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32)
덕수궁 석조전.
이가의 착호갑사대 본부로 사용되는 건물의 2층에서, 이설화는 곰방대를 문 채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손엔 믿고 있는 심복들로부터 올라온 몇 장의 서류가 들려 있었다.
“쾰른…… 이라고? 무명교의 본단엔 왜…….”
이가와 무명교가 관련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익문사의 수장이 직접 찾아갈 만큼 긴밀한 관계도 아니다.
힘을 합쳐 싸웠던 대전쟁이 끝난 지도 벌써 70여 년.
그 당시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은 이미 죽어 없어진 상태였으니, 당시에 태어나지도 않은 그녀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라버니라면…… 분명 이유가 있겠지.’
그것은 아마도, 이가의 안위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최근 서진혁과 함께 영향력을 점점 키워가고 있는 서가를 견제하는 것.
수십 년 동안 마주했던 혈육이니만큼, 설화는 이한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용과 가까워진 서가를 견제하기 위해 무명교와 손을 잡는다……라.’
단지, 그의 결정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뿐.
‘그쪽 역시 서진혁과 더 가까울텐데?’
성녀와 서진혁이 함께 인천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강화도에서 호흡을 맞춰 본 그녀가 더욱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서진혁과 무명교의 관계 역시 끈끈하다고 할 수 있을 터.
‘어쩌면, 성녀쪽이 아니라 다른 세력을 잡으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는걸.’
그렇다면, 그 세력은 어디일까.
그리고 그들을 포섭하기 위해 이한이 준비한 것은 무엇일까.
푸른 연기를 뿜어내는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곰방대에서 빨아들인 푸른 연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을 때 즈음.
“……설마!”
그녀의 머릿속에 한 줄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 그녀의 오른손이 책상에 놓인 전화기로 향했다.
수화기를 들어 올리고 다이얼을 돌리는 그녀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군기시의…….
“이한 오라버니, 마지막으로 언제 방문했지?”
―대, 대장님?
“빨리.”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에 당황한 상대는 아랑곳없이, 그녀는 으르렁거리며 재촉했다.
그리고.
―나, 나흘 전입니다. 나흘 전에 비고에 들어가신 게 마지막 기록입니다.
“비고. 알았어.”
딸깍!
원하는 답을 듣자마자, 설화는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고는 방에 놓아 둔 병장기들을 급히 챙겼다.
‘비고라고? 그냥 구경하러 간 건 아닐테고.’
수백 년 전 부터 모아 둔 가문의 보물과 보구들을 보관한 곳.
그녀가 알고 있는 이한은 쓸데없는 발걸음을 할 사람이 아니니, 비고를 찾아간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게, 쾰른으로 떠나기 전날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그녀의 머릿속에 오라버니가 가져갔을 만한 비고의 보물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그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단 하나.
‘천상의 열쇠…….’
죽기 전 한국에 방문한 전대 대주교가 이가에 보관을 부탁한 성물.
“오라버니…… 정신이 나가셨군요.”
대외에는, 심지어 무명교의 사제들도 잃어버렸다고 알려진 물건이었으니 이 사실이 드러나면 곤란해지는 것은 가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재앙을 불러올 물건의 봉인을 푸시다니요…….”
순식간에 나갈 채비를 갖춘 그녀는 집무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충! 외부로 나가실 거라면…….”
“궁으로 갈 거야. 혼자 간다.”
우선, 가주인 아버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그리고.
‘교단으로 가야 해.’
재앙을 불러올 씨앗을 회수하기 위해서 석조전을 나서는 설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서진혁 씨.”
대주교, 미하일 베르디온은 올해로 일흔아홉의 노인이었다.
신성력 탓에 나이에 비해 젊고 건강해 보이기는 했지만, 피부에 자글자글하게 져 있는 주름과 검버섯, 그리고 굽은 허리는 그의 나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 한들, 상대는 무명교라는 거대한 집단을 대표하는 사람.
“우선, 앉으시죠.”
초대를 받고 대신전에 들어온 진혁은 대주교가 가리킨 동그란 탁자 앞에 앉았다. 미리 준비해 둔 회색 도자기 찻잔에 담긴 찻물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동아시아 쪽에서 유명한 분을 실제로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저 역시 대주교님께서 만나자고 할 줄은 몰랐습니다.”
상대는 이름 없는 신의 대행자.
충분히 존칭을 쓸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절 보자고 하신 건지.”
그렇다 해서,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잊은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소문대로 성격이 급하시군요. 아직 찻물이 식지도 않았는데.”
“워낙 바쁘게 지내다 보니, 어쩔 수가 없더군요. 빨리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이름 없는 신의 대행자가 예고도 없이 그를 이곳 대신전까지 부를만한 이유.
짐작 가는 게 없지는 않았지만, 짐작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었다.
“음, 알겠습니다.”
재촉하는 진혁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미하일은 아직 입에 대지도 않은 찻잔을 내려놓고는 미소를 지었다.
“성녀님과 친분이 있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잠시 한국에서 함께 활동했습니다.”
“성녀님께 들어 보니, 굉장히 믿음직스러워하시는 것 같더군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친분을 쌓으신 것 같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허나, 그 순간.
