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41)
판데모니엄.
수심 1만 미터, 마리아나 해구 아래 자리한 마인들의 은신처.
이제는 넷으로 줄어 버린 남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결국, 백묘까지 당했군.”
“이제 중원에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이 사라졌어.”
“혼자서 안 될 거 같으면 도와 달라고 하던지. 멍청한 여자.”
벌써 두 명째.
마인들의 세상을 다시 만들기 위해 세력을 키우고 있던 그들에겐 좋지 않은 일이었다.
궁극적으론 지구의 패권을 놓고 싸울 경쟁자들이었지만, 그전까지는 함께 힘을 합쳐야 할 동료였으니까.
이대로 마인들이 한 명씩 줄어간다면 그들이 원하는 목표는 영영 이룰 수 없게 되리라.
그들 중 입을 연 것은 철 가면을 쓴 사내였다.
“……마왕이 필요하다.”
마왕.
마인들을 규합해 대전쟁을 일으키고 세계와 맞서 싸운 자.
그리고, 결국 패해 자취를 감춘 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꺼운 금속 갑옷을 뒤집어쓴 사내의 입에서 나온 말에, 다른 세 명의 마인은 입을 열지 못했다.
칠십여 년 전, 대전쟁을 겪고도 지금까지 살아있는 마인이 다름 아닌 그였으니까.
“그가 있었다면, 애초에 숨어다닐 필요도 없었을 텐데.”
사내의 표정은 철 가면으로 가려져 알 수 없었지만, 가면 너머의 목소리는 그가 마왕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그래 봐야 이미 죽은 사람이잖아.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집어치워.”
그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꼬마가 코웃음쳤다.
“지금 필요한 건 정신승리가 아니라 당장 뭘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거라고, 알아?”
마왕의 이름을 역사 속에서만 들어본 그에게, 철 가면의 추억은 빛바랜 과거의 유물일 뿐.
“마왕은 죽지 않았다. 애초에 불사의 권능을 타고난 자인데 죽을 리가 없지.”
“그러면, 왜 여태 한 번도 얼굴을 안 비춘 건데? 무서워서 도망이라도 갔나?”
“거기까지. 더 이상 이야기하면, 아무리 너라도 가만두지 않겠다.”
철 가면 뒤에서 번뜩이는 시퍼런 눈빛.
“……쳇,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당장이라도 죽여 버릴 것 같은 진득한 살기에, 꼬마는 혀를 차고는 고개를 돌렸다.
“나이트, 트리커의 말이 맞다.”
꼬마, 트리커 대신 입을 연 것은 온몸이 문신으로 가득한 근육질의 사내.
“지금이 대전쟁 이후 최대 위기상황이란 건 너도 잘 알지 않나. 어디 있는지도 모를 마왕 이야기보단 앞으로 어떻게 할지가 중요해.”
남자의 말에 철 가면, 나이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근육 사내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가 남자를 향해 뭐라 말하기도 전.
“온다.”
회의실의 한구석.
차가운 금속 벽에 기대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남자가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순간, 세 사람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결국, 발각된 모양이군.”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러게 아예 간섭이 덜한 우주에 세우자니깐.”
“상대는 몇 명이지, 오라클?”
근육 사내의 말에 벽에 기댄 남자, 오라클은 조용히 검지를 들어 보였다.
“하나.”
“하나라고?”
그 말을 들은 철 가면이 의아한 듯 벽에 기댄 오라클을 바라봤다.
곧, 오라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동료야.”
말을 마친 남자의 입가엔 기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곧.
스으으!
은신처의 한구석에 새겨진 마법진이 마기로 검게 빛났다.
그와 함께 나타난 것은, 네 사람 모두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헛!”
“……흑룡대주?”
“자네가 어떻게…….”
서무진.
죽은 줄로만 알았던 흑룡대주가 나타나자 오라클을 제외한 세 사람은 눈을 부릅떴다.
그에 반해, 서무진의 표정은 태평했다.
“다들 오랜만이야. 백묘는?”
“죽었다.”
“……아쉽군.”
나이트의 말에 무진은 입맛을 잠시 다셨다.
꼬마, 트리커가 놀란 목소리로 물은 것은 그때였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죽은 거 아니었어?”
“죽을 뻔했지, 에피로나에서 몸을 회복하고 있었다. 다른 대원들은 없지만.”
“자네라도 돌아왔으니 다행이야. 이제 좀 희망이 보이는 것 같군!”
근육 사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무진은 입을 열었다.
“그것보다, 날 좀 도와줘야겠다.”
“뭐, 흑룡대 재건?”
“아니.”
트리커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젓고는 대답했다.
“마왕의 봉인을 풀어야 해.”
“엥?”
“……이젠 자네까지 그 소린가?”
조금 전, 마왕 이야기 때문에 나이트와 싸웠던 둘의 눈이 치켜떠졌다.
허나.
“쾰른에서 마왕의 봉인 중 하나가 이미 풀렸다. 남은 것은 둘.”
자신의 계획을 담담히 설명하는 무진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 둘을 우리가 손에 넣는 순간.”
세 번째 대전쟁이 시작되리라.
은신처를 감도는 묘한 흥분 속에서, 무진은 씨익 웃었다.
강화도.
과거엔 괴수들이 득실거리는 삼 대 금지 중 하나였지만, 이제는 세한보안의 새로운 관할구역이자 사령술사 서진혁의 영지가 들어선 섬.
“좋군요.”
그곳에서, 영지의 주인인 서진혁은 눈앞의 물건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회색으로 빛나는 금속 고렘.
