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31)
진혁이 쾰른으로 출발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의 일이었다.
세한그룹의 전용기를 타고 공항에 내린 진혁이 가장 처음 마주한 건, 미리 연락을 받고 그를 기다리던 무명교의 사제들과 성기사들.
하지만.
“아니…….”
진혁을 처음 마주한 사제와 성기사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기…… 인가?”
“그건 아니지만…비슷한 기운이…….”
다름아닌, 진혁의 몸 속을 흐르는 흑마력때문.
언뜻 마기를 다루는 마인과 유사하게 느껴지는 진혁의 기세에, 무명교의 성기사와 사제들은 그를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중 하나, 회색의 사제복을 입은 남자가 주기장에 내려선 진혁과 주연을 향해 다가갔다.
“한국의 서진혁씨…… 맞습니까?”
“그렇다.”
진혁은 사제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심한 눈빛 앞에서, 사제는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번 방문의 안내를 맡은 수석사제 메르빈 반츠입니다. 도착하자마자 죄송한 말씀이지만, 잠시 본교의 절차에 따라 주셨으면 합니다.”
“왜지?”
“성지 쾰른의 안전을 위해, 쾰른의 모든 방문자들에게 마인 검증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팀장님께서 마인이라고 의심하시는 겁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주연이 나선 것은 그때였다.
메르빈을 바라보는 그녀의 가늘어진 눈매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번뜩였다.
“통상적인 행사일 뿐…….”
“일반 방문객도 아니고, 성녀님과 이미 접견일정을 잡고 왔는데도 마인검증이라뇨. 이건…….”
당황한 사제가 급히 부연설명을 했지만, 호위팀을 이끌던 시절부터 자주 쾰른에 방문했던 그녀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만.”
진혁은 손을 들어 주연의 말을 끊고는, 당황한 메르빈과 눈을 마주쳤다.
“그래, 검증에 응하도록 하지. 이미 한국에서도 했던 일이니까.”
말을 마친 진혁의 눈에선, 거리낄 게 없다는 자신감이 풀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진혁의 말에 메르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사를 표하려했다.
하지만.
“대신.”
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예정되지도 않은 검증을 진행했는데, 마인이 아닌 것으로 나온다면 어떻게 할 거지?”
“그, 그건…….”
“본단에 온 첫 날부터 불쾌한 일이 있었으니,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은데.”
그리고, 그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히 안내를 맡은 그, 메르빈 반츠이리라.
진혁의 말에 담긴 속뜻을 깨달은 순간, 머릿속이 꼬여버린 메르빈은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더듬거릴 수밖에 없었다.
환영행사라는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불편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주변을 감돌았다.
“무슨 일이죠?”
뒤에서 앳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사제의 뒤에 성벽처럼 굳건하게 서 있던 성기사들이 일제히 길을 열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사제복을 입은 금발 소녀와 은발의 여기사.
성녀 클레어와 그녀의 호위기사, 렌 슈미트였다.
“오랜만이에요, 진혁 님.”
진혁을 향해 다가오는 그녀의 얌전한 발걸음과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들떠 있었다.
“이분은 이름 없는 신께서 주시하시는 예언의 존재예요. 절대로 마인이 아니니 굳이 확인하실 필요는 없답니다.”
“아. 알겠습니다, 성녀님.”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클레어의 말에, 수석 사제인 메르빈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선 대신전으로 갈게요. 본단까지 오셨는데 신전 구경은 하고 가셔야죠?”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렌이 이끄는 성기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진혁은 공항 안으로 들어섰다.
‘재밌군, 역시 이름없는 신의 종들이야.’
떨떠름해하는 성기사들의 눈빛을 느낀 그의 입가엔, 묘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무명교의 대신전.
그 한편에는 성녀의 거주를 위해 만들어진 작은 저택이 자리했다.
일행과 함께 저택에 들어선 진혁은 한 쪽 입꼬리를 올렸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라니, 망자들을 데려오지 않길 잘했군.”
이 곳의 거주민 대부분이 무명교의 신자, 혹은 사제이기 때문일까.
진혁에게서 흘러나오는 망자의 기운을 느낀 사람들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숨만 쉬었는데도 이 정도이니, 망자들까지 데려왔다면 십중팔구는 마인으로 의심받아 공격당햇을 터.
“뭐…… 몇몇 성기사나 사제들을 제외하면 본단을 떠나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저나 렌도 처음엔 놀랐으니까, 저 사람들에겐 당연한 일일 거예요. 험, 험.”
그 말에 클레어는 난처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이고는 헛기침했다.
“그래도,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말아요. 그냥 당황한 걸테니까.”
말을 마친 그녀의 표정이 바뀐 것은 그때였다.
“그나저나, 여긴 왜 온거에요? 진짜로 절 보러 온 건 아닐거같은데. 당신 성격이 그렇게 따뜻하진 않잖아요?”
언제 반가워했냐는 듯 의심스러운 눈으로 진혁을 바라보는 클레어.
하지만 진혁이 고개를 좌우로 흔든 순간, 그녀는 당황한 눈을 끔뻑였다.
“어…… 진짜로 절 보러 온거라고요? 진짜?”
“정확히는, 너도 보는 것이지만.”
“뭐야…… 난 또, 괜히 놀랬네.”
뒤이어진 진혁의 말에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그래서, 누구한테 볼일이 있는 건데요?”
그리고.
“신.”
“……네?”
순간, 진혁의 답을 들은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물론, 잘못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름없는 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성녀를 바라보는 진혁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래, 할 말은 그게 다인가요?”
