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33)
이름 없는 신.
괴수를 제외한 에피로나의 모든 생명체들에게 수천 년간 숭배받아 온 이계의 유일신.
성녀, 클레어의 몸을 빌어 지상에 내려온 신의 첫 마디는 평범했다.
“지난번보다 성장했구나, 멸망의 동반자여.”
하지만, 신의 의지와 함께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강력한 신성력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날 내려다보는 것 같군.’
머리 하나만큼 작은 클레어의 몸에 빙의했음에도 그랬다.
성녀의 몸 안에 자리잡은 신의 존재감은, 그녀를 마치 거인처럼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묻고 싶은 게 있다.”
진혁은 신의 기세에 조금도 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에겐,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었으니까.
“아스칸에 대해 알고 있나?”
아스칸.
에피로나의 이전 세계이자, 파슬란이 활동했던 터전.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열었다면, 시작 이전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지.”
이름 없는 신의 등장과 에피로나의 탄생은 거의 같은 때에 일어난 일.
수천 년을 살아가는 용들조차도 전설이라 생각할 만큼 먼 과거의 일이었지만, 세계의 신이라면 조금은 더 알고 있는 게 있으리라.
“아스칸, 먼 과거의 이름이구나.”
진혁의 물음에, 신이 깃든 클레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새로운 세계를 열기 전에 존재했던, 그리고 멸망한 세계.”
옛 추억이라도 떠올리는 듯, 이름 없는 신은 아련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허나, 그를 바라보는 진혁의 눈은 차가웠다.
“아스칸은, 어떻게 멸망한 거지?”
왜 멸망했는지, 멸망했다면 그 세계의 흔적은 남아 있는지.
파슬란의 유산을 찾아야 할 진혁에겐 꼭 풀어내야 할 문제였다.
“후후후.”
클레어는, 신은 웃었다. 그녀의 눈꼬리가 재밌다는 듯 휘어졌다.
“그대야말로, 그 답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가 아니더냐. 멸망의 동반자여.”
“그게 무슨…….”
이름 없는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웃자, 진혁은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설마.’
진혁은 신이 내뱉은 말이 지닌 의미를 깨달았다.
‘……파슬란과 연관된 건가.’
진혁이 답을 알만한 구석이 있다면, 그건 파슬란과의 관계뿐이었으니까.
“그대의 생각이 맞다.”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소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은 그 말을 듣고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파슬란이 죽으면서, 뭔가가 어그러졌다.’
그것이, 아스칸의 멸망을 이끌었다.
지금의 진혁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추측이었다.
그렇다면.
“아스칸의 흔적은, 에피로나에 아직 남아 있나?”
정확히는, 파슬란이 남긴 흔적이 남아 있는가.
망령군주가 부리던 수만의 군대.
그중 일부만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진혁의 전투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 이전 세계의 잔재는 남아있다. 백 년 전까지는.”
이름 없는 신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파슬란이 남긴 유산이 에피로나에 아직 남아 있다는 이야기.
‘조만간, 가 봐야겠어.’
에피로나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망령군주의 유산을 떠올리며 눈을 빛낸 진혁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명계의 신,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명계의 시스템이 붕괴하기 시작한 원인.
어딘가로 숨어 버린 명계의 신을 찾지 못한다면, 제 기능을 잃은 명계의 망령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다.
이름 없는 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녀의 입이 열렸다.
“죽었다.”
대신전의 가장 높은 곳엔 거대한 원탁이 자리하고 있다.
대주교를 포함한 본단의 주교 열다섯이 모여 무명교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자리.
하지만, 평소와 달리 이 자리에 모인 열세 주교들의 표정엔 당황이 서려 있었다.
“대주교님, 갑자기 저희를 불러모으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마지막 회의를 연 지 아직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잖습니까?”
본래 한 달에 한 번 열려야 할 회의이지만, 대주교에 의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소집당한 주교들이 어리둥절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의문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교들을 향해, 대주교 미하일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양해해 주십시오. 교단의 미래를 바꿀 일 때문에 모셔온 것이니.”
“교단의…….”
“미래라고요?”
대주교의 말에, 그들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교단의 미래를 바꿀 정도의 큰일이라면 교단을 이끄는 자신들이 진작에 알고 있었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니까.
“그렇습니다. 하임 주교가 설명해 줄 겁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 자리의 열네 번째 주교를 불러냈다.
하임 유타하르덴.
이 자리에 모인 열 네명의 주교들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주교가 된 자.
열세 주교들의 시선이 기다렸다는 듯 원탁에서 일어선 그의 등으로 향했다.
곧, 대주교의 옆에 선 하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주교님들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보여줄 거라면…….”
“잃어버린 교단의 세 성물, 그중 하나입니다.”
