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43)
진혁이 뉴욕에 도착한 것은 국제엽사연맹의 총회 전날.
“여긴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하네. 어후, 시끄러워.”
리무진의 가로로 긴 좌석에 옆으로 기댄 아피루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탁자에 놓인 과일을 집어 먹었다.
그 말에, 맞은편의 청명이 핀잔을 주었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세계의 경제를 움직이는 도시니 사람이 많을 법도 하지.”
“그치만 누나, 이건 시끄러워도 너무 시끄럽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내 레어도 도시 쪽엔 안 만들었는데.”
“그럼, 손에 든 그 게임기는 괜찮고?”
“이건 이거고.”
어린 용이 뜨끔한 표정으로 손에 든 휴대용 게임기를 뒤로 감추자 청명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팀장님, 보이십니까?”
“음.”
다른 두 사람.
진혁과 주연의 시선은 리무진의 차창 밖으로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차창 밖 거리에서 무기와 방어구를 찬 채 돌아다니는 사람들.
엽사들이었다.
“못해도 삼 품 이상입니다. 아무리 뉴욕이라지만…….”
“총회에 참가하려 온 거겠지. 대표 하나와 호위 겸 수행원들.”
진혁은 주연의 말을 끊고는 바깥의 엽사들을 살폈다.
이번 총회에 참석할 엽사들은 하나하나가 각 나라를 대표하는 자들이니, 수행원 또한 많은 게 당연한 일.
“……혹시 모르니 호위에 좀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주연을 향해 그는 고개를 젓고는, 앞에서 말다툼을 벌이는 두 용을 향해 턱짓했다.
“아마도, 우리가 이 뉴욕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일 테니까.”
영원에 가까운 세월을 살며 강력한 힘을 손에 쥔 생물, 용.
스스로를 세계의 수호자라 부르는 강력한 존재가 둘씩이나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혁의 말엔 틀림이 없었다.
허나, 주연은 여전히 미답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점검하겠습니다.”
“마음대로.”
손에 쥔 태블릿을 들어 올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진혁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엽사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도착했습니다, 팀장님.”
주연이 손에 쥔 태블릿을 내려놓은 것은 얼마 뒤의 일이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무진의 문이 소리 없이 저절로 열렸다.
“뭐야, 벌써 도착이야?”
“천천히 나가거라.”
문이 열리자마자 뛰쳐나가듯 내린 아피루스를 보며 청명이 혀를 차고는 밖으로 몸을 내뺐다.
뒤이어 진혁과 주연까지 리무진에서 내린 다음, 넷은 미리 예약해 둔 호텔 건물로 들어갔다.
“저기, 난 그냥 레어에서 자면 안 될까? 내일 다시 공간이동 마법으로 돌아오면 되잖아. 여긴 놀 것도 없다고.”
여러 장의 카드키를 들고 오는 주연을 향해 아피루스가 귀찮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 말에, 주연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피루스님이 공간이동을 시도하는 순간, 미국 전역에 배치된 공간이동감지센서가 목적지를 추적할 거예요. 레어 위치가 그대로 미국에 넘어가도 괜찮으시다면 상관없겠지만요.”
하지만, 그녀의 기분 좋은 미소와 다르게 그녀의 말은 그렇지 않았다.
“……아냐, 그건 좀 귀찮겠다. 그냥 열쇠 줘.”
아피루스는 잠시 머뭇거리며 머리를 긁적이고는 주연의 손에 들린 카드키를 받아들었다.
그때였다.
“당신.”
귓가를 파고드는 익숙한 목소리.
진혁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푸른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린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뉴욕에 올 줄은 알았지만,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제니퍼 메이슨.”
미국엽사협회 소속 S급, 일 품의 엽사.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는 그녀가 이 시점에 대륙 반대편에 와 있을 만한 이유는 하나였다.
“당신이 미국협회 대표인가?”
하지만 그 말에 제니퍼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용무가 있어서요. 당신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나를?”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키자, 진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니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음…… 시간도 늦었는데, 저녁이나 한 끼 하죠. 근처에 괜찮은 스테이크집이 하나 있는데.”
“스테이크?”
그녀의 말에 답한 것은 진혁이 아니었다.
아피루스.
어느새 진혁의 앞에 서서 제니퍼를 바라보는 꼬마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이 아이는 누구죠?”
“가면서 얘기해 주지.”
제니퍼의 말 대로, 식당의 스테이크는 맛있었다.
최소한, 열세 접시 째의 스테이크를 입으로 집어넣고 있는 아피루스에게는.
“여기 하나 더.”
“아니, 세 접시 더 주세요.”
“아…… 네.”
함께 앉은 주연이 주문을 정정하자, 꼬마의 앉은 키만큼 쌓인 하얀 접시를 보던 직원이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라졌다.
주변에서 식사 중이던 손님들의 시선 역시 놀라움으로 가득 찬 것은 마찬가지.