유타하르덴 하임.
유타하르덴 가문의 핵심인물이자, 최연소 주교라는 타이틀을 가진 뛰어난 사제.
자신의 앞에 선 이국의 남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언제 흔들렸냐는 듯 다시 흐리멍텅해져 있었다.
“대주교의 자리라…… 성녀님을 제외하면 이름 없는 신과 가장 가까운 자리니, 당연히 욕심이 날 수밖에는 없지요.”
위로는 이름 없는 신을 대행하고, 아래로는 무명교라는 거대한 조직을 이끄는 자리.
주교의 자리까지 올라온 그가 대주교의 자리에 관심 없을 리 없다.
“하지만.”
이한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엔, 비릿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저 멀리 작은 나라에서 여기까지 오신 분이, 어떻게 절 대주교의 자리에 데려다 주실지는 잘 모르겠군요.”
대주교를 뽑는 것은 그 아래의 수 많은 주교들.
한국에도 무명교의 주교가 한 명 있기는 하지만, 고작 한 표만으로 대주교가 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가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비웃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설명하기 위해, 직접 방문한 것입니다.”
상대의 노골적인 조소 앞에서도, 이한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조금 뒤면, 사제의 얼굴이 어떻게 바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 그것 참 기대되는군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제가 시간이 많지 않아서. 빨리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그러지요. 그 전에…….”
대놓고 나가라는 말과 같았지만, 이한은 화를 내는 대신 팔을 들어올렸다.
“제게…… 뭔가 느껴지는 게 없으십니까?”
“느껴지는 거?”
상대의 뜬금없는 말에, 하임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이한의 몸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신성력이군.”
그것도, 아주 진한 신성력의 향기가.
이한이 들어올린 팔에서 느껴지는 신성력에, 귀찮아하던 하임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당신은 사제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신성력을 다루는 거지?”
이름없는 신에게서 내려받은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의 부름을 받은 성기사나 사제 뿐.
그런데.
어떻게 사제나 성기사도 아닌 자가 신성력을 내뿜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한은 갓 아래로 진한 미소를 띄웠다.
“소개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들어올린 팔의 소매에 넣어둔 물건을 꺼내 보였다.
엄지손가락 세 개 만한 크기의 금속도장.
흔한 장식 하나 달려 있지 않은 수수한 도장이었지만.
“이건……!”
도장을 마주한 하임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회색으로 칠해진 도장에서 피어오르는 것은, 분명 이름없는 신이 내려준 신성력이었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놀랄 일은 지금부터였다.
“오래 전부터 가문에 보관해 두고 있던 물건입니다. 이름은…… 천상의 열쇠.”
“헉!”
이한의 입에서 도장의 이름이 나온 순간, 사제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천상의 열쇠.
교단이 지구로 건너온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하던 사이 사라진 세 가지 성물 중 하나.
“무명교의 잃어버린 세 성물 중 하나를 되찾아 온 공로라면…… 대주교의 자리를 얻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합니다만.”
놀란 채 석상처럼 굳어 버린 하임 앞에서, 이한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진혁이 클레어와 이야기를 나눈 이후.
그와 주연은 당분간 성녀의 거처에서 머물기로 했다.
‘여기가 본단이 아니었다면 모르겠지만, 여기서의 강신과정은 준비가 필요해요. 교단의 주교님들과도 이야기를 나눠야하고…… 아마, 일주일 정도는 필요할 거예요.’
일주일.
길다면 긴 시간이었지만, 신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준비를 하는 데 걸리는 시간 치고는 오히려 짧은 시간.
‘그러지.’
그렇기에, 진혁은 별 말 없이 클레어의 말에 따랐다.
성녀의 손님 자격으로 찾아온 그들을 함부로 대할 사람도 없었으니,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단지,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것이 조금 까다로웠을 뿐.
“팀장님, 괜찮으십니까? 답답하실 거 같은데.”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주연은 소파에 기댄 진혁을 바라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그에겐, 밖에 나가는 것 말고도 충분히 할 일이 많았으니까.
진혁의 시선이 앞에 둔 검은 영혼에게로 향헀다.
여긴…… 너무 무섭습니다. 너무나 무서운 기운들이…….
영혼 대부분이 마기에 침식당했기 때문일까.
그가 홍콩에서 얻은 악령의 정신상태는 매우 불안했다.
거기에, 마기에 상극인 신성력이 도처에 널려있었으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그렇다 해서, 다른 망자들처럼 풀어놓을 수도 없지만.’
지금은 진혁이 흑마력을 이용해 마기의 침식을 조절하고 있었지만, 그가 직접 관리하지 않는다면 언제 이성을 잃을지 모른다.
자아를 가진 악령이라는 희귀한 존재를 잃고 싶지는 않았으니, 곁에 둘 수밖에.
“당분간 할 일이 많으니,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다.”
“……알겠습니다.”
진혁의 말에 주연은 그러려니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그때였다.
“진혁님.”
렌 슈미트.
성녀의 호위를 맡고 있어야 할 그녀가 진혁의 앞에 나타난 것은.
“무슨 일이지? 강신 준비가 끝난 건 아닐 텐데.”
진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렌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원래는 성녀님을 거쳐야 할 일입니다만…… 만나고 싶어하는 분이 계십니다.”
“누구지?”
“대주교님입니다.”
대주교.
성녀와 함께 무명교를 이끄는 이름없는 신의 대행자.
“대주교라…….”
그 말을 들은 진혁의 눈살이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