그와 동시에, 하임은 품에서 신성력을 뿜어내고 있는 회색의 도장을 꺼내 들었다.
이 자리에 모인 자들 중, 그 성물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건……!”
“천상의 열쇠!”
“아니, 대체 이걸 어디서…….”
의심 반, 기대 반으로 하임을 바라보던 주교들의 시선이 놀람으로 바뀐 것은 순식간의 일.
하임의 손에 쥐어진 성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주교들을 바라보며, 대주교는 입을 열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천상의 열쇠는 이름 없는 신께서 내려 주신 천상의 군세를 불러올 수 있는 문입니다.”
천상의 군대가 드나들 수 있는 문, 게이트를 현계와 연결할 수 있는 귀중한 성물.
그 가치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주교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백 년 전에는 시기가 맞지 않아 사용하지 못했었잖습니까.”
“이번에야말로, 에피로나에서 괴수들을 몽땅 몰아낼 수 있는 기횝니다!”
주교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그들이 마주한 것은 고작 손가락만 한 도장 하나뿐이었지만, 그 도장으로부터 진하게 흘러나오는 신성력의 기운은 이름 없는 신이 직접 지상에 내려준 성물만이 가질 수 있는 것.
틀림없는 진품이란 사실을 확인했으니, 주교들의 기대가 큰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성물을 지키고 있던 봉인을 푸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이름 없는 신이시여……!”
대주교의 말에 주교들이 고개를 숙이며 신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 모습을 보며, 미하일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성녀님께서도 이 자리에 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교들 중 하나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성물의 관리는 본래 주교회에서 진행해 왔던 것이니, 성녀께서 굳이 번거롭게 방문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미하일은 말을 꺼낸 주교를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슬며시 노려봤다.
“……알겠습니다.”
대주교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눈치챈 주교가 고개를 숙이고 나서야, 미하일의 표정이 풀렸다.
“그러면, 성물을 되찾는 데 가장 공이 컸던 하임 유타하르덴 주교가 봉인을 풀도록 하시지요.”
“네, 대주교님.”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하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손에 들린 회색 도장, 천상의 열쇠에 정신을 집중했다.
“이름 없는 신이시여…….”
신을 향한 기도문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성물로부터 강렬한 회색빛이 뿜어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파아앗!
기도문이 이어지면서 회색의 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성물을 보호하기 위해 묶여 있던 신성력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
“아아…….”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성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신의 힘을 마주한 주교들의 표정이 절로 경건해졌다.
그러나.
‘아니……?’
하임의 바로 옆에서 성물의 봉인이 풀리는 것을 보고 있던 대주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성물에서…… 마기가……?’
강렬한 신성력의 폭풍 속에서도 미약하게나마 존재감을 잃지 않고 있는 사악한 기운.
“하임 주교, 잠시 멈…….”
본능적으로 위험한 기운을 눈치챈 미하일은 더 이상 봉인이 풀리는 것을 막으려 했다.
허나, 이미 성물의 봉인은 거의 풀려 버린 상태.
스으으!
성물의 힘에 봉인되어 있던 거대한 악이, 눈을 떴다.
“후우…… 후우…….”
강신을 끝낸 클레어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나마 신의 존재를 담을 그릇이 되는 것은 영혼과 육체, 양쪽 모두에 부담을 주는 행위.
미리 준비해 둔 탓에 볼썽사납게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입은 회색의 사제복과 금색 머리칼은 식은땀으로 푹 젖어 버렸다.
“잘…… 해결됐나요?”
“어느 정도는.”
진혁은 피로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클레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니었다.
이름 없는 신이 남긴 한마디가, 그의 정신을 뒤흔들어 놨으니까.
‘명계의 신이…… 죽었다라.’
비유적 표현일까, 아니면 문자 그대로 신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신이란 존재가 죽을 수는 있는 것인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이야기에 진혁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켜들어 갔다.
허나, 당장 생각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클레어.”
이름 없는 신이 그와 한 이야기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으니까.
“네?”
“너희 신이 말하더군. 교단에 큰 재앙이 닥칠 거라고.”
‘내가 네 의문을 풀어 주었으니, 너 역시 내 과오를 해결하는 것을 도와다오.’
진혁과 마주한 이름 없는 신의 부탁…… 아니, 거래.
“예? 그게 갑자기 무슨……?”
피곤에 지쳐 있던 그녀의 눈이 놀라 번쩍 떠진 그때.
쿠르르릉!
예배실이 위치한 저택의 지하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진동했다.
그와 함께, 진혁은 예배실을 올려다봤다.
‘저건가.’
이름 없는 신이 말한 재앙이, 거대한 마기의 덩어리가 넘실대는 것을 느낀 진혁의 눈이 빛을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