삼사 미터쯤 되어 보이는 거구의 고렘은 마치 쇳덩이를 깎아 만든 듯 이음새를 찾아볼 수 없었다.
왼팔이 없는 것을 제외하면 완벽에 가까운 형태.
“그렇지? 왼팔이 없어서 균형이 좀 안 맞기는 한데, 그거 말고는 거의 완벽한 수준이야. 하여튼, 요정 놈들은 이런 기술이 있으면 꽁꽁 싸매지 말고 진작 꺼낼 것이지.”
그 말에, 글리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식을 보는 표정으로 고렘을 올려다봤다.
옆에 서 있던 강철마탑의 부탑주, 주소영 역시 마찬가지.
“이번 사업으로 저희 마탑도 큰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이설화 씨도 이 자리엔 없지만 분명 보람을 느낄 겁니다.”
고렘을 만들면서 제법 얻은 게 많았는지, 진혁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자, 어서 구동해 보라고! 나도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니까.”
몸이 달아오른 글리펜이 진혁을 바라보며 손바닥을 비볐다.
진혁은 대답 대신 미리 준비해 둔 주먹만 한 크기의 검붉은 보석을 꺼내 들었다.
악령이 담긴 용심을 가공해 완성시킨 고렘의 핵.
“망령이여.”
스으으!
그가 작게 주문을 영창하자, 핵을 들고 있던 손이 흑마력으로 검게 물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득한 흑마력이 진혁의 전신에 감돌았다.
“명계의 율법에 따라, 새로운 육체에 깃들라.”
그가 사령술의 영창을 마쳤을 때.
스으으으!
검은 기운에 감싸진 고렘의 핵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곧, 앞으로 날아간 검붉은 보석이 고렘의 가슴팍에 파여진 구멍에 꽂혔다.
동시에.
뿌드득!
미리 준비해 두었던 외눈박이의 왼팔이 고렘의 텅 빈 어깻죽지에 들러붙었다.
갑 급 괴수의 육체와 용심에 담긴 악령.
두 강자의 힘이 강철의 육체 안에서 하나로 연결된 순간.
파앗!
텅 비어 있던 고렘의 두 눈에서 검붉은 빛이 터져 나왔다.
우웅!
핵과 연결된 마력엔진이 깨어나면서 고렘의 강철 육체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게…… 새로운 육체…….
고렘으로 다시 태어난 악령의 놀란 목소리가 진혁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호오…… 이 정도면, 예상을 상회하잖아?”
“……말도 안 돼. 이게, 고렘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이라고?”
깨어난 고렘을 지켜보던 글리펜과 소영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
“뭐, 뭐야, 이건?”
“이 정도라면…… 일족과도 자웅을 겨룰 수 있겠구나.”
강력한 기운을 느끼고 공간이동으로 날아온 용, 아피루스와 청명 역시 흥미로운 눈빛으로 고렘을 바라봤다.
‘이 정도라면…… 에피로나에서도 충분히 먹히겠어.’
에피로나를 뒤덮은 수많은 괴수들 중에도, 이 고렘을 감당할 수 있는 녀석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완성된 고렘을 마주한 진혁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혹시, 다른 고렘은 더 만들 수 없습니까?”
“설계도야 잘 갖고 있으니 당연히 가능하지. 이 녀석처럼 미친 성능은 안 나오겠지만.”
“그러면, 몇 대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녀석으로도 충분해 보이는데?”
“아직 조금 부족합니다.”
의아해하는 글리펜의 말에 진혁은 짧게 답하고는, 뒤에서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 망자들을 바라봤다.
지금도 충분히 강력한 망자들이었지만, 괴수로 가득한 에피로나에서 버티기 위해선 조금 더 준비가 필요하리라.
우웅!
품에 넣어 둔 스마트폰이 진동한 것은 그때였다.
진혁은 스마트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곧장 전화를 연결했다.
“예, 아버지. 무슨 일이십니까.”
뜬금없는 연락.
진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강진의 용건을 물었다.
곧, 강진은 대답을 내놓았다.
―뉴욕에 다녀와야겠다.
진혁이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을.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깊은 동굴.
생명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두운 동굴을 한 남자가 가로질렀다.
동굴은 바로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만, 눈을 마기로 강화시킨 남자에겐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남자가 동굴의 가장 깊은 곳,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여기 있군.”
남자, 서무진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파마의 망치.
그가 찾아다니던 무명교의 세 성물 중 하나가, 그곳에 있었다.
망치에 봉인된 마왕의 일부 역시.
“봉인이 조금 헐거워진 모양이군. 완전히 검게 변했어.”
강력한 마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성물.
말만으로도 모순적인 존재를 향해 가까이 다가간 무진의 심장박동 소리가 조금씩 빨라졌다.
칠십 년 전, 전 세계를 피로 물들였던 마왕.
그 힘의 일부가 지금 무진의 앞에서 봉인이 풀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이제…… 내가 마왕이 된다.”
그리고, 다시 마인의 세상을 열리라.
“후우.”
심호흡하며 마음을 진정시킨 무진은 단숨에 망치의 자루를 쥐고는 봉인을 깨부술 마기를 불어넣었다.
곧, 마왕을 봉인하고 있던 신성력이 힘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린 순간.
―……때가 왔는가.
심연과도 같은 목소리가 서무진의 머릿속을 울렸다.
그것이, 무진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나쁘지 않은 육체군.”
검은 망치를 어깨에 멘 무진.
그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일그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