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48)
얼어붙은 허드슨강 위로 무거운 침묵이 감돈다.
산산조각 난 얼음조각 위에 간신히 떠 있던 엽사들과 망자들의 시선이, 멈춰선 나이트와 식귀에게로 모여들었다.
정확히는.
나이트의 복부에 박힌 붉은 검을 향해.
“……아다만티움이라니, 이건 예상 못 했군.”
산산조각 난 검은 갑주 사이로 깊숙이 박힌 아스칼론의 칼날을 내려다보며, 나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시선이 식귀, 성준의 망가진 왼팔로 향했다.
“……이런 중요할 때 방심을 해 버리다니, 나도 정말이지…… 쿨럭!”
말을 하다 말고 나이트의 입에서 검은 피가 쏟아졌다.
한 번만 피했다면.
저 식귀의 왼팔에 검게 코팅된 것이 아다만티움이란 사실을 조금만 일찍 깨달았더라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철가면의 등 뒤에 일렁이던 힘의 근원, 마기의 응집체들은 공기중으로 흩어지는 중이었으니까.
그리 오래지 않아, 눈앞의 마인은 목숨을 잃게 되리라.
물론, 성준은 그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지만.
파사삭!
성준이 아스칼론을 뽑아 내자, 마인의 몸이 그대로 잿가루가 되어 무너져내렸다.
땡그랑!
사라진 기사가 있던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것은 그가 지니고 있던 검은 갑옷과 검, 그리고 미처 지워지지 않은 마기의 흔적뿐.
“……끝인가?”
“그런 것 같은데.”
“하마터면…… 진짜 죽을뻔했네.”
그제야, 얼음덩어리에 매달려 있던 엽사들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몇 번의 칼질만으로 각국의 대표 엽사들을 묶어 놓을 수 있는 강함.
제대로 맞붙었다면, 이 자리에 제대로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리라.
일 품, S급 헌터인 제이슨 역시 마찬가지.
‘정말로…… 마인이 부활했다고?’
조금 전 마인의 힘을 직접 느낀 순간, 그의 마음속에 마왕이 정말로 부활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머리로는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조금 전 마인이 보여 준 거대한 마기는 대체 뭐란 말인가.
‘아무래도, 장난칠 때가 아닌 거 같은데. 협회장에게 연락해야겠어.’
처음과 달리 진지한 표정을 지은 그가 스마트폰을 꺼내 들던 그때.
다른 편에선 날카로운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성자…… 여긴 무슨 일이죠?”
“그걸 내가 알려 줄 이유가 있나?”
경계하는 성녀를 향해 코웃음 치는 성자.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성자를 올려다보던 성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생각대로 되진 않을 거예요.”
“신께서 원하는 일을 할 뿐이야.”
“그래서, 교단에 테러를 저질렀나요?”
“신의 뜻을 곡해한 너희에게 경고를 준 것뿐이야.”
“이 이단자가…….”
스릉!
성자의 말에 분을 참지 못한 성기사 중 하나가 칼을 뽑아 들고는 달려들었다.
돌발적으로 일어난 일.
하지만, 그가 채 몇 발자국을 더 떼기도 전.
파앗!
성자의 손에서 회색의 빛이 터져나왔다.
그와 함께 쏘아져 나간 것은, 신성력으로 빚어진 몇 개의 투창.
푸푸푹!
두터운 금속갑옷으로 전신을 감싼 성기사였지만, 회색 창은 갑옷을 마치 두부처럼 부드럽게 관통했다.
“크아악!”
사지에 투창이 꽂힌 채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성기사.
파앗!
“이게 무슨 짓이에요?”
클레어는 쓰러진 기사에게 치료의 신법을 걸고는 성자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내가 하고싶은 말인데. 명령도 없이 달려들다니, 성기사들 교육이 덜 된 모양이지?”
“……물러나세요.”
하지만 성자, 쥐벨이 코웃음 치며 한 말에 그녀는 검을 뽑아 든 성기사들을 뒤로 물릴 수밖에 없었다.
“집안싸움 할 때는 아닌 거 같은데.”
옆에서 다툼을 구경하고 있던 진혁이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이미 마왕이 부활한 판에, 내전까지 벌일 생각인가?”
“진혁 님, 나중에 이야기하죠.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에요.”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모든 건 저 성녀 탓이지.”
“당신……!”
클레어는 비꼬듯 말하며 비웃는 성자를 노려봤다.
그러나.
둘의 신경전은 곧 끝날수밖에 없었다.
스으으으!
허드슨강의 서쪽, 지평선 너머로부터 느껴지는 거대한 마기.
“……이건.”
지금까지 느껴 본 적 없는 거대한 기운이 주는 압박감에, 진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것은 성자와 성녀 역시 마찬가지.
“말도 안 돼…….”
“설마…….”
에피로나와 지구가 서로 연결된 지 백여 년.
그 긴 세월 동안, 이 정도의 마기를 뿜어 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단 하나뿐.
“마왕인가.”
마기의 기둥이 하늘로 치솟는 모습을 바라보며, 진혁의 눈이 빛났다.
* * *
그레이트 솔트 호.
세계에서 가장 염도가 높은 호수라 불리는 소금호수.
하지만, 이제는 호수란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물이 없는 호수를 호수라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호수를 이루고 있던 진한 소금물들은 모두 마기의 침식에 의해 증발했고, 남은 것은 검게 변색 된 소금들 뿐.
그리고.
조금 전까지 호수였던 평원의 중심부.
“흐음…….”
무형의 검은 기둥 아래에서, 한 남자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있었다.
남자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남자를 감싸고 있던 검은 마기의 기둥이 숨 쉬듯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다.
“이제야 좀…… 움직일 만하겠구나.”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남자는 손에 힘을 쥐었다.
