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39)
경복궁.
한성, 지금의 서울과 함께 태어나 수백 년의 세월 동안 그 자리를 꿋꿋이 지켜 온 이가의 본거지.
수도 없는 위기 속에서 불타오르고 파괴되고 또 재건되어 왔던 궁궐이.
또다시 불타오르고 있었다.
“……완전히 박살 났군.”
멜리나의 등에서 내린 진혁은 파괴된 경복궁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용의 숨결이라도 뿌려진 듯 드넓은 궁 전체가 거대한 불꽃이 되어 서울을 밝히고 있다.
“소화고렘을 더 데려와! 착호갑사대는?”
“이미 도착해서 지원 중입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화염이라…….”
“강북에 거주하는 마법사들이면 전부 지원을 요청해! 강철마탑에도 연락하고!”
가까스로 재앙에서 도망친 이가의 사람들은 불을 끄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지만, 산소 대신 마나를 연소해 타오르는 마법의 불꽃을 꺼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혁은 숨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이가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정확히는, 그 가운데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는 강철 거인, 두정갑을 향해.
뒤쪽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거인은 고개를 돌려 진혁을 바라봤다.
―서진혁?
강철 거인의 머리 쪽에서 들려온 것은 이설화의 목소리.
―무슨 일로 온 건진 알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줬으면 좋겠는데. 보면 알겠지만, 지금은 때려 부술 것도 없어.
이미 쾰른에서 얘기를 마친 그녀가 망자들을 데리고 찾아온 진혁의 목적을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분명, 무명교 대신 이가를 징벌하기 위해 온 것일 터.
이미 큰 위험에 처해 있는 이가에겐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누가 한 짓이지?”
진혁은 고개를 젓고는 타오르는 궁궐을 바라보며 물었다.
경복궁은 한국의 오 대 엽사 가문 중 하나인 이가의 본거지.
그런 만큼, 궁궐 곳곳엔 수많은 종류의 보호막을 비롯한 마법진과 각종 마공학기기들이 적을 막아내기 위해 비치되어 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손 쓸 틈 없이 궁궐 전체가 불구덩이에 들어간 이유는 뻔했다.
내부자의 소행.
진혁이 의문 섞인 시선으로 올려다보자, 설화는 잠시 침묵하다 답했다.
―……오라버니야.
“그렇군.”
―오라버니를 비롯한 익문사의 몇 요원들이 경복궁에서 빠져나가는 장면이 녹화됐어. 그 이후에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분노를 억지로 참는듯한 그녀의 목소리를 흘리며, 진혁은 타오르는 궁을 향해 다가갔다.
그 순간.
‘음?’
타오르는 궁궐의 문을 살피던 진혁의 눈에, 바닥에 새겨진 글씨가 들어왔다.
‘드러나지 않게 마나로 새겼군.’
그것도, 특정한 사람의 마나 패턴에만 반응하도록 되어 있는 문장.
그것이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진혁에게 적용되었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중요한 것은 글자를 새긴 방법이 아니라, 그 내용이었다.
“……이만 가 보지.”
진혁은 잠시 바닥에 새겨진 푸른 글씨를 곱씹고는 몸을 돌려 멜리나에게로 향했다.
―설마…….
갑자기 몸을 돌려 돌아가려는 진혁의 모습에서, 설화는 무언가를 눈치채고는 놀란 목소리를 냈다.
―오라버니 위치를 알아낸 거야?
그녀의 말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화성.”
수원 화성.
정조대왕의 명에 의해 지어진 거대한 군사요새이자, 지금은 이가가 소유한 대 괴수 방어용 전략요새 중 하나.
그 중심에 위치한 행궁의 누각, 신풍루의 한가운데에 푸른 갓과 도포를 입은 남자가 술잔을 든 채 앉아 있었다.
이한.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이가의 차기 가주가 될 후계자였지만, 이제는 단순한 테러범으로 전락한 자.
허나, 그런 것 치고는 이한의 표정이 너무나 밝았다.
“달이 밝구나.”
보름달을 향해 잔을 들어 올린 다음 잔 속에 담긴 액체를 들이켠 이한의 얼굴은 여느 때와 달리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죽기 딱 좋은 밤이야.”
이미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것일까.
다시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우는 이한의 표정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후회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채워진 술잔을 다시 비울 뿐.
“대주.”
그의 앞에 전신을 검은 옷으로 감싼 부대주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허공에서 나타난 그의 옆엔, 이한과 목숨을 함께 하기로 마음먹은 익문사의 요원들이 서 있었다.
부대주가 입을 열었다.
“하명하신 대로, 화성 내의 모든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성을 통제하는 마법 자아의 권한을 탈취했습니다.”
우웅!
부대주의 말에 동조하듯, 술상 위의 허공이 일렁이더니 환영으로 이루어진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명에 따라, 이한 대주께 성의 모든 권한을 이양합니다.
“수고했네. 역시 부대주야.”
이한은 씨익 웃으며 완벽하게 임무를 해낸 부대주를 치하했다.
“이제 돌아가 봐도 괜찮네. 굳이 자네들까지 희생할 필욘 없어.”
“그럴 생각이었다면, 애당초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곧 싸움이 시작되면, 자네들을 돌볼 만큼 여유롭진 않을 게야.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네.”