허나,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앉은 진혁과 제니퍼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날 보고 싶었다니, 의외로군.”
“당신에겐 꼭 한번 보답하고 싶었으니까요.”
말을 마치고 미소를 짓는 제니퍼와 달리, 진혁의 입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식탁 위에 올라간 스테이크는 손 하나 까딱 대지 않은 채 식어 가고 있었지만, 이미 둘의 관심은 식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당신에게 확인해야 할 것도 있었고요.”
“뭐지?”
“당신, 성녀와 가까운 사이인 걸로 알고 있는데.”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제니퍼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진혁과 눈을 마주했다.
“마왕에 대한 이야기, 사실인가요?”
속마음을 읽어 내기라도 하려는 듯, 진혁의 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집요하리만큼 번뜩였다.
그의 답은 짧았다.
“사실이다.”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진혁과 상대의 마음을 읽어 내기 위해 애를 쓰는 제니퍼.
식어 가는 고기 위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사실이군요. 칠십 년 전에 죽은 마왕이 부활한다는 게 정말로 가능할 줄이야.”
진혁의 투명한 눈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던 제니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강의 상황을 눈치챈 진혁은 피식 웃었다.
“그쪽 협회의 의견은 다른가 보군.”
“성녀나 연맹, 둘 중 하나의 자작극일 가능성으로 보고 있었죠. 저도 당신이 말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고.”
“그럼, 당신의 목표는 그걸 방해하는 건가?”
“엄밀히 말하면, 제가 아니지만요.”
제니퍼는 진혁의 물음에 고개를 젓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제이슨, 그자를 조심해요.”
제이슨이라는 이름을 내뱉는 순간, 그녀의 표정에 불안이 서렸다.
“무슨 짓을 벌일지는 모르겠지만, 그자의 성격과 능력이라면 보통은 아닐 테니까. 아무리 당신 옆에 용들이 함께한다고 해도 말이죠.”
말을 마친 제니퍼의 시선이 스테이크를 통째로 삼키는 아피루스에게로 향했다.
영 미답지 않아 보이는 눈빛.
그러나.
“그게 단가?”
진혁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나보단, 그자를 걱정해야 할 텐데.”
“……네?”
어이없어하는 제니퍼와 눈을 마주하며, 진혁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잘 먹었어, 인간! 정말 최고잖아?”
“나 역시 마찬가지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는 아피루스와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청명.
“아닙니다. 세계의 수호자들께 이 정도도 대접하지 않을 수는 없죠.”
그 말에 제니퍼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진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잊지 마요.”
“그러지.”
“조심해서 가십시오.”
진혁과 주연의 인사를 뒤로하고, 제니퍼는 뉴욕의 밤 골목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럼, 숙소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녀가 사라지자, 주연은 길 안내를 위해 자연스럽게 앞장을 섰다.
하지만.
“먼저 가도록. 난 조금 걷다가 들어가겠다.”
진혁은 주연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날 누구라고 생각하나.”
주연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지만, 돌아온 진혁의 답에 그녀는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조심하십시오.”
“걱정하지 마, 진혁 님은 내가 지켜드릴 거니까.”
결국, 그 말을 끝으로 셋은 호텔을 향해 사라졌다.
홀로 남은 진혁은 일행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왼쪽, 오른쪽, 다시 왼쪽.
몇 개의 블럭을 지난 진혁의 앞에 나타난 것은 고층건물 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
골목길의 중간쯤에서 걸음을 멈춘 진혁이 몸을 돌린 것은 그때였다.
“나와라.”
보이는 것이라곤 쓰레기와 어둠뿐인 골목길.
그러나, 누군가를 부르는 진혁의 눈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순간.
스으으!
느닷없이 허공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마기.
그와 함께, 골목길을 장악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하얀 가면을 쓴 채, 전신의 피부를 검은 천으로 가린 누군가.
그의 양손엔 검게 물들어 있는 단검이 각기 한 자루씩 쥐어져 있었다.
“마인인가?”
진혁이 물었지만,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파팟!
놈의 손에 들린 두 개의 단검이 진혁을 향해 쏘아졌다.
어지간한 엽사라도 피하기 힘들 만큼 빠른 속도.
진한 마기로 덕지덕지 코팅된 저 단검에 잘못 맞기라도 한다면, 사람 하나 정도는 순식간에 침식시킬 수 있으리라.
물론.
단검이 진혁의 몸에 닿는 일은 없었다.
티팅!
맑은 소리와 함께 검은 단검이 허공에서 튕겨져 나가자, 습격자가 눈꼬리를 꿈틀했다.
하지만 놀랄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꾸드득!
바닥에 못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는 다리.
진혁의 망령들이 물리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영혼을 볼 수 없는 마인에겐 알 수 없는 힘이 자신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곧, 자신이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며.
“말하지 않겠다면, 그래도 좋다.”
내가 직접 알아내도록 하지.
마인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진혁의 눈에서, 시퍼런 귀기가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