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37)
쾰른의 전투가 끝난 것은 그날의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푸욱!
검은 기운으로 충만한 망자의 팔뚝이 마지막 괴수의 몸뚱이를 관통했을 때, 멀쩡히 서 있는 검은 괴수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
마지막 괴수가 절명하면서 내뱉은 단말마.
그것을 신호로, 무너진 대신전의 이곳저곳에 쓰러져 있던 열다섯 괴수들의 검은 육체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괴수의 육체를 이루고 있던 마왕의 기운이 가진 본래 모습.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감과 동시에, 괴수들의 본래 모습이 드러났다.
대주교 미하일을 비롯한 열다섯의 주교단.
폐허 위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그들의 얼굴은 고문이라도 받은 듯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대, 대주교님?”
“주, 주교님들이……!”
교단을 이끄는 중추들이 느닷없이 시신으로 발견되자, 놀란 성기사들이 급히 달려 나갔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제들의 몸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 마기의 흔적.
쾰른을 공격했던 열다섯 괴수들이 다름 아닌 교단의 우두머리란 사실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어찌, 대주교님과 주교님들께서…….”
“대체 대신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설마…….”
대주교와 주교들이 마에 물들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눈 앞에 벌어진 참상을 설명할 방법이 딱히 없다.
입 밖으로 내놓기 민망한 추측들이 주교단의 유해를 마주한 기사들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였다.
“여러분.”
영혼을 울리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고 성기사들이 얼어붙어 있던 고개를 돌렸다.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는 성기사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금발의 성녀.
평소와 달리 신성력의 회색 광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 그녀의 모습은, 흡사 신의 사자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자신을 향해 몰려든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클레어는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대주교님과 주교님들, 그리고 수많은 형제 자매분들이 괴수들의 사악한 손길 앞에 희생당했습니다.”
특유의 신성력이 더해진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군중을 사로잡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강신의 기적을 펼쳐 낸 신의 대리자를 마주한 신도들의 가슴은 경이로 끓어올랐다.
“언젠가 그들에게 복수해야 함이 마땅하지만, 지금은 위기에 처한 교단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때.”
홀린 듯 자신만을 바라보는 형제 자매들을 향해, 성녀는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름 없는 신이 내려준 회색의 신성력이 생생하게 흘러나오고 있는 작은 도장.
그녀가 왜 갑자기 신도들 앞에 도장을 꺼내 들었는지, 폐허에 선 사람들 대부분은 알지 못했다.
“저, 저건.”
쾰른의 수호를 맡은 경비대장, 멘셀 플랑크를 제외하고는.
그녀가 회색 도장을 꺼내 든 순간, 멘셀은 자기도 모르게 놀라 외쳤다.
“천상의 열쇠!”
순간, 사람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수십 년 넘게 실종된 교단의 세 성물 중 하나.
그 형태까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교단이 수십 년 동안 찾길 원했던 성물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름 없는 신께서 명하신대로, 저 클레어는 교단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주저없이 나설 것임을 선포합니다.”
교단을 직접 이끌겠다는 성녀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성녀의 저택.
하지만, 대신전이 파괴되고 성녀가 교단을 이끈 이후로는 임시 대신전 역할로 바뀌었다.
그 곳의 응접실이었던, 이제는 성녀의 집무실이 된 작은 방.
“고마워요.”
며칠만에 독대한 진혁을 향해, 그녀는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정말이지, 누구 덕분에 두 시간도 못 잤다니깐요.”
“그런 것 치고는 멀쩡해 보이는군.”
“농담이죠?”
“성자를 빼면 누구보다 신법에 능통한 사람이 피곤하다는 게 더 농담같은데.”
“갑자기 그 이단 얘기는 왜…… 휴, 아니에요.”
클레어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진혁을 이 자리에 부른 것은, 농담따먹기나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니까.
“어쨌건, 진혁님이 갖다 준 성물 덕분에 형제들의 마음을 쉽게 돌릴 수 있었으니까요.”
천상의 열쇠.
진혁이 몰래 넘겨준 성물이 아니었다면, 혼란에 빠진 교단을 안정시키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으리라.
‘아니, 어쩌면 교단이 쪼개졌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한다면, 교단의 통합을 도운 진혁은 교단 전체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원래 무명교의 것이니, 돌려주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정작 감사를 받는 진혁의 말투는 담담했다.
지나가다 연필이라도 주워 준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를 향해, 클레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준게 아니란 거 알거든요? 뭔가 원하는 게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잖아요, 당신은.”
그리고, 지금의 클레어에겐 진혁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힘이 있었다.
‘아마, 여기까지 생각하고 넘겨준 거겠지. 어른들의 세계란…….’
이미 지난 며칠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을 겪으며 빠르게 성장한 그녀였지만, 눈앞의 사람은 그녀가 상대해 온 교단의 사제들과 차원이 달랐다.
그렇기에, 그녀에겐 더더욱 눈앞의 남자가 필요했다.
교단과 상관없이 그녀에게 도움을 줄 가능성이 있는 사람.