파사삭!
그와 함께, 손에 들려있던 검은색 왕관이 가루처럼 부서졌다.
한때 자비의 관이라 불리던, 무명교의 삼대 성물 중 하나.
하지만, 성물을 부숴 버린 남자의 눈엔 그 어떤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자의 시선이 그의 앞에 납작 엎드린 소년에게로 향했다.
“고맙다.”
“아…… 아닙니다.”
트리커.
평소라면 코웃음이나 쳤겠지만, 지금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이런…… 괴물이…….’
자신은 개미처럼 보일 만큼 압도적인 마기의 차이.
조금이라도 상대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생명을 잃게 될 거라는 본능의 경고가, 그를 저절로 공손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트리커의 속내를 알 리 없는 마왕은 넙죽 엎드린 소년을 보며 씨익 웃었다.
“원래라면 백 년 뒤에나 깨어날 수 있었을 텐데, 네가 성물을 찾아낸 덕분에, 완전한 힘을 찾게 되었어. 상을 주도록 하마.”
“아닙니다.”
“아니, 넌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트리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왕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스으으!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검은색으로 빛나는 보석이었다.
오직 마왕만이 지닐 수 있는 순수한 마기의 결정체.
“일어나라.”
“네……?”
마왕의 명령에, 엎드려있던 트리커는 무심코 몸을 일으켜 마왕을 바라봤다.
그 순간.
휘익!
마왕은 손에 쥐고 있던 보석을 트리커에게 던졌다.
푸욱!
“커헉……!”
가슴의 정 중앙.
주먹만 한 크기의 검은 보석이 트리커의 심장에 정확히 틀어박히자, 소년의 입에서 검은 피가 울컥 쏟아져나왔다.
“왜…….”
그가 의문 섞인 표정으로 마왕을 보던 것도 잠시.
두근! 두근!
보석으로부터 전해진 순수한 마기가 심장박동과 함께 전신의 혈관으로 퍼져 나갔다.
그와 함께, 소년의 육체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우둑, 우두둑!
기괴한 소리와 함께 팔다리가 꺾였다, 돌아오길 반복하는 과정에서 소년의 몸이 점차 부풀어 오른다.
곧, 작은 몸집의 소년이 있던 자리엔 사지가 길게 늘어난 네 발 짐승만이 존재했다.
“크르르…….”
“그래, 감사할 필요는 없다.”
으르렁대는 검은 짐승을 향해 마왕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다음, 자신의 마기로 완전히 침식된 주변의 대지를 둘러봤다.
“……하지만 조금 부족해.”
중얼거림과 함께, 그는 손을 하늘 위로 뻗었다.
그러자.
스으으으!
마왕을 감싸고 있던 어둠의 기둥이, 빠르게 그 크기를 사방으로 키워 나갔다.
호수와 소금평원,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대도시 솔트레이크시티까지.
“그리고…….”
그는 손날을 세워 허공을 가로로 그었다.
그러자, 공간이 일 자로 쪼개지면서 거대한 차원문으로 변했다.
괴수들의 세상, 에피로나와 연결된 새로운 차원문.
곧, 그 너머에서 누군가가 마왕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쿵. 쿵.
“정말 돌아왔군, 마왕. 껍데기는 좀 다르지만.”
외눈박이.
한 팔이 잘린 그는 자신보다 곱절은 작은 마왕을 바라보며 놀란 듯 말했다.
그러자 마왕은 씨익 웃었다.
“자네가 보내 준 껍데기, 제법 쓸만하던데.”
“그 정도 재능은 충분히 있는 놈이었으니까.”
외눈박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원문에서 하나둘씩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각기 에피로나의 한 구역을 영역으로 삼는 최상위 포식자들.
갑 급 괴수.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괴수들의 눈빛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왕은 씨익 웃었다.
“그럼, 다 모였으니 시작해 볼까.”
최후의 전쟁을.
* * *
강력한 마기 반응이 일어난 그때.
연맹은 즉시 총회를 다시 개최했다.
“위성에서 보내 온 자료에 따르면, 미국 동북부의 1%가 마기에 침식됐다.”
미국헌터협회의 대표, 제이슨의 말에 좌중은 침묵했다.
1%란 수치는 일견 적어 보일 수 있지만, 그 대상이 미국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한반도 5배 크기의 땅이, 인간이 살 수 없는 괴수와 마인의 땅으로 변해 버렸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심지어, 침식은 점차 확산 중이었다.
“대전쟁의 참사를 되풀이할 수는 없어요. 어떻게든 막아야 해요.”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성녀였다.
“아직 세력이 그리 넓지 않은 지금이라면,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 거예요.”
유럽과 아시아의 절반을 집어삼켰던 대전쟁 당시에 비하면, 지금은 상황이 나쁘지 않은 편.
지금 마왕을 처치할 수 있다면, 대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쯧.”
하지만 제이슨은 그 말을 듣고 혀를 찼다.
“마왕을 처치할 수준의 헌터들이 전 세계에서 모이려면 못해도 오 일은 걸린다. 그 전엔 개죽음일 뿐이야.”
“개죽음이라뇨, 이건 인류를 위한…….”
“그럼, 무명교의 성기사들이 먼저 개죽음을 당하겠군. 아무것도 못 한 채 저 숨조차 쉴 수 없는 죽음의 공간에서 말야.”
“그건…….”
“마왕에게 닿을 때까지 저 공간 안에서 살아 있을 방법이라도 있다면, 말해 줬으면 하는데.”
클레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제이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우선 오 일 동안 버틸 차단선을 결정하고, 거기까지 침식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우선으로 하지. 그리고…….”
하지만, 그는 끝까지 말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내가 하지.”
“……뭐?”
서진혁.
그가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