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36)
괴수는 인류의 적이다.
인류와 세계를 수호하기 위해 검을 쥔 성기사들에게, 이 명제는 이름 없는 신이 내려준 세상의 진리.
그러니.
“공격! 저 거인을 지원해라!”
형제들의 시체로 만들어진 거대한 괴수를 도와 싸우는 것은, 그들에게도 낯선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성기사들은 망설임 없이 검은 괴수를 향해 달려나갔다.
감히 대신전을 부수고 형제들을 죽인 악마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화르륵!
이름 없는 신이 내려 준 회색 불꽃, 성화를 온몸에 두른 성기사들이 달려나간다.
어지간한 마기는 다가오기도 전에 태워 버릴 만큼 강력한 신성력의 불꽃.
이미 불꽃에 삼켜 버린 수십 자루의 거검이, 검은 괴수의 몸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치이이익!
거인이 절반 이상의 괴수들을 맡아 준 덕에, 남은 성기사들은 좀 더 쉽게 괴수에게 칼을 박아 넣었다.
—……!
처음으로 제대로 된 공격을 받은 괴수가 소리 없이 몸부림쳤다.
곧 옆에 있던 다른 괴수가 달려든 덕에 숨통을 끊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열다섯의 괴수에게 무력하게 당했던 조금 전과는 달라진 상황.
“물러서지 마라! 신께서 보고 계신다!”
“신이시여, 제게 놈들을 베어 낼 힘을 주소서!”
온갖 신법으로 자신들을 강화한 성기사들의 눈 속에, 서서히 희망의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은 갑작스럽게 멈출 수밖에 없었다.
쐐애애액!
공기를 찢는 굉음과 함께 지상을 뒤덮은 수백의 검은 그림자.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집니다!”
“새로운 괴수인가? 일단 물러서라!”
—……!
성기사와 괴수.
둘 모두가 새롭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무언가를 피하기 위해 물러섰다.
쿵!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하늘에서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수많은 해골들과 식귀, 거대한 해골, 그리고 전갈사자.
하늘로부터 내려온 괴수들이 하나둘씩 지상에 박혀 있던 몸을 일으켰다.
“이런……!”
새로운 적이 등장했단 생각에 성기사들을 지휘하던 경비대장, 멘셀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곳은 교단의 심장, 쾰른이다.
교단의 심장에서 날뛰는 괴수들을 내버려 두고 물러설 수는 없는 일.
‘오늘…… 신의 품으로 가겠군.’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각오를 다진 멘셀의 표정은 오히려 홀가분해 보였다.
딱딱! 딱딱딱!
하늘에서 내려온 괴수들이, 검은 괴수들에게로 향하기 전까지는.
콰드득!
수많은 망자들이 괴수들의 사지와 촉수에 강타당해 부서졌지만, 망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어나 달려들었다.
이미 죽어 죽을 수 없는 자들의 돌진은, 괴수들의 강력한 공격으로도 멈출 수 없었다.
“공격! 저 괴수들을 지원해라!”
돌아가는 상황을 순식간에 파악한 멘셀이 성기사단에 명령을 내렸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것을 포기했던 그의 눈에, 다시금 희망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제부턴 저희가 상대하겠습니다, 진혁님.
―맡겨만 주시오, 주인!
―주교들의 몸으로 만들어진 괴수라니, 연구할 가치가 있겠구려.
타이밍 좋게 등장한 망자들의 의지가 흑마력의 실을 타고 진혁의 영혼에 전해졌다.
‘싸움은 곧 끝날 거다. 조금만 버티도록.’
저 멀리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망자들에게 의지를 보낸 진혁의 눈은, 조금 전 망자들이 쏟아져 내렸던 하늘로 향했다.
그곳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진혁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쿵!
“키이이이!’
붉은 용의 몸과 천둥비룡의 머리가 합쳐진 특이한 생김새의 용.
하늘에서 내리꽂히듯 클레어의 저택 앞에 착륙한 용이 포효했다.
―주인, 여기 말한 거 가져왔어요. 더럽게 무겁네.
쿵!
칭얼거림과 함께 용, 멜리나가 바닥에 내려놓은 것은 관처럼 생긴 거대한 직육면체 모양의 금속상자.
‘잘했다.’
멜리나에게서 시선을 뗀 그는 거대한 상자를 바라봤다.
상자의 겉면은 일종의 봉인마법으로 보이는 마법진과 마정석으로 뒤덮여 있었다.
“진혁 님, 이건?”
용이 들고 온 거대한 상자를 마주한 클레어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허나.
스으으!
진혁은 대답하는 대신, 검은 심장에 잠들어 있는 흑마력을 깨워 냈다.
그의 몸을 중심으로 노끈처럼 길게 늘어진 흑마력이 미리 상자에 새겨 놓은 봉인의 해제술식을 파고들었다.
곧.
우웅!
봉인이 해제된 상자가 열리면서, 그 안의 내용물이 드러났다.
인간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큰, 어깻죽지부터 잘려나간 누군가의 왼팔.
“이거, 지난번 외눈박이의……!”
“그래.”
놀란 성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진혁의 시선이 설화가 탄 두정갑으로 향했다.
―알았어, 지금 열어 줄게.
진혁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눈치챈 그녀의 말과 함께, 고렘의 프로토타입을 담아 둔 금속상자가 열렸다.
“작군.”