‘잡아야 해.’
서진혁을 바라보는 성녀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우선 하나 묻지.”
뚫어져라 쳐다보는 클레어를 향해, 진혁은 입을 열었다.
“이가는, 어떻게 할 거지?”
그 말에, 클레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쾰른에 대참사를 야기한 장본인이, 다름아닌 한국의 오대엽사가문 중 하나인 이가와 그 후계자였으니까.
“……이번 참사로 많은 사람들이 신의 품에 안겼어요. 아무리 제가 이름 없는 신을 대리하는 성녀라지만, 제 의지만으로 그들의 분노를 막을 수는 없어요. 그러니…….”
말을 이어 나가던 그녀의 눈이, 순간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성전을 열 거에요.”
성전.
이름 없는 신을 앞세운 피의 복수.
그녀가 성전을 외치는 순간,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무명교의 수많은 성기사와 사제들이 모여 한 곳으로 진격하게 되리라.
이번 사건의 원흉, 이가의 본거지인 한국으로.
“한국이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나?”
“허락하지 않는다면, 맞서 싸워야겠죠.”
“그게, 나라도?”
“당신이라도. 이건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에요. 한 번 불이 지펴지면 절대로 멈출 수 없죠.”
진혁이 원하는 바를 이야기한 것은 그때였다.
“성전을 멈춰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진혁 님이라도 곤란해요. 차라리 직접 저희 성기사들을 막아서는 게 빠를걸요? 그들을 옹호하려는 마음은 알지만…….”
“아니.”
하지만 진혁이 고개를 젓자, 클레어는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곧, 그의 입이 열렸다.
“내가 직접 징벌할 거다.”
너희들이 끼어들기 전에.
순간.
당황한 성녀의 동공이, 좌우로 떨렸다.
에피로나.
한 때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지만, 이제는 괴수의 것이 되어 버린 폐허.
그곳의 절대자 중 하나, 외눈박이는 덩굴과 잡초로 덮인 성벽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왼쪽 팔이 깔끔하게 잘려나간 그의 몸 군데군데엔 주변의 나무에서 날아온 나뭇잎이 쌓여 있었다.
자그마치 한 달.
한 달이란 시간 동안, 외눈박이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마기가 없었다면, 놈의 몸뚱이는 이미 다른 괴수들의 먹이가 되었으리라.
그리고.
번쩍!
외눈박이의 이마에 박혀 있던 눈꺼풀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우득, 우드득!
한 달 동안 가만히 앉아 있어 굳은 몸을 풀어낸 외눈박이의 눈은, 이제는 잘려나가 없어진 자신의 왼팔이 있던 자리로 향했다.
잘려나간 왼팔에 대한 아쉬움 때문은 아니었다.
“……인간 놈, 어마어마한 짓을 벌였군.”
그의 왼팔로 괴수들을 꿰뚫는 감각이,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
물론, 그의 의지는 아니었다.
자신의 팔을 이용해 정체불명의 병기를 만들어 낸 검은 머리의 인간.
왼팔을 잃은 지금의 그와 엇비슷할지도 모르는 거인의 위력은, 결코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 이미 주시자를 쓰러트렸으니.”
이제는 죽어 버린 그의 경쟁자를 떠올리며, 외눈박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놈에 의해 에피로나의 괴수들이 멸망할지도 모르는 일.
그러나.
한 달 동안 그가 본 것은 절망만이 아니었다.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한 줄기의 희망이, 그곳에 있었다.
‘마왕…….’
인간의 몸으로 괴수인 자신들보다 강력한 힘을 손에 쥐었던 자.
지구를 놓고 벌인 대전쟁에서 패해 죽었지만, 그의 힘만은 사라지지 않고 아직 지구에 남아 있다.
그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한 외눈박이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에게로 향했다.
그의 외눈에 들어온 것은, 한 명의 인간.
‘……그래.’
마나 대신 자신들의 마기를 풀풀 풍기는 마인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던 그의 머릿속에, 한 줄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무슨 일이냐, 인간.”
“……힘을 다오.”
“힘?”
“놈에게 복수할…… 힘이 필요하다.”
서무진.
조카이자 적인 진혁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긴 마인.
몸은 채 회복되지 못해 비틀거렸으나, 그의 눈만은 타오르듯 끓어올랐다.
“힘이라, 마침 잘 되었군.”
그 말에, 외눈박이는 입꼬리를 움직여 괴상한 미소를 지었다.
때맞춰 나타난 눈앞의 마인이야말로, 이 일을 해결하는 데 가장 적합한 열쇠였으니까.
“내가 줄 수는 없겠지만, 힘을 얻을 방법을 알려 줄 수는 있다.”
쩌렁쩌렁 울리는 거인의 말에, 서무진은 말없이 그의 외눈을 올려다봤다.
이내.
“마왕의 힘.”
외눈박이가 다음 말을 내뱉었을 때.
무진의 눈빛이 변했다.
“그거…… 구미가 당기는군.”
타오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인간을 내려다보며, 외눈박이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