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45)
폭음과 비명, 그리고 사이렌소리가 국경을 뒤덮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난데없이 벌어진 테러.
그 혼란을 틈타 국경을 넘는 것은, 평소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누가 근육덩어리 아니랄까 봐, 엄청 요란하네.”
검은 마스크를 쓴 꼬마가 구멍 난 철조망을 넘으며 비웃었다.
보기와는 달리 마법 금속으로 만들어진 데다 파손을 대비해 경보마법까지 덕지덕지 발라 놓은 거대한 보구.
하지만, 꼬마의 손이 한 번 닿은 순간 장벽은 모든 기능을 잃고 평범한 철조망으로 전락했다.
평소라면 금방 눈치챘겠지만, 전쟁상황이나 다름없는 지금 국경수비대가 철조망에 이상이 생긴 걸 알아차리긴 쉽지 않으리라.
“떠들 시간에 움직여야 할 텐데.”
그 말에 답한 것은 뒤따라 철조망을 넘은 철가면의 사내, 나이트였다.
“버서커가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간다. 국경수비대 놈들도 곧 상황을 파악할 거야.”
“네 걱정 먼저 하지 그래? 여기서 뉴욕까지 가려면 말할 틈도 없을 텐데.”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트리커가 코웃음 쳤지만, 철가면 뒤로 보이는 나이트의 눈은 무덤덤했다.
“그래, 그래. 명색이 마왕의 심복인데 알아서 하시겠지요. 가서 시선이나 확실히 끌라고.”
“너야말로, 제시간 안에 성물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타앗!
그 말과 함께, 나이트와 그의 부하들은 사막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하여간, 마지막까지 폼 잡는 건 변하질 않네.”
사라진 나이트가 서 있던 모래 바닥의 발자국을 바라보며 트리커는 코웃음 쳤지만, 시선을 쉽게 떼지는 못했다.
이것이, 동료의 마지막 흔적이 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으므로.
‘서진혁……이라고 했지?’
마인들의 단체 중에서도 강하기로는 1, 2위를 다투던 흑룡대를 홀로 멸절시킨 자.
거기에, 지금의 뉴욕은 전 세계에서 모여든 엽사들로 가득할 것이다.
타락자들, 폴른과 나이트의 전투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시간 벌이나 하는 것이 고작일 터.
그 안에, 성물을 찾아 마왕의 마지막 봉인을 풀어야 한다.
“뭐…… 쉬운 일이지. 가자!”
꼬마의 말이 떨어진 순간.
트리커와 복면을 쓴 자들의 몸이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모래를 할퀴는 차가운 밤바람만이,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채웠다.
뉴욕, 국제엽사연맹 본부.
“마왕은, 이미 부활했다.”
진혁의 입에서 충격적인 발언이 튀어나온 순간, 총회에 참석한 엽사들은 경악했다.
마왕.
두 번째 대전쟁을 열어 인류를 멸망의 기로에 몰아넣었던 마인들의 지배자.
결국 패배해 죽었지만, 대전쟁의 끔찍한 기억을 가진 자들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
마왕이 부활했다는 건, 세 번째 대전쟁이 일어날 거란 의미였으니 놀랄 수밖에.
“부활……이라고요?”
놀란 것은 마왕의 위협을 알리기 위해 총회를 소집한 클레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성녀를 향해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인 하나를 잡아 확인한 사실이다.”
정확히는, 죽은 마인의 영혼에서 뽑아낸 기억으로 알아낸 것.
심문과 달리 영혼에 새겨진 기억은 거짓을 말할 수 없다.
‘서무진을 마왕이라 불렀지.’
마인으로부터 읽어들인 기억을 떠올린 진혁의 눈이, 순간 시퍼렇게 빛났다.
서무진이 마왕의 힘을 얻은 것이거나, 마왕의 혼이 서무진의 몸을 강탈한 것일 터.
어느 쪽이건, 상관은 없었지만.
‘서무진만 처리하면 될 터.’
그러고 나면, 에피로나를 공격하는 일도 한결 수월해지리라.
그때였다.
“마왕이 부활했다니, 그 말을 믿으라고?”
저벅저벅.
한 남자가 구름처럼 모인 인파를 뚫고 나타났다.
X자 흉터가 얼굴 전체를 가로지르는, 험상궂은 표정의 사내.
맨발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오는 남자의 팔다리는 알 수 없는 예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마왕이 죽었다고 공표된 것이 벌써 70년 전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마왕이 되살아났다? 이름 없는 신이 부활이라도 시켜 준 모양이지?”
명백한 신성모독.
무명교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성녀의 앞에서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당신……!”
그 말을 듣던 성녀와 성기사들의 표정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지만, 사내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세계를 설득하고 싶다면, 말이 아니라 증거를 보여라. 이 자리에 무명교의 위선을 모르는 자들은 없을 테니.”
“대체, 저희 교단을 어디까지 모욕하는……!”
성녀가 발끈하고, 성기사들의 손이 허리춤의 검으로 향했다.
그럼에도 사내, 제이슨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가 총회에 온 목적은 다른 이들과 분명히 달랐으니까.
총회 자체를 무산시키는 것.
‘그래, 분노해라. 그리고 덤벼라.’