“저희 모두가 이미 죽기로 각오한 몸입니다.”
“착호갑사대로 가야 할 자들이 어찌 익문사에 와서는…… 쯔쯔.”
부대주의 말에 이한은 혀를 찼지만, 더 이상 말리지는 않았다.
이제 와서 그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하기엔 너무 늦었으니까.
―신원 미상의 물체 빠른 속도로 접근 중.
“시작되었는가.”
마법 자아의 경고를 들은 이한은 취기에 찌든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그의 시선이 북쪽을 향했다.
그곳에서 나타난 것은, 한 마리의 용.
천둥비룡의 머리를 단 거대한 적룡의 붉은 비늘이 달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오자, 적룡의 배에 달린 곤돌라에서 괴수와 해골들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느닷없이 나타난 용과 괴수들이 누구의 것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과연, 저 정도는 되어야 상대할 의미가 있지.”
용의 등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서진혁을 발견한 이한은 씨익 웃고는 반쯤 남은 술병을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마중을 나가야겠구나.”
“대주, 위험합니다!”
이한의 말을 들은 부대주가 당황해 눈을 부릅뜨며 말렸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서가의 후계자다. 아무리 마지막 싸움이라지만, 최소한의 예는 갖춰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말을 잠시 멈춘 이한은 오른손으로 비뚤어진 갓을 고쳐 쓴 다음, 부대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의 나는, 생각만큼 약하지 않다네.”
푸쉬이이!
그 말과 함께 두루마기의 소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고열의 수증기.
붉게 달아오른 이한의 눈이, 빛났다.
“음?”
목적지인 수원의 화성에 도착한 진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가 생각했던 화성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
“전투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군.”
화성은 수많은 마법진과 마공학 기기로 가득 찬 요새.
평상시에는 성 곳곳에 모습을 감추고 있지만, 위기상황이 되면 화성의 성벽은 방어마법과 마력포로 가득 채워진다.
허나, 진혁의 눈에 들어온 화성의 모습은 여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눈에 술병을 손에 쥔 한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이한.
쾰른과 경복궁을 파괴한 범인.
모습을 숨기기는커녕 천혜의 요새를 등진 채 자신을 향해 술병을 흔드는 그의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진혁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내려간다.”
―엥? 여긴 너무 가까운데요?
“상대는 공격하지 않을 거야.”
―그, 그런가……?
명령을 듣고 당황한 멜리나가 되물었지만, 진혁의 명령은 같았다.
곧, 용이 지상에 착륙하자 진혁은 꼬리를 밟고 땅 위로 내려왔다.
이내, 그는 요새를 향해 나아갔다.
―진혁님, 너무 가깝습니다!
―물러나시오, 주인!
다른 망자들의 만류에도 진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앞으로 향했다.
곧, 그의 앞에 술병을 쥔 채 얼굴이 붉어진 이한의 모습이 들어왔다.
“술 한잔하겠나?”
“그럴 시간은 없습니다.”
“아쉽군. 마지막으로 자네랑 술이나 한잔 기울여 볼까 했더니.”
취기가 잔뜩 오른 것인지, 진혁의 답에 이한은 큭큭 웃고는 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쨍그랑!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술병을 비운 그는 빈 병을 집어던지고는, 붉어진 얼굴로 진혁을 바라봤다.
“자네가 조금만 더 약했다면, 내가 조금만 더 강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그저, 선택을 잘못했을 뿐입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나름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 허상이었어. 크크큭…….”
언제나처럼 담담한 진혁의 말에 이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입과 달리, 눈은 웃지 않았다.
타오르는 이한의 눈빛이, 진혁과 마주쳤다.
“……나 하나로 끝내 주게. 가문에는 아무런 죄도 없으니. 아바마마께서도 모르는 일이야.”
“확답은 드릴 수 없습니다.”
“좋아, 좋아…….”
애매모호한 대답이었음에도, 이한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럼…… 이제, 끝을 보세나.”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파지지직!
이한의 전신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이가의 상징인 뇌전의 마나.
자신이 다루는 모든 마나를 끌어모을 셈인 것인지, 쉴 새 없이 튀기는 스파크의 강도는 더더욱 강해졌다.
푸쉬이이!
그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수증기.
펑!
그가 입고 있던 두루마기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나갔다.
터져 나간 옷의 안쪽으로 드러난 것은, 푸른색이 덧씌워진 수많은 기계장치들.
피부 대신 몸 일부를 감싼 기계장치들로부터, 쉴 새 없이 수증기와 스파크가 쏟아져 나왔다.
그 말과 함께, 이한은 하늘을 향해 금속으로 뒤덮인 오른팔을 하늘로 뻗었다.
신호에 응답한 것은, 다름 아닌 그의 등 뒤를 받치고 있던 거대한 요새.
우우웅!
그가 손을 들어 올림과 함께, 화성을 바치고 있던 회색 성벽이 서서히 땅속에 파묻혀 있던 실체를 드러냈다.
셀 수 없이 많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움직이는 거대한 마공학장치.
그리고, 그 한구석에 열려 있는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관.
“이것이, 이가의 후계를 이었던 내 모든 힘이라네.”
그 말과 함께 이한이 발을 굴러 금속의 관 안으로 모습을 감춘 순간.
기이잉!
성이,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