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 (127)
사령술사는 영혼을 다룬다.
그것은 다른 자의 것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혼도 마찬가지.
잠시동안 육체에서 떨어져 나온 진혁의 영혼이 향한 곳은 주시자의 영혼에 먹혀 버린 수호룡 벨레룩스, 청명의 육체였다.
‘완전히 잠식당했군.’
시커멓게 물든 청명의 정신세계 내에 진입한 진혁은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본래라면 백지처럼 새하얀 공간이어야 할 곳.
허나, 그의 눈 앞에 펼쳐진 청명의 정신세계는 마기에 의해 완전히 변질되어 있었다.
청명의 육체를 차지한 주시자의 영혼이 그만큼 거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
위험을 무릅쓰고 청명의 정신세계에 들어온 진혁의 해결책은 하나였다.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놈을 소멸시킨다.’
그러기 위해선 이곳 어딘가에 있을 놈의 영혼을 찾아야 했지만.
다행히도, 그는 굳이 놈을 찾기 위해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네놈은…… 대체 뭐지?
검은 세상 속에서 한층 더 검게 보이는 존재.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색이라고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눈알 모양의 영혼이 진혁의 앞에 나타났다.
―내 육체를 파괴한 것으로도 모자라 영혼만이 드나들 수 있는 정신세계에 들어오다니…… 대체 날 어디까지 방해할 셈이냐.
주시자.
미처 찾으러 다니기도 전에 나타난 놈의 목소리는 육체를 잃어버린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진혁은 짧게 답했다.
“네가 소멸할 때까지.”
―소멸할 때까지? 아주 자신만만하군!
쿠르릉!
진혁의 답에 주시자가 미친 듯이 웃었다. 검게 물든 정신세계가 그의 웃음에 맞추어 진동했다.
―이곳에 들어올 줄 아는 놈이라면, 이곳이 어떤 곳인지도 잘 알고 있을 텐데?
타인의 정신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정신세계 안으로 들어간 순간, 세계 전체가 침입자를 인지하고 배제하려 하기 때문.
주시자 역시 청명의 몸에 미리 심어 둔 마기가 아니었다면 육체를 차지하기 전에 영혼째로 소멸당했을 터.
하지만.
이제, 이 육체와 정신세계의 주인은 나다. 저 약해빠진 용이 아니라.
쿠르릉!
주시자가 의지를 퍼트릴 때마다 세계가 감정에 따라 흔들렸다.
하지만 진혁의 시선은 놈이 아닌, 놈의 뒤에 있는 하얀 빛으로 향했다.
새카맣게 물들어 있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하얀색을 유지하고 있는 것.
‘청명인가.’
이 정신세계와 육체의 원 주인.
하지만 그녀의 영혼은 검은 기운에 꽁꽁 묶인 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조금 쉽게 풀렸겠지만, 힘들겠어.’
―설마, 저 용의 영혼이 뭔가를 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런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저 영혼은 곧 내게 흡수될 테니까. 그리고.
스으으!
말을 멈춘 주시자가 검은 기운을 끌어모았다. 검은 눈알을 감싼 마기의 덩어리로부터 팔다리가 사방으로 자라났다.
곧, 진혁의 앞에 나타난 것은 검은 갑옷을 두른 거인.
―네 영혼도 흡수해 주마!
스으으!
놈의 외침과 동시에 검게 물든 하늘과 대지가 꿈틀댔다. 파동 사이로 솟아난 수많은 촉수들이 진혁을 포위하듯 에워쌌다.
진혁은 주시자의 수준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거의 완벽하게 장악했어.’
정신세계를 자신의 힘으로 물들인 것으로 모자라, 제 의지대로 뒤틀 수 있을 정도.
이 정도라면, 놈은 정신세계 안에선 거의 신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하.”
진혁은 웃었다.
―뭐가, 웃긴 거지?
쿠구궁!
비웃는듯한 진혁의 웃음소리에, 분노한 주시자와 세계가 꿈틀거렸다.
언제든지 진혁의 영혼을 해치울 수 있다는 생각과 의문 때문에 손을 쓰지는 않았지만, 검은 거인의 가슴팍에 달린 놈의 본체인 검은 눈에선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진혁은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우스웠을 뿐이다.”
파앗!
회색으로 물든 진혁의 오른손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회색빛이 어둠을 몰아낸다.
순식간에 주변에 회색의 영역을 구축해 낸 그의 오른손에 들린 것은, 도깨비불처럼 일렁이는 동그란 형태의 구슬이었다.
“고작, 하나의 영혼을 차지한 주제에.”
우웅!
구슬이 반으로 갈라진다.
반으로 갈라진 구슬은 다시 네 조각으로 쪼개진다.
그리고 여덟, 열여섯…….
아홉 번의 분열을 반복한 구슬 조각의 숫자는 모두 합해 오백열두 개.
진혁은 깨진 유리처럼 부서진 채 둥둥 떠 있는 구슬을 오른손으로 감싸 안으며 말헀다.
“기고만장한 꼴이 너무 우스워.”
파앗!
주먹 안에서 부풀어 오른 수백의 회색 덩어리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하나하나가 사람만 한 크기까지 커진 채 형태를 잡아나가는 놈들의 정체는 구슬을 이루고 있던 영혼들.
완벽하게 형태를 갖춘 영혼들의 모습은, 덩어리 따위가 아니었다.