상자 속, 은색으로 빛나는 고렘을 마주한 진혁의 첫 감상은 짧았다.
왼쪽 팔이 달려야 할 어깨 부분이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것을 빼 놓고는, 평범한 인간의 크기.
일단은 네가 준 기술을 먼저 검증해야 했으니까. 그래도 작동 자체는 확실히 되는 물건이야.
“외눈박이의 팔을 연결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자신의 몸통보다 거대한 왼팔을 달고 싸워야 한다면, 동작 시간 이전에 움직임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
저 고렘이 외눈박이의 왼팔이 가진 힘을 그대로 받아 낼 수 있다 한들, 실제 전투는 어려워 보였다.
그러니.
‘아무래도…… 다른 방법이 필요하겠어.’
진혁은 멜리나를 바라봤다.
―왜, 왜요? 또 뭘 시키려고…….
무언가를 바라는 것 같은 주인의 눈빛에, 멜리나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이윽고, 진혁은 그녀를 향해 명령했다.
‘다시 옮겨라.’
대신전에서의 싸움은 치열했다.
수많은 시체들로 이루어진 거인과 검은 괴수 열.
쾅! 콰앙!
수적으로는 분명 괴수들이 유리했지만, 흑마력만 영원히 지치지 않는 망자는 놈들에게 맞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숫자가 더 추가된다면 거인이 밀렸겠지만, 남은 다섯의 마인들은 성기사단을 막기 위해 빠진 상황.
콰아앙!
수십 번을 격돌한 그들의 싸움은 셀 수 없이 많은 폭음 속에서 지루한 대치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야, 야!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악령에게로 전해진 것은 그때였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더라도, 그 목소리의 주인이 멜리나란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멜리나…… 씨?
―이거 받아!
갑자기 등장한 용을 보고 의아해하는 악령을 향해 멜리나는 커다란 날개를 편 채 빠르게 날아갔다.
―어딜, 날 찌르려고!
“키이이이이!”
괴수들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촉수들을 유유히 피해 낸 그녀의 앞발에 쥐어진 것은, 거대한 왼팔과 연결된 조그마한 고렘.
―이건?
―받아들여라. 너의 새로운 육체가 될 것이니.
처음 보는 정체불명의 물건을 보며 의아해하는 악령을 향해, 진혁의 의지가 전해졌다.
푸욱!
곧, 용의 손에 쥐어진 고렘이 망자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시체 사이를 파고들었다.
―……알겠습니다.
악령은 이미 진혁에게 완전히 장악당한 상태.
그는 주저 없이 자신의 육체를 파고든 금속물체를 흡수했다.
본래 수많은 시체들로 이루어져 있던 거인의 왼팔이 갑 급 괴수, 외눈박이의 것으로 바뀐 것은 순식간의 일.
스으으!
갑 급 괴수의 육체에서 쏟아져 나온 강력한 힘이 악령의 흑마력과 한몸처럼 뒤섞였다.
본래 같은 뿌리에서 나온 힘이었기에 가능한 일.
서서히, 왼팔로부터 퍼져 나간 검은 오라가 망자의 육체를 삼키기 시작했다.
이윽고, 악령의 영체가 완전히 자리를 잡았을 때.
―이런…… 힘이…….
그의 의지로부터, 약간의 희열이 일어났다.
괴수들의 마기를 두려워했던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전신에서 끓어오르는 힘이, 거인을 움직였다.
쾅!
바닥을 박차며 달려드는 거인의 기세에, 괴수들이 물러서며 촉수를 뿌렸다.
하지만 망자의 몸을 감싼 검은 기운을 뚫지는 못했다.
촉수의 파도를 뚫어 낸 망자가 돌진하던 자세 그대로 왼 주먹을 들어 올렸다.
갑 급 괴수 외눈박이의 일부와 엘프의 마공학, 그리고 마기에 물든 악령이 결합한 망자.
콰드득!
검게 빛나는 놈의 주먹이, 그대로 한 괴수의 몸을 꿰뚫었다.
육체를 유지하는 마정석 채로 분쇄된 괴수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다.
—……!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검은 괴수들을 바라보며, 망자는 웃었다.
이름 없는 신의 힘이 담긴 성물의 종류는 셀 수 없이 많지만, 그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세 가지다.
천상의 열쇠, 파마의 망치, 자비의 관.
이름 없는 신이 직접 만들어 내려 준 강력한 성물.
세상에서 사라진 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무명교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전대 대주교 게르디아가 직접 감춰둔 성물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똑! 똑!
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동굴.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간혈적으로 들릴 뿐, 사람은커녕 동물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동굴의 깊은 곳에, 거대한 망치가 세워져 있었다.
신성력으로 육체를 강화시킬 수 있는 성기사도 간신히 휘두를 크기의 양손 망치.
성물, 파마의 망치였다.
누구의 접근도 허용치 않겠다는 듯 동굴의 가장 끝 벽에 박혀있는 파마의 망치는 본래의 회색빛을 잃은 채 수십 년째 동굴 안에 잠들어 있었다.
그때였다.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희미한 기운이 동굴 속으로 파고들었다.
마왕의 파편에 침식당한 괴수가 죽으면서 퍼져 나간 기운의 일부.
동굴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한 마왕의 기운이 벽에 박힌 망치와 맞닿은 순간.
파앗!
잠들어 있던 성물로부터, 검은빛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