국인 미국조차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용이 그 테러리스트와 한 편이라니…….
대통령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것도 잠시.
―그러면, 뭐가 필요한지 말해 보시오, 협회장.
무언가 결단을 내린 듯, 에이미를 바라보는 대통령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허나.
“노라드(NORAD)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녀가 요구를 밝힌 순간, 대통령은 두 눈을 부릅떴다.
* * *
진혁이 유타주의 사막을 자신의 영역으로 선포한 날,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백여 년 전 이능과 엽사가 등장한 이후, 몇몇 강력한 엽사들이 손을 잡고 소국을 전복시키는 일이 없지는 않았다.
개인이 자신의 영토를 선포하고 국가를 세우는 것도 종종 있어 온 일.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진혁이 영역으로 선포한 곳은 다름 아닌 세계 제1의 최강대국 미합중국의 한복판이었고, 그는 혼자가 아니라 수만의 괴수 군단을 부리는 지배자였다.
미국은 결코 이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조심하세요, 진혁 님. 이미 들으셨겠지만, 미국은 전력으로 진혁 님을 공격할 계획인 것 같아요.
“그럴 것이다. 국가의 존립이 달린 문제니”
통신구슬 위로 떠오른 성녀, 클레어의 말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아침에 군벌이 나타나 국토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데,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더 이상하다.
그것이 수많은 주들의 연합인 미국이라면 더더욱.
혹시나 진혁을 보고 다른 주들이 연합에서 독립할 생각을 품게 된다면 미국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날 테니, 충돌을 피할 가능성은 없다.
―조심하세요. 일 품 엽사의 숫자도 숫자지만, 미국의 마공학병기는 아직 교단에서도 완전히 파악되지 않았으니까요.
말을 마친 클레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진혁을 바라봤다.
수많은 도움을 받아 왔던 그녀였기에, 클레어는 더더욱 진혁이 무사히 생존할 수 있기를 바랐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
진혁은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지만.
“조심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놈들이니까.”
―……정말.
“그럼,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 말과 함께, 진혁은 통신을 끊고는 옆에서 마법 결계를 세우고 있던 아피루스와 청명을 바라봤다.
“너무 튼튼하게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무너질 테니까.”
“에이, 그럴 리가요. 저나 누나나 이래 보여도 용이라고요. 인간이 이 결계를 쉽게 뚫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용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해도 뚫기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을 상대하기 위해선 그 정도의 강도는 갖춰야겠지.”
그의 말에 두 용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코웃음쳤다.
하지만 진혁은 진지했다.
“인간들이 백 년 동안 놀고만 있던 건 아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진혁 님?”
“너희 결계를 깰 기술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상대가 미국이라면.”
한국 역시 엽사의 수준으로는 결코 밀리지 않지만, 미국은 그에 더해 거대한 영토와 자원, 최첨단의 마공학을 손에 쥐고 있다.
‘그중 몇 가지라면, 일시적으로나마 결계를 무너트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
세한의 정보력을 동원할 수 있는 진혁은 미국의 비밀병기에 대해 단편적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녀석들이 동원된다면, 제아무리 용이 구축한 결계라도 완전히 막아 내지는 못하리라.
“그러면, 도망쳐야 하는 것 아니에요? 저희야 용이라지만 진혁 님은 인간이시잖아요.”
“이 결계가 뚫릴 정도의 에너지라면, 인간의 몸으로는 견딜 수 없을 거다.”
아피루스와 청명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진혁을 바라봤다.
그러나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방법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부탁할 게 있는데.”
“부탁이요?”
“지하 공간을 좀 만들어 줘야겠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아피루스를 향해, 진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 *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North American Aerospace Defence Command, NORAD)의 본부가 위치한 샤이엔 산 지하 600미터.
본래 비행형 괴수들을 포함한 괴수들의 전 세계 이동 경로를 추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대이지만, 단단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더 깊은 곳엔 또 다른 공간이 존재했다.
부대의 인원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특급기밀.
노라드의 사령관, 제럴드 오닐은 그곳의 빛나는 수정 앞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각하.”
딸깍!
경례와 함께 전화를 끊은 오닐은 함께 내려온 정보장교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부대 내의 기밀을 관리하는 정보장교가 내민 것은 붉은색 열쇠.
그의 왼손엔 이미 푸른색 열쇠가 쥐어져 있었다.
장교로부터 붉은 열쇠를 건네받은 오닐은 수정 앞으로 다가갔다.
온갖 기계장치가 들러붙어 있는 수정 아래에 있는 것은, 두 개의 열쇠가 꽂힐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잠금장치.
장교와 나란히 선 오닐은 입을 열었다.
“열쇠 삽입.”
“삽입.”
“방향 확인.”
“확인.”
“잠금장치 해제. 하나, 둘, 셋.”
철컥!
사령관의 구령에 맞춰 두 사람이 동시에 열쇠를 돌렸다.
그 순간.
파아앗!
수정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빛이 기둥처럼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수백 미터 두께의 화강암을 뚫고 올라간 빛의 기둥이 향한 곳은, 지구가 아니었다.
적도 상공 3만 5,786킬로미터의 정지궤도.
그곳엔, 불이 꺼진 채 죽은 듯이 정지해 있는 위성이 있었다.
푸른 빛의 기둥이 향한 곳은 위성의 한쪽에 뚫린 구멍.
녀석의 동력부가 위치한 곳이었다.
우우웅!
푸른빛을 빨아들인 위성의 동력부가 소리 없이 가동했다.
곧, 공처럼 접혀 있던 위성이 깨어난 아르마딜로처럼 말고 있던 몸을 펼쳤다.
아르마딜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녀석의 배 부분에 수십 개의 바늘과도 같은 금속 기둥이 박혀 있다는 점 정도.
곧, 위성은 소리 없이 불꽃을 뿜으며 거대한 몸을 움직였다.
이내, 자리를 잡은 위성의 배에서 바늘처럼 박혀 있던 금속기둥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력에 이끌려 지상을 향해 낙하하는 기둥들의 안에 담긴 것은, 고순도의 마정석과 약간의 마기.
쐐애애액!
대기권과의 마찰로 붉게 달아오른 기둥들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유타주의 한 회색 사막이었다.
일만여 킬로미터를 순식간에 가로지른 마력소멸탄(魔力消滅彈)들이 마하 20을 넘는 속도로 결계를 꿰뚫고 소금 벌판에 꽂힌 순간.
콰아아앙!
수십 개의 버섯구름이 사막 전체를 집어삼켰다.
“마력소멸탄 폭발 확인.”
“좋아.”
부하 헌터의 보고를 들은 에이미는 폭발장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과연, 저걸 맞고도 살아 있을 수 있을까?’
마력과 마기의 반발력을 이용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미국의 비밀병기.
설사 살아 있다 한들, 서진혁 그놈과 놈의 괴수군단은 제대로 싸울 수 없는 상태일 게 분명하다.
‘내가 저 버섯구름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군.’
용이라면 모를까, 아무리 강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몸으로 견딜 수는 없는 폭발.
최근에야 개발되어 실제로 사용된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지만, 그 위력만큼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자, 폭발이 잦아들면 사막 내부로 진격한 다음 잔당들을 처리한다. 군대와 협조해서 전지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여느 때와 달리 전투복을 입은 그녀의 말에 모여 있던 헌터들이 복창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사막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니!”
사막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놀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모래바람을 가로지르며 등장한 검은 무리.
그리고, 그 사이에 선 한 명의 남자.
“역시.”
서진혁.
자신을 잡기 위해 모인 엽사들을 바라보며, 그가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