“명계와 계약하지 않은 자가 생자의 육체를 빼앗는 것은 명계의 율법을 위반하는 것.”
생전의 무기를 들고 갑옷을 걸친 채 눈에서 귀기를 내뿜고 있는 수백의 영혼들.
한때 서가를 위해 희생한 엽사들의 망령들이 무장을 마친 채 사령술사의 주변을 벽처럼 에워쌌다.
“망령이여, 명계의 율법에 따라 명하노니.”
영혼으로 이루어진 벽의 한 가운데에서, 진혁은 입을 열었다.
“저 죄인을, 사냥해라.”
그 순간.
파아앗!
수백의 영혼이 내뿜는 회색빛이, 검은 세계의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뭐지?’
콰아앙!
미쳐버린 용 벨레룩스와 부딪칠 때마다, 말리아는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점점…… 약해지고 있어.’
고룡인 자신의 힘을 쉽게 받아내는 것은 이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지만, 상대의 힘이 미세하게나마 깎여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벨레룩스의 힘이 약해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한 마기의 농도는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었으니까.
‘그거보단…… 집중을 못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쾅! 콰광!
전투가 길어질수록, 상대의 집중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힘의 배분은 물론, 공격과 방어를 위해 사용하는 언령의 수법이 조금 전에 비하면 너무나 허술했다.
‘뭔가……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건가?’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말리아에겐 이보다 좋은 일이 없었다.
‘본체를 꺼내지 않고도 제압할 수 있겠어.’
우웅!
생각을 마친 말리아의 손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금룡의 일족만이 가진 권능, 금룡기가 손에 집중되어 나타난 현상.
그 말인즉.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겠어.’
지금까지 힘을 아껴두고 있던 말리아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이야기였다.
콰과과광!
노인의 몸이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속도로 거대한 용을 향해 쏘아졌다.
황금빛이 몇 번 번쩍하는 찰나의 순간 동안, 말리아의 공격이 검게 물든 벨레룩스의 육체를 수십 번 강타했다.
파지지직!
콰아아아아!
그와 함께 쏟아지는 멜리나와 민호의 공격.
“키에에에!”
검은 번개와 불꽃이 용의 육체를 강타하자 용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나온다.
고룡인 말리아와 비등한 대결을 펼치던 조금 전에 비하면 뚜렷하게 약해진 모습.
‘이제 조금만 더…….’
말리아는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우웅!
그의 손이 다시금 금빛으로 물들었다.
조금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금빛으로 물든 말리아의 양 손으로부터 한 쌍의 칼날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
‘벨레룩스, 자네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었다네.’
하지만, 마기에 침식당해 미쳐 버린 일족을 살려 둘 수는 없었다.
다른 용족의 숨결 대신 얻어 낸 금룡의 권능, 금룡검.
무엇이든 베고 뚫을 수 있는 패도의 기운이 그의 양손에 넘쳐흘렀다.
동족의 숨통을 끊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으리라.
‘부디, 잘 가게.’
잠시 망설이던 말리아는 결심을 굳히고 양손의 금색 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 검이 채 휘둘러지기도 전.
“키에에…….”
돌연, 허공에 떠 있던 벨레룩스의 몸이 휘청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거대한 용의 육체가 수백 미터 아래의 지상으로 추락했다.
쿠우웅!
수백 톤의 질량을 지닌 용이 추락했을 때의 충격이 홍콩 섬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뒤흔들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룡과 자웅을 겨루던 마룡의 최후는 허탈했다.
허나.
“……아직 살아 있군.”
지상에 추락한 용을 내려다보는 말리아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용심.
용이 가진 에너지의 원천이자 생명의 근원이, 아직 식지 않고 만신창이가 된 벨레룩스의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회복하기 전에 끝내야겠어.’
마기에 침식된 이상, 되돌릴 수는 없다.
생각을 마친 말리아는 양손에 자라난 금색 검을 유지한 채 천천히 하강했다.
곧, 수백 미터 아래 지면에 가볍게 착지한 말리아의 검이 마룡의 목을 꿰뚫기 위해 들어올려졌을 때.
“잠깐.”
자신을 방해하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말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인간, 무슨 짓이냐.”
자신을 멈춰 세운 상대가 인간이란 사실에, 말리아는 슬며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죽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용족의 장로이자 수천 년 살아온 고룡을 바라보는 진혁의 입가엔, 엷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인간이여, 용족의 일에 관여하려 들지 말아라. 인간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나, 이 것이 세계를 수호하는 방법이니.”
오만한, 그러나 그 속에 분노를 감추고 있는 말투.
양손에 맺힌 금빛의 칼날을 아래로 내린 노인의 말엔 쉽사리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허나.
“마기에 침식당했다면, 동족이라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겠지.”
고룡의 기운을 정면으로 받아내면서도, 진혁은 여전히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알고 있다면, 방해하지 말아라. 이 이상 방해하려 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터이니.”
수천 년의 삶 동안 쌓아온 살기가 노인의 눈 밖으로 터져 나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곧장 심장마비에 걸려 죽어 버릴 만큼 지독한 살기.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거지?”
칼날처럼 날카로운 살기를 마주한 채, 진혁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육체는 마기에 침식당했겠지만, 영혼은 침식당하지 않고 멀쩡하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네 동족을 살릴 방법을 알려 주려는 것이다, 용.”
노인의 떨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진혁의 눈에서 시퍼런 귀기가 피어올랐다.