물론, 협회와 연맹 사이의 알력 따위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저들이 먼저 칼을 뽑아 들고 달려듦으로써, 놈들을 공격할 명분을 얻어내는 것.
그리고, 아무런 제약도 없이 무명교의 성기사들과 일전을 벌이는 것.
그것으로 자신에게 잠재된 살육본능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죽이지만 않는다면, 뭐든지.
‘나중에 딴말하진 않겠지, 회장?’
미국헌터협회의 장, 에이미의 명령을 떠올린 제이슨은 무심코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저자가……!”
스릉!
자신들을 비웃는 것이라 여긴 성기사들이 검을 반쯤 뽑아 들자, 그의 심장은 더욱 빨리 뛰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내가 보증하겠다.”
등 뒤로 들려오는 담담한 목소리.
‘누구지?’
흥이 깨진 제이슨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방해한 자를 찾았다.
두 명의 남녀였다.
어두운 피부의 미녀와 그녀의 허리춤에 닿을 만한 키의 꼬마.
둘 모두, 제이슨의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다시 말해, 그가 기억해야 할 만큼 의미 있는 자들이 아니란 뜻.
“너흰 뭐지? 감히…….”
자신을 방해한 둘을 향해, 제이슨의 날카로운 눈빛이 쏘아졌다.
그러나.
여자와 그의 눈이 마주친 순간.
제이슨은 곧장 판단을 수정했다.
‘인간이………아니야.’
그녀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 새겨진 것은, 광기.
상대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이만한 광기를 품고도 멀쩡하게 말할 리 없다.
아니, 그 전에 이미 미쳐 정신이 나가 버렸으리라.
그의 의심을 증명하듯, 여자와 꼬마는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증명하라.”
“증명하라.”
우웅!
둘이 내뱉은 언령이 대기중의 마나를 진동시켰다.
그와 함께, 둘과 제이슨 사이에 두 개의 표식이 떠올랐다.
복잡한 마나 패턴을 겹겹이 쌓아 만들어 낸 붉은색과 은색의 용.
그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했지만, 제이슨이 놀란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용이였나.”
오직 용들만이 사용하는 마법, 언령.
그중에서도, 용들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하는 언령.
백 년의 역사를 통틀어 다섯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마법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제이슨의 말을 증명하듯, 청명이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벨레룩스, 팔국의 수호룡.”
그녀가 정체를 밝힌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청명의 입으로 향했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마왕의 부활은 사실이다.”
용의 말은 곧 세계와의 약속.
거짓을 말하는 용은 언령의 힘을 잃게 되니, 그녀가 입에 담는 말은 모두 진실이다.
“정말…… 마왕이 부활했다고?”
“용이잖아. 용은 거짓말을 할 수 없어.”
“대전쟁이 시작되는 건가…….”
이 자리에 모인 헌터들 대부분은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대전쟁에 참가했던 자들.
총회에 모인 헌터들이 동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말은 곧.
“……쯧.”
총회를 망치려 한 제이슨의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세계의 수호자라 자칭하는 용이 직접 마왕의 부활을 보증한 순간, 그가 무슨 일을 하건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므로.
“흥이 깨졌어.”
맘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혀를 찬 제이슨은 그대로 몸을 돌려 총회장을 나섰다.
곧, 사람들의 시선은 두 용과 그 옆의 진혁에게로 향했다.
진혁의 시선의 뒤쪽의 성녀에게로 향했다.
“그럼, 다시 시작해보지.”
“아…… 네!”
멍하니 서 있다 고개를 끄덕이는 클레어.
그녀를 바라보던 진혁의 눈빛이, 번쩍하고 빛났다.
총회는 예정보다 길어졌다.
마왕이 부활했단 사실이 증명된 순간, 총회에 모인 엽사들의 질문이 빗발쳤기 때문.
결국, 하루로 예정되었던 총회는 다음날 다시 진행되기로 결정되었고, 총회에 참석한 엽사들은 휴식을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그것은 진혁과 일행들도 마찬가지.
그들이 연맹의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엔 이미 어두운 밤이 되어 있었다.
“결국, 하루를 더 보내야겠구나. 인간들의 의견이 이토록 뭉치지 않을 줄은 몰랐다.”
“다들 생각이 다르니, 하루 만에 정리될 리가 없지.”
뿔뿔이 흩어지는 각국의 대표들을 살피며 청명이 혀를 차자, 진혁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마왕이 부활했다고는 하지만, 대전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은 아니다. 직접 마왕의 공격을 받기 전까지는 자기 일이 아니니, 계산기를 두드릴 여유 정도는 충분할 거다.”
“어휴, 인간들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니까요. 멸망을 코앞에 두고도 자기 것만 찾다니.”
그 말을 옆에서 들은 아피루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이제 곧 느끼겠군.”
진혁은 아피루스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품에 넣어둔 붉은 구슬을 손에 쥐었다.
악령을 내부에 봉인해 둔 고렘의 핵.
유사시를 대비해 준비해 둔 물건을 꺼내 든 진혁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게 무슨…… 아!”
갑자기 변한 진혁의 분위기에 아피루스는 순간 당황했지만, 그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허드슨강 너머,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거대한 흑색 기운.
마기.
“준비해라. 곧 전투가 벌어질 테니.”
그 말과 함께, 진혁의 손에 쥔 고렘의 핵이, 검붉은 빛을 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