미하일은 진지한 표정을 짓고는 진혁과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곧, 그의 입이 열렸다.
“성녀님과의 인연을 이만 끊어 주셨으면 합니다.”
조금 전의 기뻐하던 태도와는 정 반대의 말.
‘역시.’
하지만 이미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던 진혁은 조금도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대주교의 말이 이어졌다.
“저 역시 이름 없는 신을 대신해 지상에 그분의 의지를 퍼뜨리고 있지만, 성녀님은 그분께 선택받았단 점에서 조금 더 신과 가깝다고 할 수 있죠. 그렇기에, 성녀님의 역할은 교단과 그분을 대표하는 상징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해가 빠르시군요.”
대주교의 말을 끊은 진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미하일은 움찔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교단에서 성녀님과 저를 비롯한 주교회의 일은 분명히 나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래 왔지만…… 서진혁 씨가 개입된 이후로는 성녀님의 영향력이 주교회의 것을 침범할 수준이 되었으니까요.”
“결국, 집안싸움의 문제로군요.”
“교단의 미래를 위한 어려운 부탁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대로라면, 성녀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교단이 혼란에 휩싸이게 될 테니까요. 어쩌면 둘로 나뉠지도 모르고요.”
말을 마친 노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으로 교단을 걱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면…….”
진혁이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제가 더 드릴 말은 없을 것 같습니다.”
“서진혁 님.”
그대로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대주교는 손을 뻗어 말리려 했다.
허나,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성녀에게 직접 물으시죠. 성녀가 결정한다면 모를까, 제가 끼어들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교단에서 당신을 적대할 수도 있소.”
떠나려는 진혁을 붙잡기 위해, 미하일은 마지막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당신이 말하는 혼란이 당장 오늘 찾아오겠군요.”
돌아온 것은 진혁의 싸늘한 미소뿐.
“그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대주교를 잠시 바라보던 진혁은,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후우…….”
홀로 남은 대주교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자의 영향력이…… 너무 커.’
요 근래 혜성처럼 나타난 헌터.
괴수들을 수족처럼 움직여 S급이나 A급의 괴수들까지도 사냥하는 데 성공한 그에 대한 정보는 이미 교단에서도 중요하게 거론되고 있었다.
성녀가 그와 친분이 있다는 것만으로 교단에서 잡음이 일어날 만큼.
“이름 없는 신이시여…….”
결국, 도저히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던 미하일이 찾은 것은 신의 이름이었다.
그때였다.
“대주교님.”
누군가가 두 손을 맞잡고 하늘에 기도하는 그를 찾아온 것은.
“……하임, 자네군. 무슨 일이지?”
하임 유타하르덴.
자신을 찾아온 최연소 주교의 목소리에, 미하일은 기도를 마치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말씀드릴 게 있어 찾아왔습니다.”
“그래, 좋은 일이라도 있어보이는군.”
싱글거리는 하임의 표정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대주교의 표정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걸 봐 주십시오, 대주교님.”
하임이 품 속에서 신성력이 가득 든 회색 도장을 꺼내 든 순간.
“이건……!”
그 도장이 무엇인지 모를 리 없는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천상의 열쇠.
과거 교단에서 잃어버린 세 성물 중 하나.
그 것이, 어찌 저 어린 주교의 손에 쥐어져 있단 말인가.
“대체…… 어디서…….”
“수소문끝에 한국에서 찾아냈습니다. 시간은 조금 오래걸렸습니다만.”
“이름없는 신이시여…….”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회색의 광채를 사방에 뿌려대는 회색의 도장을 바라보던 대주교의 눈에 한 줄기 희망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예상대로의 반응이야.’
도장을 손에 쥔 하임의 표정은, 그에게 보이지 않았다.
“대주교와 만나고 왔다.”
“네?”
진혁의 뜬금없는 말에, 저택으로 돌아온 클레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와의 관계를 끝내라더군. 교단에 해가 된다면서.”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이미 익숙한 듯, 진혁의 말을 들은 클레어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 한구석에 드리운 어둠까지 숨길수는 없었다.
“그보다, 준비가 끝났으니까 내려가요.”
“그러지.”
애써 웃움지으며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가리킨 클레어를 향해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곧, 둘의 앞에 돌로 만들어진 무명교의 제단이 나타났다.
“제 개인 기도실이에요. 공식적인 예배 말고는 모두 이곳에서 기도드리고 있거든요. 거기 계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제단을 향해 움직였다.
“그럼, 시작할게요.”
곧, 제단 앞에 선 클레어는 진혁을 향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없는 신이시여…….”
클레어의 입에서 이름 없는 신을 불러내는 기도 소리가 흘러나왔다.
파앗!
성녀의 속삭임과 함께, 회색의 안개가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이내, 안개는 빛이 되어 지하의 예배실을 회색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나타났군.’
진혁은 가득 찬 신성력의 광채 속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곧, 빛무리 사이로 한 소녀가 걸어 내려왔다.
“……오랜만이구나.”
육체는 클레어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그속에 담긴 영혼은 그녀가 아닌 다른 존재.
“멸망의 동반자여."
이름없는 신.
“그래.”
그와 마주한 진혁의 눈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